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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Sep 06. 2023

한국에서는 찐따인 내가 유럽에서는 퀸카?!

나의 첫 행선지는 독일이었다. 지인에게서 추천받은 생태공동체에 방문하기 위하여 베를린으로 입국했다. 사람과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농장 일을 거들면서 남는 시간 동안 여행자들과 어울리는 커뮤니티 생활이 딱 맞았다. 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쯤 이동해서, 한적한 시골 마을의 작은 커뮤니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바삐 흐르곤 했다. 아침에 함께 일을 한 뒤 한창 더운 한낮에는 연못에 몸을 담궜고,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그룹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들과 깊게 교감하는 것이 목표 중 하나인 곳이라 다양한 워크숍을 통해 서로를 빠르게 알아갈 수 있었다. 그만큼 친구도 금방 사귀고, 플러팅도 오지게 받았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나는 유럽 남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아마도 까무잡잡한 피부, 크고 살집이 있지만 섹시한 골격, 할 말은 하는 당찬 성격 같은 것들이 여기에선 ‘매력적임’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여행에서 만났던 어떤 한국 남자는 날 보며 까만 피부는 좀 촌스럽지 않냐고 했다. 어쩌라고요. 지도 졸라 까맸으면서! 하여튼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바다만 건너오면 로맨스 영화의 여자주인공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래 고마우이 청년~!

어느 날은 한 친구와 얘기하다가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에게 끌리는데, 관계가 발전했으면 좋겠지만 지금의 친구 사이로도 만족하기 때문에 편하게 얘기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해야 했다.

며칠 뒤 새로 만난 다른 친구와 연애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 그 이야기가 나와서 얘기를 꺼냈었다. 그런데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다른 친구가 수상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도 너한테 같은 감정이야. 네가 친구로서 좋지만 너에게 끌려.”

“엑? 그러니? 아이고 이런…미안. 나는 친구로 지내고픈 것 같아.”


난 며칠만에 정확히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줘야 했다. 다행히 두 친구 모두 잘 받아들여서 둘과는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무례한 사람도 있었다. 전혀 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니었는데도 내 발목을 잡아채 마사지를 해주려던 사람이나, 내가 차려입은 걸 보고 너 같은 애들이 이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띄워준다는(놀랍게도, 외국에도 늘 보던 추접스러운 중년 아저씨가 똑같이 존재한다! 웩!) 사람이나, 내가 너무 잦은 플러팅으로 스트레스 받는다 했는데도 성적인 농담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인기가 많으면 우쭐하고 자신감이 생기지만, 동시에 괴롭고 피곤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예쁘다 평가받는 여자들은 이런 일을 늘 견디는 거구나. 어쩜 안타까워라…’. 퀸카로 살아보기(체험판)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거니 싶었다.


그러다 ‘준’을 만났다. 그는 첫 등장부터 꽤 드라마틱했다. 보통은 일요일에 커뮤니티에 들어오는데, 그는 월요일 밤에 갑자기 도미토리로 들이닥쳤다. 다른 사람들은 자고 있었고 난 자려고 준비하던 참이었다. 자기도 게스트인데 늦게 도착했다며, 여기서 자도 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알려주니 주섬주섬 짐을 풀고 웃통을 벗은 채 잘 준비를 했다. 나는 ‘몸이 좋으니 저렇게 아무 데서나 잘 벗는구나’ 따위의 세속적인 감상을 느끼고 잠에 들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그룹 모임에서 준을 다시 만났다. 그때의 나는 커뮤니티에서의 즐거움보다 버거움이 조금 더 많아진 시기였다. 계속 원치 않는 관심을 받는 것도 짜증 났고, 애매하고 사소한 인종차별적 대우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날 모임은 한 파트너와 깊은 대화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내 파트너가 무례하게 행동해서 마음속에 응어리들이 왈칵 터져버렸다. 나는 더 이 모임에 참여하기 싫다고 말하고 나와서 바람을 쐬었다.


왜인지 몰라도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생각을 갈무리하다 준을 떠올렸다. 나는 준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 그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 느꼈던 가벼운 성적 끌림과는 별개로, 내 약한 모습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있었다.


나중에 한번 말을 걸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나를 따라 나온 그를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내 옆에 와서 조용히 앉았다. 곁을 내주는 차분한 기운이 나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파랗고 예쁜 눈동자가 진지하게 눈을 맞춰오며 내게 물었다.


“내가 네 손을 잡아줘도 될까?”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손을 잡자 참았던 눈물이 나올 길을 찾은 것처럼 울컥 터져 나왔다. 내가 울 만큼 울고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그는 단단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내가 그에게 기대고 싶었던 마음과, 그가 나를 보살피려던 마음은 어떻게 이렇게 알맞게 만날 수 있었을까? 마치 가운데에서 만나자고 약속이나 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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