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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Dec 24. 2019

어젯밤 나는 파기름을 내었고

육개장은 한시간반에 완성됐다.

 냉동실에서 고사리가 숨쉰채로 발견되었다. 언제 넣었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아마도 엄마가 챙겨놓은 식재료를 가지러 집에 들렀다가 내 멋대로 털어온 것인듯 하다. 이런 경우가 꽤 많다. 요즘 매일 밥에 좁쌀을 넣어 짓는데 물론 집에서 입도 벙끗 안하고 가져온 것이다. 엄마 아빠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이번엔 냉동고를 새걸로 바꾸셨다. 든자리 아시는데 난자리 모르는 살림법에 내가 바쁘다.


 냉동 고사리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육개장이지.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않는다. 손이 너무 많이 가고 두 명 살림인 우리집에서 수고가 아깝지 않은 정도의 육개장을 끓였다가는...2주일 쯤은 먹게 될 것이었다. 연말이라 외식도 많고 다른 식재료들도 상하기 전에 해치워야 하니까. 그렇다고 손 안가는 미역국과 무국으로만 소고깃국을 끓이는 것도 한심하고, 육개장을 하고 싶다. 추워질수록 격렬하게 뜨끈하고 후끈한 육개장 국물을 내 손으로 만들고싶다.


 예전에 레시피 없이 했다가 망한 전력이 있어 이번엔 미리 레시피를 검색했다. 밑간을 꼭 해야하나? 고사리 말고 숙주와 토란대는 최소한 있어야 하는데 역시나 큰 공사다. 퇴근길에 불현듯 육개장 생각이나 쇼핑백도 없이 마트에 들렀다가 토란대며 숙주를 백팩에 넣을 순 없어 발길을 돌렸다. 당장 육개장이 아니어도 국을 끓일 건 많으니까.


그때쯤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 주인 찾아가세요

 비염을 달고 사는 나와 바깥양반을 위해 엄마가 손수 만든 편강, 그리고 생강조청을 가져가라는 문자였다. 김장하고 벌써 한달째구나. 나는 엄마에게 답장했다.

- 주말에 수달이랑 갈게요.


 아침에 옥수수라떼를 해줬던 엊그제, 나는 바깥양반이 퇴근하자마자 차에 태워 집에 들렀고 엄마는 편강과 조청, 그리고 국 끓이라고 고기를 챙겨주시고는 “가만 있어보자 또 뭐가 있지-“라며 머리를 긁으며 냉장고를 이리 저리 뒤지셨다. 김치냉장고에서 흰 봉투에 싸인 뭔가가 나왔다.


“이게- 아 너 이거 가져갈래?”

아싸.

“숙주네? 가져갈게 육개장 끓이게.”

“그래 이거 다 가져가 나도 국 끓이려고 둔 건데.”

“나 다 못먹어. 반만 가져갈게.”

“그려.”


 두번째 재료가 확보되었다. 생 숙주는 아니지만 데친 숙주, 그것도 딱 맞춤한 분량을 챙길 수 있었다. 아닌밤중에 육개장이라니 대체 왜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는가 싶긴 하지만.


 일요일 밤 바로 육개장을 하려고 했으나 마침 대파가 딱 떨어진 상태였다. 집에 오는 길에 동네 야채가게를 확인했지만 당연히 쉬는 날이었다. 토란대도 없어, 대파도 없어. 데쳐져 있는 숙주가 신경 쓰이지만, 하루를 미루는 것이 결론이다. 드디어 어제, 미리 대파를 사고 토란대 대신에 부추를 샀다. 고사리, 숙주, 부추에 대파면 구색을 맞출 수 있을듯하다.


 바깥양반과 영화를 보고 집에 오자마자 먼저 고기를 썰어서 육수를 내고, 부추와 대파를 손질한다. 조리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고기부터 썰었으니 도마와 칼을 한번 씻어내야 했다. 냄비를 하나 더 내 얼려있던 고사리를 물에 데쳐내었고, 그 냄비를 씻어 다시 고추기름과 함께 대파를 볶기 시작했다.

 부추, 숙주, 고사리가 준비가 되었으니 벌써 15분 이상 끓인 고기를 건져내 참기름과 간장에 고춧가루를 올려 밑간을 해야했고...아아아 바쁘다 바빠. 열시반이 다 되어간다. 밑간에 재료에 배어들게 잠시 둔 채로 싱크대와 전기렌지를 오가며 설거지와 파볶기를 동시에 했다. 우리 바깥양반은 드라마에 집중하고 계시다.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파기름에 먼저 육수를 붓고(거름망을 써야했다.) 무친 속재료를 넣었다. 끝나간다. 간장을 더 붓고 다시마 한스푼, 설탕 약간, 새우젓. 마늘, 많은 마늘. 그렇게 드디어 육개장이 완성됐다. 시계를 보니 꼬박 한시간. 국회 필리버스터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다. 개소리가 기가 차긴 했지만.


큰 일을 치르고, 설거지도 이미 마쳐놨고, 육개장도 제법 맘에 들게 만들어졌고, 다른 장 본 것들도 치워놨고. 밤이다. 영화 감상문과 독후감 두개만 쓰면 된다. 보람찬 밤이 깊어져간다. 엄마에게 보고를 했더니 첨삭지도가 날아왔다.


- 잘 했네. 계란을 풀어넣어야 완성이야. 그래야 맛도 좋고.

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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