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욕망 당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누군가는 가짜 욕망이라고 부를지도 모르는 이것은 내 안에 깊게 뿌리내린 진실이다. 욕구의 대상이 되어 상대에게 당겨지면, 어딘가에 닻을 내리는 기분이다. 특히나 나를 향한 욕망들이 서로 겹치고 부대낄 때 느껴지는 강한 에너지가 종종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다.
스무 살 초반의 나는 마산에 사는 군인 남자애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 애는 내 눈에 되게 잘생겨 보였고, 경상도 사투리가 멋있었고, 가오를 좀 부렸지만, 섹스를 하고 난 뒤에는 애교도 부릴 줄 아는 여우 같은 애였다. 그러나 걔는 휴가를 많이 받을 수 없는 최전방에서 복무했다. 그 때문에 몇 번의 만남 후 통화만 하면서 서로에게 갈증을 느낄 뿐이었다. 사랑이 많이 필요했던 나에게 그건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여우와 연락하는 동안 원나잇을 한번 했다. 이 남자는 얼굴은 번지르르했지만, 섹스는 참 시원찮았다. 아마도 얼굴에 속아 실망하는 여자들이 많았겠거니 혀를 찼던 기억뿐, 섹스에 대한 기억은 다 사라졌다. 반면 아주 선명히 남아 있는 순간이 있다. 섹스가 끝나고 쉴 때 여우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별다른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금방 눈치챈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뭐라 투덜거렸고,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흘려 넘겼으나 그 순간이 섹스보다 더 찌릿찌릿 설렜다.
여전히 더 깊은 교감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당시 새로 관심이 가는 사람이 생겼다. 그때의 나는 관계의 예의가 부족했던 것 같다.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여우에게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 뒤로 걔는 나와 통화를 할 때면 그 형이랑 있는 거냐고 자주 물었다. 나를 여자 친구라고 불러주지 않았던 여유로운 그 애의 조급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볼 때, 참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아마 걔가 불같이 화를 내거나, 나에게 더 집착했다면, 부담스럽고 불편했을 것 같다. 그러나 걔는 괜찮은 척했다. 그런데, 동시에 좀 언짢아 보였고 나를 더 원하는 듯 보였다. 그 은근한 신호가 좋았다. 여우의 반응은, 도통 무언가가 생기지 않는 우리 관계에 허튼 기대를 하게 했다. 여우를 더 좋아했지만 나는 ‘그 형’을 만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돌아보면 나는 내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나 혼자 나를 감당하는 것이 버겁다고 자주 생각해서, 누군가가 자신의 중심으로 나를 끌어당겨 주었으면 했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견디지 않아도 된다고,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게 느꼈다. 그때와 같은 사건을 반복하며 살아오진 않았으나, 이 역동은 내 몸 안에 그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는 결핍이 있는 몸이 있다. 무언가는 내 안에서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는 먹이를 구하고 있다. 다시금 추락을 기대하는 어떤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