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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Oct 15. 2023

결핍과 멈춰있는 욕망

신나게 탐구하던 성욕이 잠깐 멈췄다. 왜냐하면 나는 아프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 타투를 받았고 무척 피곤했다. 누워만 있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하는 말에 타투이스트인 개구리가 누워서 계속 찔리고 있었으니 그렇지. 라고 대답했다. 개구리와 나는 긴밀했고 연애가 될 뻔했지만 그렇게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더 뜨거운 사랑으로 나아가고 싶었고 개구리는 여력이 없다고 했다. 서로는 서로가 원하는 걸 채워주지 못하겠다는 걸 이해하고 울며 인사를 했다. 잘 울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한 방울 눈물을 떨어트려 준 게 고마웠다. 내 감정은 내 것이라지만, 나만 슬펐다면 바보가 된 기분이었을 테다.

그렇게 마음도 몸도 다쳐 있어 욕망을 좇을 힘이 모자란다. 울고 웃으며 풀어내서 이제 후련하다 싶었는데, 개구리가 인스타에 새 타투를 받으며 ‘너무 신난다!’라고 올린 걸 보고 다시금 상처가 쓰라렸다. 너는 나 없이 참 행복하구나(나도 너 없이 행복한 순간을 보냈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되니깐) 하는 얄미운 마음도 들었고, 이런저런 그림들이 빼곡한 팔이 낯익어서 슬펐다. 네가 가진 타투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있어 미웠다. 팔꿈치에 받은 만다라는 예쁘게 잘 됐지만 받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했던 것. 몇 안되게 돈을 내고 받았다는 만화 캐릭터 같은 버섯, 왜냐면 너는 그런 디자인을 특히 좋아하니까.

그 묘한 팔을 예전처럼 쓸어보거나 깨물 수 없다는 사실이 아팠다. 나는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너와 만날 수 없다. 이미 흘러간 강물처럼 그런 가능성 속의 너는 사라져 버렸다.

헤어지는 날에도 아주 아팠다. 원래 아픈 거지만 그날 개구리에게서 사랑하고픈 모습을 찾아내서 더 괴로웠다. 분명 취향이 아니던 얼굴이 헤어지는 날 귀여워 보여서 이미 좆됐다고 생각했는데, 왜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말도 지나가듯 해야 했던 건지 모르겠다.

거의 아무도 모르는 춤이지만, 나는 컨택즉흥이라는 춤을 사랑한다. 취미의 영역보다 훨씬 큰마음으로 기르고 있다. 나에게 이 춤이 소중한 이유 중 하나는, 남에게 멋진 동작을 선보이려고 추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충동과 욕구를 따르고 파트너와 교감하는, 오로지 수행을 위함에 있다. 온전히 나를 감각하는 과정으로써 이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남들을 신경 쓰던 자의식을 내려놓고 내 중심을 가져올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남들이 날 멋지고 재밌다고 생각할지 고민하기보다 내가 저 사람과 어울리고 싶은지, 어울린다면 어떤 식으로 어울릴지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에게는 조금 길게 한다. 개구리는 뭐든 말해버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너무 낯선 장르에 낯선 감각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얼마다 가닿을지는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그런데 헤어지는 날 모든 걸 털어내고 잡담을 할 때, 비슷한 얘기를 꺼내는 나에게 개구리가 금세 내가 해준 이야기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 너에게 컨택댄스는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고 너 스스로를 느끼고 표현하기 위한 거잖아.” 나는 왜곡 없이 깨끗하게 전달되고 기억된 내 이야기를 만나서 놀랐다. 심지어, 요즘 유행하는 맨발 걷기를 하는 아저씨들이 급수대에서 발을 씼어서 짜증 난다는 내 이야기에, “아저씨들은 아무 생각 없을 걸. 그냥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욕구에 늘 충실하니까, 말하자면 24시간 컨택댄스를 하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지.”라고 능청스러운 농담까지 했다. ‘우리만의 농담’은 성실한 듣기와 기억하기에서 나오는구나 싶었다. 그런 사랑이 내가 가장 받고 싶은 사랑이라서, 줄 수 있는 사람이 안 주겠다고 하니 참 야속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보이고 들리고 있다는 느낌, 나는 그걸 달라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늘 문을 두드린다.

그렇게 계속 달라고 하고 몇 번을 실망하다 보면 마음이 두 갈래로 갈린다. 기운이 날 땐 나같이 괜찮은 여자 언제 어디서 또 만나려고 도망가는 거야! 생각을 하고, 그 사람이 미래에 충분히 후회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은 날은 그냥 깊고 깊게···실망을 한다. 또 한 번 받지 못한 사랑. 줄 수 없었던 사랑. 정말 나에게만 이렇게도 사랑이 어려운 건가? 삶의 고통은 계속 일정한 양으로 보존된다는데, 이만큼 나를 괴롭힐 결핍이 또 찾아온다는 건가? 믿을 수가 없다.

나는 늘 할 말이 많은 아이였는데, 우리 집은 분위기가 냉랭하고 험악했기 때문에 우울한 말을 많이 하는 아이였다. 내 말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나마 나를 사랑은 하는 것 같았던 엄마도 내가 우울해하는 건 못 견뎌 했다. 어느 날 엄마에게 내가 힘들다고 말을 하는데, 홱-하고 몸을 돌려서 갑자기 청소를 하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 순간에 나는 내 몸의 투명도가 조금 옅어진 것 같았다. 아무도 봐주지 않기 때문에 금방 사라질 것 같았다. 그나마 크게 웃고 당찬 아이일 때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시절부터 나는 누군가 있는 그대로 날 봐주길 꿈꾸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듣고 느끼고 곁에 있겠다고 하루하루 선택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는 가능성을 아직도 붙잡고 있다.

그래서 오늘을 잘 살기 어려웠다. 생각 없이 음식을 막 욱여넣으며 토를 했다. 먹고 토를 할 때면 내가 가장 괴로웠던 어린 시절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괴롭고 수치스러운 폭식이라는 행위를 성실히 해내고 있는 나는 너무나 20년 전의 그 아이 같아서, 시공간이 납작하게 연결된다. 그 무서운 시간에 갇혀버릴 것만 같다.

오늘은 어쩔 줄을 몰라서 천천히 산책하며 ‘모든 건 변하잖아’라고 계속 되뇌었다. 분명히 나는 과거로 돌아간 게 아니고, 모든 것은 흘러갈 것이라는 진실을 잡아보려 했다. 시선을 떨구고,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웅크린 채 하루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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