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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May 25. 2023

게걸스러운 연애

평생을 굶주린 사람은 고상하게 식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첫 연애는 게걸스러웠다.


독서 토론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그 사람은 낯을 많이 가리는지 모임 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기뻐 보이는 얼굴로 내게 다시 만나자고 인사했다. 그 말에 묘하게 진정성이 있어 문득 생각났다. 만나자고 했으니 만나야지 싶어 메시지를 보냈고, 알고 보니 그는 다음 모임 때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하려 했다고 고백했다. 나를 만날 때면 늘 상기된 얼굴, 나의 모든 걸 열어보고 남김없이 빨아들일 듯이 내게 관심을 기울이던 그 사람. 드디어 내게 무언가 먹을 게 생겼다.     


우리는 두 번째 데이트쯤에 잤다. 그는 무척 흥분해 있었음에도 벌써 하는 게 괜찮겠냐고 내게 물었다. 당시의 나는 두 번보다 더 만나고 섹스를 한 적이 별로 없어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옷을 벗어보니 그가 내 생각보다 좀 더 살집이 있어 살짝 당황했지만, 하여튼 거사는 성공적으로 치렀다.     


나는 그와 연인이 되고서 성급히 너무 내밀한 이야기들을 내밀었다. 내가 얼마나 우울한 사람인지, 지나온 과거는 어떤 굴곡을 가졌는지 꽤 길게 떠들었다. 우리는 이야기가 잘 통했고 그는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섹스를 하고 그의 폭신폭신한 품에 안겨 울었던 기억도 있다. 그의 가슴에는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연도가 적힌 타투가 있었는데, 그 타투를 부적처럼 만지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지금 다시 돌아보면 도대체 어떻게 그가 도망가지 않은 건지 싶을 정도로 무섭게 내 모든 날것의 감정들을 그에게 던졌다.     


나는 그보다 성욕이 강했다. 그건 내가 그보다 젊고 운동을 많이 해서도 그랬지만 훨씬 더 깊은 구덩이가 내 속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계속 나의 안을 메워주길 바라는 마음 말이다. ‘너를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 사랑을 나누다가 그가 언젠가 그렇게 얘기했다. 역설적으로 그가 그 순간을 기억할는지는 미지수지만, 나는 그 순간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건 내가 타인에게 욕망 되고 있다는 소중한 증거였다. 당시 내 인생에서 그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그때의 나는 매주 그를 만나야만 했다. 토요일에 만나면 당연하게 같이 밤을 보내고 일요일까지 어느 정도 같이 어울리다 헤어졌다. 그는 사실 좀 버거워했다. 직장인으로서 여유 시간이라곤 주말이 다인데 나를 만나는 일 외에 다른 것들을 해내기가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우리가 이미 많이 만나기 때문에 주중에는 한 번 정도만 더 보자고 했고, 나는 사실은 모자란다는 말을 꾹 참고 그날만을 기다렸다. 만나지 않는 날에는 거의 매일 통화했다.      


우리는 끝없는 이야기를 떠들었다. 아니, 이야기가 충분히 오가기 전까진 제발 끝나지 않길 바랐다. 저녁쯤에 친구와 있을 때면 통화를 길게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그와 만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을 때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해서 그가 쓰는 언어인 영어로 내 생각들을 바꿀 지경이었다. 오로지 그라는 한 사람에게 닿기 위해서 내 생각은 알파벳으로 굴러다녔다.     


나의 광기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본인의 어려움을 내게 쏟아냈다. 나를 만날 때 그 사람은 이혼 소송을 지나는 중이었다. 그의 결혼생활은 조금의 좋은 부분도 없이 처참히 무너졌다고 했다. 그는 상처받은 마음으로 매섭게 울고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품을 온전히 내어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그의 상황이 오로지 나의 관점에서 무척 미웠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사무치게 사랑하다 못해 나와 결혼하고 함께 사는 미래를 그려주길 바랐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간신히 무너진 미래를 추스르고 있었다. 그에게 우리의 시간은 현재뿐이었다. 따라오지 않는 사람을 미래에서 한참 기다렸다.     


나는 그의 인생에 아직 남아있는 와이프의 흔적들을 느낄 때마다 속이 뒤틀렸다. 처음 다투게 된 계기는 그의 페이스북에 남아있는 부인의 사진들이었다. 그의 집에 드나드는 사이가 되고 매주 주말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바람을 피우는 것 따위는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걸 보고 있는 게 기분이 더러웠다. 사진을 내려달라고 했는데, 그는 지나온 과거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그런 면은 참 답이 없는 고집쟁이였는데, 나는 첫 연애였던지라 딱히 더 대꾸를 못 하고 그냥 혼자 상처받고 슬퍼했다. 그의 냉담한 태도 이후로 나는 그의 전 부인에 대한 앙금이 쌓여갔다.     


크리스마스쯤 그는 많이 우울해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명절인데, 가족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느낌 때문에 불행하다고 했다. 나와 함께 있는데 전 부인을 생각하며 감정에 매몰되어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또 상처받았다. 크리스마스는 너와 나의 것이어야 할 텐데. 지금 곁에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자리를 또 내어준 기분이었다. 내 감정을 털어놓았더니, 그는 한층 더 상처받은 표정으로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냐고 했다. 자기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듣고 위로는 못 해줄망정 내 감정을 먼저 앞세운다고 했다. 그랬나. 그랬던 거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서운하고 슬펐다.     


그 사랑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헤어질 때는 내 몸이 가운데에서부터 반으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뿌리를 내린 그라는 존재가 돌연 무참히 뜯겨나갔다. 울고 또 울고, 어떻게 하면 재결합할 수 있을지 미친 듯이 고민하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에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때 한번 죽었던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일단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나니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이런 사랑을 더 이상 하지 말자는 결심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떠안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했다. 이 연애 이후로 우선 혼자 잘 지내보고 싶었고, 다행히도 어찌어찌 잘 살아내고 있다. 요즘은 호감을 느낀 사람과의 연락이 좋으면서도 약간 부담된다는 기분도 든다. 너무 고자극이라 긴장이 안 풀려서 나 혼자 오롯이 좀 쉬어주고 싶다.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변화다.

정서가 건강한 얄미운 인간들은 이렇게 쉽게만 살아가고 있었다니! 빼앗겼던 자유를 듬뿍 누려 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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