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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09. 2024

삐빅 딸바보 입니다.

이틀째 아픈 아이가 수박을 달라고 해서

"나 이거 생일 날 틀어줄 거야. 애기 생일 말고 내 생일."

"ㅋㅋㅋㅋㅋㅋ"

"내 환갑 때 틀어야지."


 겨울 수박은 하우스 수박이라, 해를 보지 못해 당도도 떨어지고 값이 비싸기만 하다. 5만원이라니. 5만원이라니. 여름에 이 정도 수박이면 비싸도 18000원이면 살 텐데. 그런데 한 겨울 1월의, 마침 맹렬히 추웠던 날 수박이라니. 


 나는 차에서 수박을 들고 올라가며 아내에게 문자를 했다. 딱 카메라 켜고 기다려라 애기가 수박을 받아안는 순간의 기쁜 표정을 보자꾸나. 그리고 당당히, 마치 관상의 수양대군 이정재처럼, 딴딴은 한데 그리 묵직하진 않은 사이즈의 수박을 들고, 우리 아기에게 향한다.


 크게 다쳐 몇일간 앓고 있던 아이가 울며 찾던, 겨울 수박을.  





 동백이가 크게 다쳤다. 돌보고 있던 아빠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있던 아이가, 내딛기 한번에 그만 쿵, 하고 머리를 찧었다. 미간이 찢어졌고 다친 아이가 아빠의 품에서 우는 사이에 시뻘겋게 멍이 들었다. 샤워를 하던 아내를 기다려 바로 응급실로. 그리고 우리는 새벽 세시에야 집에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동백이는 다음날 아침 반창고를 눈 사이에 붙이고도 씩씩하게 놀았지만, 그 이튿날 일요일이 되니 문제였다.


"으아앗!"

"아니 뭐야아! 어떡해애!"


 머리를 찧어서일까, 아니면 아침에 썰매를 타고 와서 추위 탓일까, 아니면 또, 다쳐서 먹게 된 항생제 탓일가. 엄마 아빠 사이에서 낮잠을 자던 아이가 갑자기 먹을 것을 모두 토해내기 시작했다. 혼비백산하며 아이를 씻기고 이불을 빨았지만, 그때부터 멘붕한 부모의 비명에 아이는 겁을 먹고 울며 세탁기에 들어간 자기 애착이불을 찾으며 울었다.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안된다는데 두 뺨과 목덜미, 머리카락까지 다 젖어버려, 아이를 두루 씻기고 이마의 메디폼을 갈아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이어진 세시간 내내 토하며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이튿날인 오늘은 설사를 시작했다. 


 장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출근한 우리는 평소에 하지도 않던 전화를 수시로 걸었다. 아내도 나도, 학기말로 조퇴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행히 동백이는 기력은 없어도 원래의 그~~~~~ 쾌활한 성격으로, 잘 놀긴 한 모양. 그러나, 집에 들어갔을 때 내게 안기는 아이를 쓰다듬는 아빠의 마음은...


"아빠, 슈박."


 응? 수박?


"슈박 죠오. 슈박. 슈바악."


 동백이는 수박을 좋아한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먹고 토하고 설사를 반복했다. 


"슈바악 으아앙. 슈박. 슈바악."

"아 동백아 지금 수박이 없어. 겨울이라 안 팔아."

"으응 슈박. 슈바악."

"어휴 어떡해. 까까 먹을까?"

"아니이 슈바악. 으으으응-."


 나는 핸드폰으로 수박을 검색해보았다. 팔긴 판다. 하우스 수박이. 그러나 다들 5만원씩은 하는데다, 이틀 뒤에나 온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아기는 지금 눈 앞에서 울고 있고 나는, 결심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수박 사올게."

"뭐? 지금 수박을 어디서 사?"

"백화점...가면 있겠지. 일단 가볼게."


 나는 수박을 사오기로 했다. 백화점 가면, 뭐라도 있겠지. 그렇게 다시 옷을 갈아입고 키를 챙겨 방을 나왔는데...


"나도! 데려가!"


 이번엔 동백이가 다시 아빠 다리에 매달린다.


"아이쿠...안돼 동백아. 아프잖아. 아빠가 나가서 사올게."

"아니야! 나도오 나도 가아. 무서워."

 

 27개월이다. 약삭빠르게 이런 저런 핑계도 댈 줄 아는 나이다. 무섭다는 거짓말로, 아빠를 따라오겠다며 조른다. 그것은, 어쩌면 아픈 몸으로 하루 종일 엄마 아빠 없이 보낸 아이의 외로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까스로 아이를 떼어놓고 집을 나왔다. 따라온다는 아이를 옷을 입히는 사이에 따돌리고, 집을 나오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혼자 백화점으로.

 그러나, 백화점에서는, 실패. 그래도 동네에 있는 유일한 백화점인데 수박이 없다니. 정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굴하고 있을 순 없지. 지금도 집에선 배가 고픈 아이가 수박을 찾고 있을 것이다. 빠르게 동네 홈플러스로 향한다. 


 아, 홈플러스보다...그리로 향하는 길에 식자재마트가 있다. 동선상으론 비효율적이지만, 안가보는 것보단 낫다. 홈플러스에 없으면 저 말리까지 헤메일 판. 


 그리고, 발견했다. 수박을. 


 수박. 카페를 하는 사장님들은 수박을 안쓸 순 없으니, 그들이 자주 방문하는 식자재마트엔 몇통씩은 들여놓는 것 같았다. 진짜로, 실물로 본, 그 수박은 5만원. 


"수박을 사시게요?"

"네. 딸네미가 지금 다쳤는데 수박을 엄청 좋아해요."

"아이구 그럼 달아야 할 텐데."


 계산대의 점원께서는 해살스레 웃으며 아이 걱정을 해준다. 그래. 달아야 할 텐데. 나는 감사인사를 하고 얼른,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수박을 만난, 아이의 표정은 얼마나 행복한가. 이제 알 거 다 알고, 할 말 다 하는, 아이는 이미 27개월이다. 어휘력의 부족함 외에 인지나 표현에 부족함이 어른과 다를 바 없는 시기이니, 솔직하게 수박을 만난 기쁨을 표한다. 


 아이에게 건내주었던 수박을 잠시 만져보도록 한 뒤, 나는 수박을 다시 들어서 품에 안고 아이에겐 식탁 의자에 앉으라고 시킨다. 아이는 다다다 달려가 의자에 앉는가 싶더니, 수박을 싱크대 위에 올려두고 내 방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온 아빠의 다리를 끌어안고 "아빠 사랑해."라고 외친다. 


 아휴. 이 세상에. 이런 존재가 또 있을까. 


 수박에, 칼을 푹 찌르니 퍼억, 하고, 실한 과육이 갈라진다. 명품은 명품이로구나. 그러나, 반으로 갈라보니 색이 영 바랬다. 붉지가 않고 주황과 분홍을 섞은 색이다. 하우스는 하우스로구나. 겨울이라 달아질 수가 없었나보다. 


 그러나 그것도 감지덕지지. 나는 수박을 열심히 손질해, 엄지손톱만한 사이즈로 아이의 접시 위에 올려준 뒤 아내를 불러 얼른 씨를 빼라고 요청했다. 아이가 가뜩이나 토하기 쉬운데 입 안에 씨가 들어가면 큰일이다. 다다닥닥, 나는 수박을 썰고 아내는 시를 배고 아이는 먹고...겨울밤 수박의 풍경, 이채롭기도 하다. 

 겨우 수박을 모두 자르고 나는 겨우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팠을 테지. 아빠가 잘 지켰다면 안 다쳤을 테지. 아이의 여린 몸에 흉이 있고 위 아래로 음식을 거부하는 반응으로 고달파지는 것에, 무엇보다도 마음이 쓰리다. 


 5만원의 수박에, 겨울밤의 아이의 울음에. 하루하루의 온갖, 복잡한 감정에, 이렇게 아이는 자라고, 우리는 부모가 된다. 세상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들일지라 해도, 이런 하루, 이런 나날이 흐르고 흐르다보면, 딸바보 아들바보가 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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