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아 Oct 15. 2023

여름날 풋사랑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머피의 법칙 하나, 여행이 끝나기 직전에 로맨스가 생겨서 늘 아쉬운 이별을 한다는 것이다. 준과 짧고 달콤한 시간을 보낸 다음 날, 나는 이탈리아로 넘어가야 했다. 비행기표까지 예매한 터라 무를 순 없었다.


이제는 몇 번 겪어봐서 면역이 생겼는지, 쿨한 척하는 건지 몰라도 짧지만 행복한 추억을 선물해준 준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더랬다.





노곤한 몸으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벌써 인도에 온 지 3주가 다 되어간다. 댄스 페스티벌에서 신나게 춤을 췄고 멋진 사람들과 어울렸다. 일정의 마지막 날인 오늘 물속에서 춤을 췄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곱씹어 음미하는 중이다. 음! 이 맛이지!


그런데 참 신기하다. 나는 여행을 오면 늘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는데, 그런 것 없이 담백하게 여행을 마무리하게 된다니. 뭔가 철든 것 같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신기한 기분이다.


“안녕? 우리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갑자기 누군가 싶었는데 오전에 함께 춤 워크샵을 들은 사람이었다. 아는 얼굴이 없어서 혼자 멍때리고 있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살갑게 말을 걸어준 것이다. 낯을 가리는 편이지만 동시에 사람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척 고마웠다.


워크샵을 들은 사람들 한 무리가 몰려가 만두를 먹었다. 아무래도 먼저 말을 걸어준 사람이 더 편해서 그와 대화를 많이 했다.


그의 이름은 줄라이라고 했다. 우린 식사 후에 차를 마시고, 다음에는 그가 묵는 숙소에 놀러 갔다. 그는 이미 숙소 사람들과도 친해졌는지 로비에서 모여 어울리고 있는 이들과 자연스레 합류했다. 누군가의 기타 연주를 듣고, 소소하거나 때로는 깊은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한나절을 다 보냈는데도 꽤 아쉬웠다. 숙소를 나서는데 들어올 때 눈치채지 못한 꽃향기가 났다.


“되게 좋은 꽃향기가 나네. 아까는 몰랐는데!”


“아, 여기에 핀 자스민꽃이 낮에는 봉우리로 있다가 밤에만 피거든. 그래서 밤이 되어야 향기가 나.”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오늘 밤에 무언가 피어난 것 같아.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서 티가 나지 않길 바랐다.


우연히 그와 하루 종일 어울리고 난 뒤, 줄라이에 대한 생각을 그칠 수 없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겨버린 거다! 나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자며 모인 친구들에게 나는 줄라이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있잖아, 너희 줄라이 알아? 나 오늘 걔랑 어울렸는데, 좀 맘에 드네...”


“아! 그 눈빛이 호아킨 피닉스를 닮은 사람?”


젠장!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매력적이었단 말이야? 오르지 못할 나무인가 싶은 생각을 잠깐.


“마음에 들면 잡아야지. 얼른 뭐하냐고 메시지 보내!”


“으악! 어떻게 그래?”


“그럼, 이대로 보낼 거야?! 당장 연락해!”


나보다 더 흥분해서 거의 고함을 치는 친구 덕분에 나는 그 늦은 밤에, 헤어진 지 고작 몇 시간도 안 되어 ‘뭐해…자니( ͡° ͜ʖ ͡°) ?’ 수준의 메시지를 보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용기가 났는지⋯. 줄라이에게서 답장이 없어서, 조금 죽고 싶다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그런데 일어나서 귀국할 준비를 하는데 답장이 와 있었다. 진짜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늦게 봐서 미안하다며, 아침을 같이 먹겠냐고 했다. 싸던 짐도 내팽개쳐 두고 그를 만나러 갔다.


둘만 있으니 여럿이서 어울릴 때보다 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여행자라는 것, 비싼 레스토랑보다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에 가는 걸 좋아한다는 것(우리는 내가 인도에서 먹었던 음식 중에 가장 저렴한 도넛을 나눠 먹었다), 힌디어를 조금 할 줄 알아 방을 싸게 얻었다는 것(도대체 어떻게? 언어 천재가 분명하다)⋯.


마음 같아선 얼마든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고작 몇 시간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가 내 숙소로 함께 가서 마중하겠다고 했다. 내가 묵던 곳은 공교롭게도 가구라고는 큰 침대뿐이었고, 바닥은 그저 모래사장에 장판을 깔아놓은 가건물이라 침대에 앉아야 했다. 싸구려 숙소 감사합니다, 아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깐 말이 끊기고 눈이 마주쳤다. 어렴풋이 키스하기 직전에 생기는 텐션을 느꼈다. 다만...


“너⋯비행기 타러 가봐야 하지 않아?”


“어! 응⋯. 그렇지!”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캐리어를 들어주었다. 나도 짐으로 부쳐서 서울에 같이 가면 안 되냐는 귀여운 얘기도 했다. 프랑스에 놀러 오면 재워줄 수 있으니 꼭 연락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유럽이라니, 말도 안 돼. 하지만 고맙다고 말하고 우리는 이별의 포옹을 했다.


 


그때가 벌써 3년 전이다. 그 후 우리는 드문드문 연락하다 이내 연락이 끊겼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정말 유럽에 왔고 그에게 만나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무척 반가워하며 선뜻 자기 집에 묵어도 좋다고 했다.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줄라이를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호기심과 설렘이 느껴졌다. 과연 그때 우리는 뭐였을까? 혹시 내가 착각한 거면 어떡하지? 여러 생각들이 오가는 와중에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다.


“혹시 네가 다음 주에 가는 커뮤니티에서 만날래? 너만 괜찮다면 내가 그리로 갈게.”


준의 메세지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준 앤 줄라이] 구독하기

매주 수요일, 가짜도 진짜도 아닌 사랑이야기를 보내드려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쉬울 시간에 더 깊이 사랑을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