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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Dec 28. 2019

북유럽 둘째날은 걷고, 걷고, 걷고

바깥양반의 신묘한 능력 북유럽 편(2)

 북유럽에 오면서 대중교통은 어느정도 포기하기로 했다. 너무 비싸다. 그런데 백야 때문에 해는 10시에 지고, 날은 또 너무 좋다. 굳이 버스에 갇혀서 좁은 창으로 구경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동선을 크게 잡지 않고 우선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헬싱키에서 맞는 북유럽 여행 둘째날, 우리는 그래도 욕심을 내어 이른 아침을 시작했다. 아직 시차가 잘 적응이 되지 않기도 했고, 여행 초반에 팔팔할 때 많이 걸어보기로 했다. 


"어떻게 할까. 한바퀴 돌아?"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빠꾸하면 되지 뭐."


 헬싱키역 바로 옆, 홀리데이 인에서 묵으면서 보니 바로 옆에 꽤 큰 호수가 있다. 원래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 한번 돌아보기로 했다. 바깥양반은 사이드백 하나. 나는 백팩에 카메라와 책 한권 그리고 보조배터리, 충전기. 필수품 정도만 넣은 건데도 제법 두둑하다. 그래도 밤 10시에 해가 질 테니 준비는 단단히 해야지. 호텔 문을 나와 보니 아직 안개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헬싱키의 아침이 고즈넉하다. 거리에 사람은 드물고 열차 선로가 까마득히 누워있는 헬싱키역만 홀로 드문드문 분주했다. 어딜 가나 한 없이 넓은 정원들에 깔끔한 신축건물들을 구경하며 "퇼뢰" 호수를 구경했다. 지도상에는 도로로 잘려 있어 호수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내륙 깊숙히 들어온 만이라고. 당시엔 잘 몰랐지만, 피요로드 지형을 처음 구경하는 것이기도 했다. 강이 이어진 것도 아닌데 깊숙히 만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니까.


"와 진짜 좋네."

"그냥 한바퀴 돌까?"

"우리 목적지가 어딘데."

"원래는 호수 반대쪽으로 돌아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음...근데 이쪽으로 가면 카페가 있네. 구경해보자."

"오 좋아."


 구름은 한점 없고, 안개가 걷히며 투명한 북구의 하늘빛이 총총 눈이 부시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원래 한바퀴 돌 생각은 아니었는데 돌아서기엔 너무 좋은 날씨에, 바깥양반이 사랑하시는 카페 뷰를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멀리 한바퀴 빙 도는 동선을 잡았다. 예상대로, 만을 끼고 오른 야트막한 언덕에는 아기자기한 목조건물이 차와 브런치를 팔고 있었다. 우거진 숲과 목조주택, 서늘한 아침 바람. 몇시간이라도 걸을 수 있을듯했다. 너무 일찍 나왔을까, 카페가 오픈을 아직 안했다. 이 화창한 뷰를 바라보며 레모네이즈 씨원하게 한모금 들이키면 그리스인가 어디 신들이 마셨다는 넥타르가 부럽지 않을듯한데 아쉬웠다. 그래도 레모네이드만큼이나 상큼한 숲의 청명함에 기분이 마냥 좋았다. 우리는 퇼러 내만을 한바퀴 빙 돌았다. 

 어디를 보아도 눈이 호강이다. 퇼러만을 빙 둘러싸고 오페라극장, 국립박물관, 컨퍼런스 센터까지 전통과 근대의 조화가 멋드러지다. 바깥양반은 유럽 여행을 여러번 했고, 나는 이번 여행이 처음 오는 유럽여행이었다. 그런데 첫날의 인상에 이어서, 둘째날 바라본 헬싱키 역시 화려함 없는 견조함이 두 눈 그득히 차올랐다. 다만 이렇게나 아름다운 도시인데 어째서인지 아기들이 많이 보이진 않았다. 겨우 한나절 다녀보고 뭘 알았겠으랴만은 거리에 사람도 어린아이도 많지는 않다. 인구밀도가 워낙 낮은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이 각자 어린이집에 가 있는 것인지. 이 화창한 날에 아이들의 미소와 웃음소리가 공원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랬다면 더욱 완벽한 아침이었을 텐데. 

1시간 30분

 그렇게 한시간 반을 걸어 템펠리 아우키오에 도착했다. 입장료가 있었다. 1960년대에 암석을 파내어 만든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미니캔들로 축원을 하고 있었고, 성가대 공연도 하고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짧아 알지 못했지만 검은 피부의 영혼이 담긴 연주자들의 복식들이 천연 채광으로 빛이 가득한 빛 속에서 더욱 아름다웠다. 물도 마시고 잠시 다리도 쉬면서 조용히 성가를 들었다. 그러나 휴식도 잠시. 우리는 갈 길이 많다. 씩씩하게 걸어나왔다. 다음 일정은 수오멘린나. 


"배를 타고 가야한다고?"

"응 여기가 옛날에 무슨 요새였다는데. 헬싱키에 몇 안되는 관광코스야. 오늘 메인 일정은 여기 하나."

"그거 보고 나서는?"

"저녁 시간 될 거야. 노을만 보면 돼. 장소는 오빠가 골라봐."


 다시 걷는다. 걸어도 걸어도 날씨도 좋고 거리도 아름답다. 이번엔 다시 헬싱키 시내를 통과해서 항구로 가는데, 첫날의 동선과 겹치지 않게 길을 잡았다. 어디 다 있나 했네. 헬싱키역 앞 메인스트리트엔 아이도 사람도 가득했다. 클래식 협연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노상 카페에 한낮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바깥양반은 사진 찍히는 것을 또 굉장히 좋아하는데 나는 바깥양반의 그런 성향을 썩 탐탁지는 않아한다. 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멋대로 사진을 찍고 싶을 때만 찍어주거나, 바깥양반이 부탁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찍어주곤 하는데 이런 아름다운 정경에선 계속 카메라에 손이 간다. 어디서 찍어도 아름답다. 


 아. 바깥양반이 아름답다는 얘기는 아니다. 거리가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 

 전날 들렀던 에스플라나디 공원도 다시 걸어보고, 항구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유람선 시간을 기다렸다. 헬싱키항구엔 큰 수영장이 있었다. 북유럽 여행을 계속 하다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여름엔 북유럽의 모든 도시, 어느 곳에나 풀장이 생긴다. 시간이 조금 남아 수영장 근처 바에서 맥주를 하나 시켰다. 


"북유럽 맥주는 어때?"

"맥주야 뭐. 이제 미련은 없어."

"우리 집에 갈 때 종류별로 한캔씩은 사가야지."

"그거 어차피 내가 다 먹어 없앨 건데."

"그래도."

"그거 어차피 내 캐리어에 밀어넣을 거잖아."

"그래도."


 맥주를 한잔 마시니 아침 일찍 일어나 걸었던 피로와 함께 시차적응으로 부족한 잠이 몰려왔다. 배 타면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까. 그러기엔 여전히 너무나 아름답고 투명한 하늘과 공기다. 그런데 바깥양반은 안피곤한가? 바깥양반은 짐이 없고 나는 가방에 무게가 제법 들었지만, 그래도 잘도 걷는다. 수오멘린나에서도 한시간 이상은 걸어야 할 텐데. 점심 때가 되고 하니 쉬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그러나 바깥양반은 팔-팔하다. 아니 원래는 내가 걷는 걸 좋아하고, 바깥양반은 많이 못 걷는 편인데.


 배가 왔다. 우리는 배에 몸을 싣고 수오멘린나를 향했다. 배를 타며 인상깊었던 것은, 선장과 스탭들이 모두 2~30대 젊은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문득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공공노동자의 비율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 젊은 여성들이 모두 공무원이고, 젊어서 각 분야에서 노동에 종사하다가 자유로이 노동 재생산을 위한 휴가와 휴직, 퇴직을 택할 수 있다. 사회 전체가 개개인의 삶의 품위를 위해 협력한다. 아름다운 국가공동체다. 이토록 풍요로운 나라에도 길고 긴 겨울 탓에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또 어떤 아이러니의 극치인지. 유람선은 수오멘리나로 매끈하게 날아갔다. 중간에 웬 작은 섬에 레스토랑이 덩그러니 있는데 사람들이 제법 내린다. 게다가 꽤 이름난 맛집이라고. 

두시간반

 처음으로 북유럽의 해안선을 즐기는 것은 아름다웠지만, 수오멘린나는 기대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헬싱키를 방어할 전진요새로 해군사관학교와 호텔 등 꽤 큰 섬이었지만 오전 내내 보았던 헬싱키의 풍경에 비하면 뭐 퍽. 내가 피곤한 상태여서 흥미나 감동이 동하지 않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성채 말고는 널찍한 곳곳에 건물들이 조금. 그리고 섬에서 바라보는 헬싱키의 정경. 그리고 의외로 관광지로 꾸며져 있어서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어트랙션들이 조금 있었다. 그런데 또, 수오멘리나 말곤 헬싱키에 관광지가 딱히 없는듯. 오늘이 지나면 내일 오후 스톡홀름에 가는 배를 타야 한다. 느긋하게 걷다가, 쥬스도 사 마시다 보니 주어진 두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다시 배를 타고 나온다. 그 사이에 피곤함은 다소 가셨다. 그러나 어느덧 오후 세시가 지난 시간이고 이제 마지막 코스를 잡아야 할 시간이다. 바깥양반은 곳곳에 들르고 싶은 샵을 여러곳 정해두었다. 그래서 바깥양반이 골라둔 샵을 포함해서 다시 헬싱키를 관통하는 먼 코스를 잡았다. 오늘의 마지막 하이킹은 시벨리우스  공원이다. 


"노을을 보려면 한참 걸어야 되겠네 또."

"너무 무리 같으면 멀리 가진 말자."

"근데 또 오늘 뽕을 뽑긴 해야지."

"시벨리우스 공원까지 멀어? 버스 탈까?"

"너는 어때? 더 걸을 수 있어?"

"아직 괜찮아. 힘들면 카페 들러서 쉬면 되지."

"그래 천천히 가보자."


 배에서 내려 천천히 걷는다. 바깥양반은 북유럽 감성이라는 샵을 중간 중간 여러곳 들렀다. 덕분에 나도 지친 다리를 드문드문 쉬게 할 수 있었다. 수오멘리나 요새의 단조로운 돌벽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정취가 담긴 여러 건물과 악세사리, 책, 우편엽서 등을 구경하며 체력과 호기심을 충전했다. 사진도 많이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좌우를 더 둘러보았다. 


 도시 곳곳에 농구장, 축구장이 눈에 띄었는데 이채로운 것은 어딜 가나 남녀 청소년이 어루러져 함께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축구팀은 나이가 어린 초등학생들이 하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다 큰 청소년들이 남녀 같이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놀랍고 흥미를 끌었다. 북구인들이 키가 크기도 하지만, 성역할이 딱딱 나뉘어진 우리나라, 게다가 교육열 때문에 여학생들이 책상물림으로 하는 취미를 익히는 문화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바깥양반과 나는 한참을 걸었고, 곳곳에서 혼성 스포츠를 구경했다. 이것 또한 북유럽의 본모습일지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것을 또 한번 깨닫는다. 우리와 너무 닮아있는 메트로시티의 분주함보다도 고유의 정체성을 강하게 풍기는 작은 도시 헬싱키에서 복지국가의 품격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이 아이들은 구구단을 외우기 위해서 나머지 공부를 하는 일은 없었을 테지. 과외란 말도 아마 모르고 살 것이다. 긴 여름만 견디면, 그보다 긴 여름의 태양 밑에서 한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이런 행복한 삶을 언제쯤 누리게 될까. 

두시간+두시간 추가. 일곱시간?

 슬슬 바깥양반에게 경외심이 들기 시작했다. 벌써 일곱시간 이상 걷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바깥양반이 이런 분이 아니신데, 잘도 걷는다. 왜 서울에선 이렇게 안걷지? 연애 초기, 바깥양반은 무조건 내가 차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래서 나는 바깥양반이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둘이서 제주도를 몇번 다녀오는 동안 단 한번도 올레길을 걸어보지 못했다. 걷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나인데. 이렇게 잘 걷는 사람이었다면 나랑은 왜 진작 안걸었던 거야? 의구심이 들었지만, 굳이 입밖에 내진 않았다. 그보다는, 걱정이 됐다. 난 이만큼 걷느라 힘든데 바깥양반은 힘들진 않나? 


 그러나 바깥양반은 8시, 9시가 넘어야 맞이할 수 있는 노을을 보기 위해 기끼어 오늘의 길고 긴 산책에 즐겁게 임하고 있다. 나는 바깥양반이 찍어놓은 포인트들을 섭렵하며 조리있게 길을 잡는 한편, 군데 군데 눈에 띄는 곳이 있으면 같이 들어가보거나 사진을 찍어주었다. 긴 거리를 느긋하게 함께 걷다보니 뉘엿뉘엿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푸르디 푸르던 하늘의 채도가 조금씩 감소한다. 이쯤 되고 보니 이제는 걷는 것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갈 때도 걸어서 가야지. 오늘 하루 이만큼 걸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남은 긴 일정에도 자신감이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계속 걸었다. 그리고 시벨리우스 공원에 도착해서는 산책을 조금 하고서, 호숫가의 카페 두군데를 돌며 커피와 맥주를 연달아 마셨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커피로는 일곱시간의 산책의 보상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맥주는 바깥양반은 두어모금 이상을 마시지 못했다. 대신에 내가 맥주를 두잔 마셨고, 커피는 각자 마셨다. "카페 레가타"의 시나몬롤의 향이 지친 몸을 달래준다. 카페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려니 드디어 이제...해가 지기 시작했다.

 작은 항구에서 맞이하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세 아이가 실컷 헤엄을 치고 놀다가 데크로 올라와 머리를 말렸다. 테이블 위엔 음료병이 놓여있다. 시간이 정지하길 바랄만큼 아름다웠다. 바깥양반의 손을 이끌어 이곳 저곳 공원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뷰파인더와 모니터의 작은 프레임으론 내 눈을 가득 채운 이 시시각각의 빛의 유영을 담아낼 길이 없었다. 다시 <The Downeaster "Alexa">의 곡조를 흥얼거리며 나는 다시 못볼지 모를 노을 풍경을 눈에 담았다. 느리게 느리게 해는 저물었고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긴 하루의 마무리로 더 할 나위가 없다. 


"바깥양반 덕분에 별 걸 다 봐."

"짱이징."

"호텔까지 언제 가냐."

"가는 길에 헬싱키 마지막이니 장도 좀 보자. 저녁도 대충 먹었으니 간식이랑, 맥주도 사고."

"지금 몇시지?"

"아홉시 반 넘었는데. 찾아보니까 12시까지 하는 마트들 호텔 근처에 몇개 있어."

"그래. 다리 안아파?"

"응 괜찮아."

"내일 나 못일어나면 업고 다녀라."

"웃기고 있넹."


 노닥거리는 사이에 절정에 이르렀던 낙조가 마지막 광채를 뿌리다가 사위었다. 이제야 걸음을 돌린다. 바깥양반은 무슨 힘이 남아 도는지, 만족스러운 하루를 마친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며 팔짝 팔짝 뛰기 시작한다. 나 발목에 감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두워진 헬싱키의 거리도 여느 도시처럼 도로공사가 늦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길을 피해 천천히 걷다가 헬싱키역 앞 광장에서 마지막 눈요기를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훈제 치즈란 것을 안주로 골라봤는데 영 맛은 없었다. 호텔이 가격대가 비싸 데펴먹을 도구 같은 것을 엄두를 내지 못해, 차갑게 냉동된 것을 먹어서 그런가보다했지만 몇 입 먹지 못하고 그만 버리고 말았다. 아홉시간은 걸었을까. 바깥양반에게 이런 빵빵한 체력이 있을 줄이야. 마음껏 걸었다. 피로함 뿌듯함 경외심, 그리고 여러 감정들의 여운을 느끼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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