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전회가 담긴 오컬트 수작
<검은 사제들> 이후 벌써 세 작품 째. 장재현 감독이 뚝심있게 오컬트 장르 영화를 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사실은 그는 <곡성>과 <랑종>(각본과 제작)의 나홍진과는 다른 결에서 이 장르를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헤아릴 수 없는 위협과 공포를 그린 걸작 <곡성>과 달리 장재현 감독의 영화에서는 일관되게 현실 속의 신비현상들을 이론적,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고 있는 인물들이 그려진다.
이들의 세계 바깥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 기현상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을 겪지만 <검은 사제들>, <사바하>, <파묘> 세 작품에선 일관되게 "악마"를 상대하는 신부, "메시아"를 추적하는 목사, "혼백"을 추적하는 무당과 지관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각 작품에서 주동인물들은 나름의 이론을 구축하고 그들이 접하는 악을 추격하고, 해결한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 오컬트 장르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파묘>가 지금 뜨거운 관중들의 반응을 얻고 있는 메타적인 요인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작품의 소재인 묫바람, 즉 무덤을 잘못 써서 후손들이 헤코지를 당하는 이야기가 대단히 우리에게 친근한 소재라는 점이고 두번째는 무당과 지관, 장의사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추적하는 과정을 합리적으로 설계해서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 초반부, 화림과 성덕의 나레이션은 화면과 어우러지지 않고 설명조라서 몰입을 깨고 불필요하게 느껴지지만 영화를 보고 났을 때는 영화의 특징에 맞는 일관된 연출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 작품에서 무당과 지관은 살아있는 현대인으로 우리와 같은 공간을 살아간다. 여가시간에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거래처와는 돈봉투를 찌르며 편의를 요청한다. 그들의 지식은 신비로운 어떤 무언가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합리이며, 장재현 감독은 영화 속에서 그들이 접하게 되는 "악" 역시도 현실에 살아있는 합리적인 무언가로 그리고자 하는 관점을 분명히 한다. 화림과 성덕의 나레이션은, 직업인이자 전문가로서 영화 속 사건을 다루고 있는 주인공들의 입장을 전하는 장치다.
이 점이 <파묘>의 강렬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작품 세계에서 두드러지는 점이다.
영화는 묫바람을 추적하는 전반부, 그 내막이 드러나는 후반부로 나뉜다. 우선 호러영화로서 날카로운 긴장감이 영화 초반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심리적 공포부터 시각적 공포, 미지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우리의 "경험"에서 느껴지는 공포, 물리적 섬뜩함까지, 영화 속의 호러 연출은 거의 종합선물세트다.
영화 속에서 배치되는 스릴은 크게 세 줄기 정도. 묫바람의 대상이 되는 박씨 일가와 관련된 공포와 "묘" 자체를 둘러싼 공포, 그리고 등장인물들에게 닥치는 직접적인 공포다. 이것이 절묘하게 배치되어 러닝타임 10여분부터 끝날 때까지 거의 오르막 없는 롤러코스터처럼 긴박한 속도감을 선사해, 6개의 장으로 영화가 뚝뚝 끊김에도 불구하고 긴장이 풀릴 틈이 없다. 게다가 오컬트 장르인 덕분에 영화 속 각자의 공포 요인에 대해서 주인공들이 나름의 대처를 해나가는데, 이들이 대적하는 거악의 흉포함 역시 이에 따라 배가해가면서 더욱 긴장을 키운다.
다만 <검은 사제들>이나 <사바하>에서 주인공들이 상대하는 거악의 정체가 나름 분명하게 드러나고,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들을 상대할 방법이 영화 속에서 잘 드러났던 것들과는 달리 <파묘>에서는 무당인 화림도, 지관인 성덕도 상상하지 못할 거악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이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그대로 묘사되고 이 부분에서 관객도 상당히 어리둥절해지는 감정을 공유한다. 오컬트 장르에 맞게, 이상현상을 예측하고, 대처하는 합리적 조치가 일관되게 이루어져 오다가 주인공 모두가 길을 잃고 막 나가떨어지니, 관객으로선 지금 내가 오컬트 장르를 보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아닌 전혀 다른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
그러나 영화 속 "묘"의 속의 그것이, 장재현 감독의 영화 세계 안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살아있는 합리적인 무언가"라는 점을 인식하고 보면 후반부의 장르 전회는 전반부의 미스터리에 이어지는 심층 미스터리로서, 역할을 적절히 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이 점이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소재로 삼은 영화의, 상당히 노골적인 통속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을 오히려 상승시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컬트는 신비주의, 즉 이상현상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근간으로 하기에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물리적 실체를 대상으로 하기보단 비물리적 현상을 대상으로 한다. 현실의 물리적 실체는 과학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폴터가이스트 현상, 엑소시즘, 빙의와 같은 것들이 일반적인 오컬트 영화의 소재다. 그런데 장재현 감독은 과학의 영향력이 더욱 커진 현대에, 신부와 지관 등, 전문가 중심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오컬트 장르를 그리고 있다. 여기에 영화의 주인공들은 날라리 예비사제(검은 사제들 속 아가토), 파문된 목사, MZ 무당 들이니 더욱 현실에 맞닿은 "합리적이고 물리적인" 신비가 그 대상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정통 오컬트 장르에 부합하는 <파묘>의 전반부에서, 한층 더 나아가 그 물리적 실체가 구체화되는 후반부는 그의 영화세계가 향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비와 물리를 연결하는 지점이 "묘" 속 무언가, 즉, 쇠말뚝으로 결정됨으로써 영화의 방향성이 명확해졌을 것이다.
합리적인, 그리고 물리적인, 그러나, 처음 발견하는 무언가라서 대처하기 힘든 무언가. 그 존재를 맞닥트리고 혼비백산한 주인공들 덕분에 지지부진해진 후반부에, 뜬금없이 해결되는 결말부. 글쎄, 나는 후반부에 대한 일부의 박한 평가는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에, 영화의 통속성으로 인해서 거부감이 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결말부에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은 무당인 화림과 지관인 성덕 중, 해결할 단초를 쥔 것이 누군가에 따른 부분이다. 오컬트 장르의 특성에 맞게, 합리적인 해결책은 당연히 존재하며 그것을 주인공들이 찾지 못했던 문제에 불과하다.
영화의 그 통속성 조차도,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그 쇠말뚝을 상징하는 장치라고 하면 전혀 거부감이 없으니 말이다. 무덤 속 쇠말뚝이 살아있었던 것처럼, 우리 안의 그 쇠말뚝 역시 살아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지금도 피를 흘리게 하고 있지 않은가. 씻을 수 없는, 땅의 상처이고 마음의 상처이고 육신의 상처이지 않은가.
묫자리에서 풀려난 그 악령이 박씨 일가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듯 우리 곁의 그 쇠말뚝은 지금도 심심찮게 고개를 쳐들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묫바람이 들었던 집으로, 우리는 시골의 작은 종가인데 큰집의 장손과 둘째집 둘째 아들이 젊은 나이에 횡사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다. 나에게 <파묘> 속 묫바람이 더욱 자연스럽고 친숙한 공포였던 이유다. 그런데, 나는 전반부의 그 묫바람보다, 후반부의 그 쇠말뚝이 지금 더욱 더 생생한 현실로 늘 다가온다. 우리의 허리를 끊고, 역사를 단절한 그 쇠말뚝.
자잘하지 않은 흠결로, 영화의 6장 구성과 1,2부의 구분 사이에서 적지 않은 이야기 줄기가 마구 흘러나간 점이 있다. 각본을 조금만 다듬었어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