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쉿.
나는 일체의 아쉬운 생각을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으며 자랐다. 싫은 소리를 하느니 알아서 삭이는 흔하다면 흔한 유형의 사람이지만 나는 경우가 좀 심했던 모양인지 오죽 딱하면 스무살이 한참 지나서도 누나가, 네가 그렇게 커 온 건 알겠지만 좀 털어놓으며 살라고 권했을 정도다.
그것이 연애 및 결혼 생활 내내 무척이나 날 힘들게 했다. 아내가 그런 나의 기질을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그런 기질이 흔해빠진 것이든, 와이프의 이런 남자친구/남편에 대한 기대 역시 일반적인 선에서 머무르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그렇게 몇번 다투고 헤어지고 화해하길 반복하며, 내가 이 사람이랑 관계를 이어나가려면 차라리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다. 연애와 결혼은 나의 단점을 하나를 없애는데 기여했다.
덕분에 나는 아이 앞에서도 아내에게 언성을 높일 땐 제법 높인다. 원래 감정을 아예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 최대한 갈등을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서 빠르게 터트리는 쪽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다만 거기에는 규칙이 있는데 나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정확히 알리는 것과, 그 감정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거나 전이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첫번째. 감정을 알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감정이 묻어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 두번째. 나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알리고 해결하는 과정을, 곁에서 보는 아이가 납득은 할 수 있게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규칙은 내게 있어서는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외재적 요인이라기보단 내면화된 가치다. 덕분에 아직까지 아내와 아이와의 신뢰라거나 관계는 비교적 무탈하다. 내가 목소리가 커지면 "시끄러워!"라고 아이가 맞서 소리를 지르 점 정도를 빼면 말이다.
감정이 고조되고 흔들릴 때 말은 쉽게 새어나간다. 감정을 다스리기보다 차라리 억누르며 살아온 나에게 이런 규칙을 지키는 일, 말을 삼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육아와, 육아 과정에서 생기는 부부 간의 다툼, 아이와의 갈등은 우리의 인내심을 늘 흔들곤 하기에. 종종 실언은 입밖으로 새어나온다. 지난주에 나는 아이와 놀이터를 가다가 어르신들 쉼터에 옹기종기 모여계신 할머니들과 마주쳤다.
"어머! 쟤 부쩍 컸네! 얘 이리 좀 와봐."
"어머머 많이 컸어 컸어. 와, 참외 좀 먹어."
신이 나서 놀이터로 가던 아이는 할머니들과 마주치고는 그대로 굳어서 고개를 돌렸다. 낯을 가리는 아이를 이끌고서 할머니들과 나란히 앉아 참외도 얻어먹고, 잠깐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칼날처럼 낮말같은 밤말, 혹은 밤말같은 낮말이 달려들었다.
"여 위에도 애들 있잖아 둘."
"아. 네 9층."
"거기 둘째가 그렇게 보통이 아니래-."
"아하-. 아뇨 첫째가 워낙 순해서-."
그 9층댁과, 우리는 퍽 친하다. 그래서 내막을 잘 안다. 그 집 엄마에게 있어서 첫째가 세상 둘도 없는 순둥이고 둘째는 첫째와 딴판으로 왈가닥인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둘째 아이가 보통이 아닌 정도냐 하면 그런 정도도 아니고, 첫째라고 해서 또 천사표 언니라고도 할 수 없다. 다만 첫째와 둘째가 성격 차이가 워낙 크니 상대적으로 둘째가 더 유난처럼 느껴질 것이고, 그런 말이 위층 할머니와 마주친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파트 현관에서, 주차장에서든 때때로 새어나왔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다른집 아이에 대한 흉 아닌 흉을 보시는 할머니들도 부족함이 없다 아니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아이에 대한 감정이 툭 터져나오고야 만 것이 어쩌다, 한 다리 건너 나에게 걸려온 것이 나는 뜻밖이고 놀라웠다. 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내에게 감정을 아무렇게나 터트리곤 했으며, 내 아이에게 실언을 하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도 그렇다.
그리고 아내 역시 그런 실언이 새어나오고야 말았다. 이제는 적지 않게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있는 아이에게 말이다. 원래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집안인 부계 유전으로 아이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태어났다. 그에 비해 아내는 가부키 수준으로 흰둥이인 탓에, 아이의 까만 피부가 제법 스트레스고 고민이다. 딸아이고, 살결만 하얗다면 더욱 예쁠 텐데 이건 뭐 흑진주 같은 딸을 제 배로 낳았으니 고민이 말할 수 없다. 흰 옷을 입혀놓고 보면 도드라진 갈색 피부가 더욱 엄마와는 딴판이되니 말이다.
아내에겐 이게 제법 큰 고민이기 때문에 우리끼리 자주 대화를 하곤 하는데, 주말 사이에, 그 말이 또 아이 앞에서 새어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가 엄마에게 "나 까매?"라고 물었다. 아내는 대경실색해 실언을 했음을 뉘우치고 다시는 아이 앞에서 그러지 말아야겠다며 일기에 적었다.
나는 윗집 둘째딸 아이 이야기에, 그리고 까맣다는 말에 대한 아이의 응답에. 그리고, 나 스스로 지금까지 해 왔을 무수한 많은 말들에, 남말도 밤말도 아이는 듣는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새삼 느꼈다. 그리고 아이와의 삶이란 내가 지난날 나름 잘 지키고 있었다는 원칙 역시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 앞에서 말조심을 한다면, 아이가 없는 곳에선 또 어떨 것인가. 혼자서 나온 한숨을, 벽은 듣지 말란 법이 있을까. 아이 앞에서 털어놓지 못하고 터져나온 감정이, 이렇게 바람에 실려실려 내게 돌아올 줄이야.
아이는 마침 어지간한 표현은 다 할 줄 알고, 말도 잘 알아듣는 수다쟁이가 되어 정말로 말 조심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나는, 사실을 말하자면 여전히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오히려 크다. 실언을 하든 말든 그것은 아이와 함께 있어야 닥칠 일일 텐데 말이다. 아마도 세상 모든 엄마 아빠의 마음이 매 한가지일 것이다. 아이에게 주는 상처 그 이상으로,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 그리고 아이와 보내는 시간만큼, 내 단점을 고칠 기회가 늘어날 테고 말이다. 물론, 그 문제지를 받아들고서 답을 성실히 써낼 의지와 용기를 우리 스스로 가지는 것이 우선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