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아 Sep 13. 2023

널 좋아해…❤️
그러나! 널 패고 싶어..

나는 그의 팔을 확 잡아당기고, 밀치고, 괴성을 지르며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내 생에 이렇게 격한 몸싸움은 아마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그 싸움의 상대는 첫눈에 호감을 느낀 ‘준’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이 커뮤니티에서 무척 소수자였다는 것이다. 충만하고 행복한 시간과는 별개로, 은은한 인종차별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독일 국적의 백인이 거의 전부였다. 어느 날 문득 동양인은 나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이질감이란. 나를 면전에서 모욕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차별이란 가령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매일 농사나 요리, 청소와 같은 커뮤니티 봉사활동을 해야 했는데, 자기가 원하는 일을 아침마다 정할 수 있었다. 이런 그룹 활동에선 영어를 쓰는 게 원칙이었고 영어가 아니라면 통역이 꼭 있어야 했다. 그런데 당번을 정하는 사람이 영어를 할 줄 알면서도 늘 독일어를 하는 것이었다. 영어로 말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거의 날마다 반복해서 말했는데도 어느 날은 이렇게 대꾸하기도 했다. “아! 맞다. 영어로 말해야 하지. 까먹었다^^”


참 나, 기억할 의지가 전혀 없던 게 아니라면 그녀는 인지능력에 손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당연히 비꼬는 중이다). 그렇게 외국인 게스트는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얼렁뚱땅 일이 배분되었다. 독일인 녀석들이 하하 호호 웃고 떠들며 꽃이나 따고 있을 때, 외국 게스트들은 농장에서 벌레를 손으로 털어내 잡는 일 따위를 하곤 했다. 그런 상황에 아무도 불만은 없어보였다. 재수없기도 하지.


그래도 내가 이런 일로 힘들어 할 때마다 나를 지지해주는 독일 친구들도 있었다. 둘 다 이민자의 자식이라 인종차별을 평생동안 겪어낸 이들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같이 화내고 울고 웃고 떠들던 중에, 한 친구가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플레이파이트(Playfight) 시작했을 텐데, 한번 가볼래?”

“오! 너무 좋아. 나 얘네 좀 줘패야겠어!”


우리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플레이파이트는, 말 그대로 싸우는 것을 가장해서 노는 거라고 했다. 유도나 주짓수가 싸움이 아닌 것처럼, 플레이파이트도 규칙을 정해 서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몸싸움하며 상대방과 가까워지는 활동이라나. 나는 가까워지는 건 잘 모르겠고 내 화를 합법적으로 풀어야겠단 생각이었다.


누구랑 싸울까 생각하다 쉽게 답이 나왔다. 준은 독일인·백인·남성이다. 솔직히 그런 그에 끌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짜 패고 싶은 사람’ 한 명을 꼽으라면 바로 준이었다. 물론 그가 나에게 잘못을 한건 아닌데, 그냥 집단 대표로서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짜증난다 한들 여자와 있는 힘껏 싸우는 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훤칠하게 몸이 좋은 이 남자…내가 진심으로 덤벼도 괜찮을지도. 매트리스가 꼼꼼하게 깔린 아레나에 들어가 나는 대뜸 준에게 말을 건넸다.


“너랑 싸우고 싶은데 상대해 줄래?”

“…그래.”


아무래도 내 투지를 읽었는지 그는 꽤 진지한 눈빛이었다. 나는 내 분노나 힘을 참지 않고 온전히 쏟아냈다. 손과 발을 마구 잡아당기고 최대한 그를 쓰러트리고 제압하려고 했다.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얼굴은 성이 나서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쁘지 않게 화내는 건 정말 짜릿한 해방감을 줬다!


준도 여자라고 봐주지 않고 제대로 싸우면서도, 내가 너무 궁지에 몰릴 땐 적당히 물러나곤 했다. 그런 균형이 없었더라면 충분히 화를 풀지 못했거나,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경험하는 공포를 느꼈을 것 같았다. 뜻하지 않게 또 신세를 진 셈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원하는 만큼 싸움을 한 뒤에 플레이파이트는 훈훈한 분위기로 끝이 났다. 싸움을 하고 기운이 살아난 나는, 그룹 사람들이 너의 분노를 내보이는 게 멋졌다고 하는 말에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었다. 그래 얘들아, 다시는 코리안 걸을 무시하지 마.


나는 준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의 팔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혹시 나와 싸우다 그렇게 됐냐고 물었는데, 원래 있던 상처가 아물다가 싸우면서 터진 거 같다고 했다. 마침 대일밴드가 있었던 터라 얼른 밴드를 가져와 그의 팔에 붙여주었다. 한국에서 사 온 살색 밴드가 그의 팔뚝에 착 감겼다.


왠지 그의 몸에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 야릇한 만족감을 줬다. 나도 모르게 밴드를 다 붙이고도 손으로 그 자리를 계속 훑었다. 그도 천천히 나의 팔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 허리로 손이 들어왔고, 몸의 더 많은 부분이 가까워졌다. 그가 나를 한번씩 꽉 껴안고, 허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모습이 퍽 맘에 들었다. 우리의 시선에는 아까와 조금 다른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준 앤 줄라이] 구독하기

매주 수요일, 가짜도 진짜도 아닌 사랑이야기를 보내드려요.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에서는 찐따인 내가 유럽에서는 퀸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