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과 장례식
장마철 한가운데 태어난 나는 매년 생일을 비와 함께 보낸다. 아기 때도 그랬을까. 그래서 비를 좋아할까. 비를 지극히 싫어하는 아내는 남편의 생일마다 비가 오는 것이 불만이지만, 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생일마다 말을 걸어주듯 비를 퍼붓는 것이 즐겁다. 퍼붓는 비 속에서는 생일 케이크마저 팔에 튀긴 빗물이 타고 흘러 적시고만다 할지라도 말이다.
생일 날 내리는 비가 조금도 서럽지 않듯, 생일날 맞이한 비보에도 나는 조금도 서럽지 않았다. 단지 조금, 당황스러웠을 뿐.
"어? 목발은 왜 안 짚고 오셨어요?"
"아 오늘 중요한 출장이라...통증은 좀 덜해서요."
"그 발 절대 디디시면 안돼요. 골절이잖아요. 큰일 납니다."
MRI를 찍고서 진료실에 들어가자, 정형외과 의사는 내가 목발도 없이 들어온 것을 보고 놀란 눈부터 한다. 딸네미와 워터슬라이드를 타다가, 뚝 하는 파열음과 함께 발목이 돌아가버린지 18일째. 관절 부위의 통증은 아직도 어마어마하고 발목은 대창순대처럼 불어있지만, 오늘은 중학교에 홍보를 도는 날이었다. 그래서 정장까지 차려입은 마당에, 목발을 하며 홍보를 돌진 못할 것 같아 목발도 없이 힘겹게 출장을 마치고 병원에 오게 된 것이었다.
"인대는 수술하셔야돼요. 끊어졌어요."
"네? 끊어졌어요?"
"수술은 일주일 입원하셔야 되고요, 반깁스 2주, 통깁스 한달."
"일주일이요???"
젠장. CT에 초음파까지 찍어놓고는, 초진을 했던 병원에서는 분명 인대가 끊어지지 않았다 말했었다. 재진 때 제대로 된 진료도 해주지 않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다른 병원을 다시 찾았는데 아니나 달라, 진작에 인대는 끊어져있었다. 즉 나는, 오진으로 인해 중대한 18일의 시간을 허송세월을 한 것이고, 이제서야 인대 파열과 수술 요망이라는 고지를 받아든 것이다.
짧지 않았던 진료와 상담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며 나는 머릿속으로 수십가지 대책을 세워야했다. 일주일을 입원하면 나머지 학교 홍보 일정을 내가 수행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에, 학교 홍보는 생소한 업무다. 부장님도 부담을 느끼실 거고, 그럼에도 내 몸이 우선이기에 넘겨야 한다. 성적처리는 간신히 될듯하다. 다른 출장은...외출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등등등.
무엇보다도 내가 일주일이나 입원을 하면 아내는 혼자서 딸을 돌봐야 하는데 이 경우엔 장모님이 일주일은 계셔야 하겠지. 그래도, 아빠와 남편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아침을 차려줄 사람도 출근을 시켜줄 사람도 없이 다시 또 독박육아를 해야 하니, 아내의 고달픔이 입원 일주일과 그리고 수술 이후 몇달간이나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로선 내 대학원 수업들로 인해 3월부터 제법 빡세게 독박육아를 해 왔는데, 그리고 맞는 방학기간 내내 육아와 가사 부담이 이어지는 상황.
- 안돼 나트랑ㅠㅠ
- 가지 말자고 한 적 없어. 가. 목발 짚고 느리게 느리게 가야지.
그리고, 그렇게 고생을 해가며 맞는 여름 휴가의 해외여행 일정에도, 당연히 나 아닌 아내 쪽에서 먹구름이 잔뜩 낀 셈이다. 내가 풀장과 바다에 들어갈 순 없으니 아내가 혼자서 애와 놀아줘야지 캐리어도 자기가 끌어야지 애가 졸려하면 자기가 업어야지-. 물론 닥치면, 내가 가서 어떻게든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초인적인 수준의 남편 역할을 수행해 온 내가 목발을 짚을 두 손과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역할밖에 못한다는 사실은, 아내에겐 매우 매우 심대한 문제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난 어쨌든...내 할 몫은 다 했다고 생각해. 부러진 발목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밥 차리고 설거지하고 빨래도 내가 다 해서 널었어."
"그건 맞는데-...후...일단 내일 한군데만 더 가보고 결정해."
"아니 결론은 간단해. 인대가 끊어졌다. 수술 할거냐 말거냐. 이거야. 후유증 없으려면 수술 하는 게 낫고."
"응 할 거면 최대한 빨리 되는 날로 잡고."
나는, 부상 이후 지금까지 내 할 몫을 다 했다. 이것이 내 나름의 슬기로운 결혼생활의 한 방편이다. 발목에 골절이 생겨 딛지 말라 한들, 인대가 파열되어 왼발로 거동이 안된다 한들,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 온 나의 역할을 아내에게 미루지 않아왔다. 내 한도 내에서, 아니 사실은, 부러진 발목으로 짐도 나르고 다 했으니까 사실은 한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일이지만- 아내가 인식하고 있는 평소의 남편으로서의 나의 역할에 부족함은 없도록 했다. 해야 할 일과 나의 부상이 충돌할 때, 나는 간단히 목발을 포기했고 이틀 전엔 목발을 짚고 아이와 나들이를 나왔다가 애가 안아달라 하여, 뭐 어떻게 해. 애를 안고 목발을 들고 절뚝이며 집으로까지 왔다.
다행한 것은, 어쨌든 부상 초기에 충분히 쉴 때 쉬었고 아내가 할 일은 또 알아서 했기에, 뼈는 걱정없이 잘 붙어간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차피 수술 아니면 답이 없는 인대보다야 뼈가 더 중요한 문제였기에 나는 그 점에 안도했다. 여러분! 부러진 다리뼈로 애랑 몇시간 더 놀아줘도 뼈 다 붙습니다! 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네. 죄송합니다."
"아 어떡하지-."
"...그냥 너 마음 편하려면, 지금 이대로 광주로 가. 고민 하기 전에 밥 빨리 먹고 그냥 가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병원 두 군데의 진료를 마치고 뒤늦은 생일 파티를 하던 저녁에, 두번째, 나의 슬기로운 결혼생활의 방편은 현시되었다. 아내의 절친한 직장+육아 파트너가, 시부상을 당했다.
"몇시간 찍히는데?"
"지금 부리나케 출발하면 자정."
그것도 광주. 경기도 광주 말고 전라도 광주.
"집 갔다가 가면 안돼? 애 이불이랑 잠옷이랑 기저귀도-."
"집 들렀다 가면 거기 한시 넘어 도착해. 결단해."
친구의 시부상에 대해 나와 아내는 오전에 이미 한 차례 통화로, 문상을 가기엔 너무 멀기 때문에 그냥 부의금만 계좌로 넣는 것으로 정리를 했었다. 그러나 직장 동료나 친구들의 연락을 몇차례 받고, 또 워낙 가까운 사이이기에 아내는 문상을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 시간은 이미 저녁 시간을 한참 넘긴 저녁 여덟시 반 무렵. 내일은 내가 대학원 스터디가 있어서 아내가 광주에 다녀올 수가 없다. 모레는 발인이다. 가려면 오늘 뿐이다. 밤 9시를 넘어서 KTX로 광주를 왕복할 수도 없고 내일 우리도 출근, 아이도 어린이집 등원이다. 가려면 지금 뿐이다. 이대로 셋이서 모두 함께 광주로 가서, 아내가 문상을 하는 사이에 나는 차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올라오면, 새벽 서너시면 집에 올 수 있다.
"아...오빠는 괜찮아?"
"난 뼈 잘 붙어있다고 해서 괜찮아. 이미 이 다리로 분리수거도 하고 할 거 다 했거든?"
나는 수술을 내심, 거의 결단한 상태였다. 입원 일주일과 재활까지 몇개월은 아내의 부담으로 남는다. 그런만큼 지금 이 순간, 광주를 왕복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망설이는 아내에게 나는 단호한 결단을 촉구했다. 문상을 못 가서 신경이 쓰이는 관계면, 가는 게 맞다. 그리고 갈 거라면 지금, 내가 태우고 다녀오는 게 낫다.
"...그럼 지금 가자."
"그래. 빨리 먹어."
"다 먹었어 화장실 다녀와 오빠."
"아냐 그 시간도 아까워. 일단 출발."
그렇게 아내 역시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우리는 식사를 하고 있던 남양주에서 광주까지의, 왕복 여덟시간의, 문상 일정을 마쳤다. 나는 올라오는 길에서 차에서 세번 정도 잤다. 마지막 세번째는 20분여 자고 있었을까, 아내가 깨워주었다. 문상은 함께 들어갔다. 왜냐면 아내의 친구의 남편이, 몇번 같이 육아 모임으로 마주치면서 나를 "형님"으로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형님이라 불러준 존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나라고 아내만 문상을 올려보내고 차에 있을 순 없었다. 마침, 지금 20시간째, 정장을 입고 있지 않은가. 맞춤맞게시리.
"오빠 얼른 먼저 누워-."
"...그 말 좀 야한데?"
"뭐래애 얼른 낫기나 해."
이미 훤히 먹구름 너머로 동이 튼 여섯시에 나는 겨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차에서 고달프게 여섯시간 남짓 잠을 잔 따님께서는, 내가 옆에 눕는 기색에 살풋 잠이 깨시더니, 자기가 등에 깔고 누워있던 이불을 앗아가, 아빠가 돌돌 말아 다리에 끼고 눕는 걸 보자, 자기 베개를 달라며 칭얼댄다. 나는 겨우 눕혔던 몸을 일으켜 아이에게 베개를 베어주었다.
그렇게, 22시간의 나의 생일이 마무리되었다. 나의 직장과 출장지, 두군데의 병원, 저녁식사와 광주 문상으로 이어진 길고 긴 하루였다. 이 하루에는 지나온 우리의 결혼생활과 부상 전후의 우리의 부부의 역할에 대한 성찰거리들이 고루 담겼다. 나는 스스로 넘칠만큼의 내 할 몫을 했고, 떳떳했다. 아내는 그런 내 보호에 의해 안온한 삶의 감각을 느끼며, 내가 바라는 일부의 역할 분담에 선선히 동의해주었다.
그런 결혼생활은 당연히도 나와 아내 둘 다의 생각과 실천을 크게 바꾸어왔다. 다만,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던 게다. 계기를 만나, 서로의 역할을 뒤바꾸거나 나누어야 할 합당한 이유 앞에서 우리는 보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에 대한 호혜를 베풀게 되었다. 그런 하루의 첫머리에, 아침에 엄마와 아버지는 생일 축하의 문자에 낯간지럽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담아주셨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새벽 여섯시에 나는 부러진 발목으로 가볍게 섹드립을 날려보았지만 아내는 웃으며 욕실의 문을 닫아버렸다.
삶은, 앞으로 어떻게 또 이어질까. 나의 탄생으로 시작되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위로로 마무리된 하루, 그 사이에 우리.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딸. 흐음...섹드립...좀 받아주지. 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침대에 눕자마자 까무룩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