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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Mar 12. 2024

너 재수없어!

“우와, 오빠 좀 재수없다~”


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내가 곱씹으며 즐기는 작은 승리 중 하나다.

나의 주관과 생각이 정리되어 안정적인 30대에 들어서기 전에, 나도 여느 여자들처럼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자신감 없는 20대를 보냈다. 그 나이는 그렇기에 참 이상한 남자들이 파리처럼 들끓는 시기였다. 내가 ‘뚱뚱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지만’ 그래도 사랑한다는 남자, 네 목소리가 내가 징그럽다 생각한 살찐 누나 목소리처럼 들린다는 남자, 10살이나 어린 나와 술을 마시고 성추행하려던 남자, 그 모든 사람들과 나는 데이트했다. 호감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불에 데이는 듯이 뜨거운 수치심이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지만 그런 기억은 몇년이고 간다.


그래도 한살씩 먹어갈수록 그 무례한 이야기들에 휩쓸리기 보다는 대꾸하곤 했다. 머리가 조금 커진 후 데이팅 어플로 만난 남자는,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했다. 당시 나는 페미니스트인 나를 받아들이면서도 남자들에게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했을때의 안좋은 반응이 두려웠다. 그래서 먼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독서 모임에도 나가서 활동하곤 했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어쩐지 거기서 만난 여자들하고는 잘 맞지 않았다고 했던 것 같다. 기싸움이 심하다나. 


또 그는 페미니스트였지만 나의 솔직한 모습을 불편해하곤 했다. 나는 하체에 살이 좀 있는 편이고, 편한 옷을 좋아해서 사이즈가 넉넉한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그를 만난 그날에 검은 진청을 입었는데 그걸 보면서 갸우뚱거리는 것이었다. 내가 왜그러냐고 물어보는데 뭐라 웅얼거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자들도 이런 옷을 입나? 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아마도 자기 바지만큼 크고 투박해 보이는-’여성적’이라 칭할 장식이라곤 없는- 그 바지가 불편했나보다.


어떤 날은 설리와 구하라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설리와 구하라가 예뻐서, 여자들이 질투하는 악플을 많이 달아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 했다. 엥? 오로지 여자들이 설리의 노브라와 품행, 남자친구를 곁들인 성희롱을 했다고? 게다가 구하라는 남자친구가 불법촬영 범죄를 저지른건데? 그리고 네티즌 중 여자가 있었거니와 이 문제를 여성혐오가 아니라 여자들의 질투라고 해석한다고? 그때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던 것 같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그건 편협한 시각인 것 같다고 이야기 해줬다. 아마도 한번 더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순간.


그가 내 옷차림에 대해 궁시렁댈때 나는 그닥 귀담아 듣지 않았고 여성에 대한 피해를 곡해할때 반박했다. 그는 자기가 알고있는 편안한 ‘여자친구’, 혹은 ‘여자’, ‘페미니즘’에 들어맞지 않는 나를 낯설어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이 시시각각 떠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금 같으면 나도 이미 너같은 거 싫어! 하고 내쳤겠지만, 아직 외로움을 더 많이 타고 더 불안했던 나는 그를 붙잡고 싶었다. 이미 지겨운 듯한 태도로 뜨뜨미지근한 연락을 이어가는 그에게 졸라서 한번을 더 만났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은, 그는 이미 내게 거의 질렸으면서 또 모텔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쁘게 따라갔지만, 그때쯤엔 이미 우리의 대화는 맞출 수 없이 엇갈리고 있었다. 역시 기억은 잘 안나지만 또 은은하게 빻은 이야기를 이어갔던 것 같다. 뭐가 잘못됐는지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려운데, 신발에 들어간 돌가루처럼 거슬리는 그의 말들. 나도 모르게 “와, 재수없다.” 라고 대꾸했던 기억만 선명하다. 


끝까지 거슬리는 대화 이후에도 나는 ‘연애’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그가 헤어지자고 했을때 한번 매달렸고, 실패한 뒤 혼자 눈물지었다. 금방 떨쳐냈으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조금 쪽팔린다. 그까짓 남자가 뭐 그리 좋다고. 이제는 그 쭉정이보다 재수없다고 솔직히 말해줄 수 있었던 나의 충동과 용기가 더 사랑스럽다. 게다가 어차피 이미 지나가서 내 머릿속에서 조금씩 변화하며 재생될 추억일 뿐이다. 이왕 이렇게 된거 무용담을 불리듯이 신나게 욕해줬다고 생각할까? 자신만만한 그를 조롱하는 상상을 하면 슬슬 웃음이 흘러나온다.


“우와! 진짜 재수없다! 그러고도 오빠가 페미니스트야? 그런 말 하지마. 어디가서 욕먹어. 우리 질질 끌지 말고 얼른 헤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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