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와 언론의 역사
김영삼 정부 출범 첫해인 1993년 8월 한국언론연구원(현 한국언론재단)은 전국의 1,200명을 대상으로 "언론수용자 의식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언론이 우리 사회 민주화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25%에 지나지 않았고, 절대 다수인 75%가 우리 언론이 ‘민주화 물결에 편승했다’고 답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같은 해 언론 연구원이 언론인 717명을 대상으로 한 ‘기자의식조사’에서도 나타났다. 즉 조사대상 기자 가운데 15%만 우리 언론이 민주화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답했고, 나머지 85%는 민주화에편승했다고 답한것이다 - <한국 민주화의 언론의 역할> 2007, 양승목
1. 미디어의 시대
미디어의 시대다.
미디어의 시대라는 개념 정의는 "미디어가 사회 변화의 추동력이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풀어 설명할 수 있다. 항해술의 발전은 원해로 인간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제국주의를 개창했다. 증기기관의 발전은 "산업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로켓기술의 발전이 우주시대를 열었다면, 인터넷과 반도체 등 소재 기술의 혁신으로 미디어가 소형화되고 1인 1미디어 시대가 된 지금은 바야흐로 미디어의 시대다. 미국 대통령 후보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언론들의 보도를 Fake news로 받아쳐버리고 트위터로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사회. Mass Media의 mediating 없이 personal media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는 사회. 거대 정치세력의 폭거에 맞선 시민들의 연대를 스스로 보도할 수 있는 시대.
그러나 우리는 여러차례 언론과 언론활동, 미디어와 언론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의 시대와 그로 인해 발생한 언론의 종언에 접하여, 먼저 각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론Mass Media이란, 매체활동을 전문적으로 수행하여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집단이다. 현대사회의 언론은 대체로 사기업이다. 이들은 언제나 레드오션인 미디어시장에서 생존을 위해 신뢰도와 신속성, 공정성을 중시하여 조직되어 있다. 왜 언론이란 것이 필요할까?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돕기 위해서다. 사회계약론에 의하여 국가가 탄생한 것처럼,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언론이 탄생했다.
커뮤니케이션엔 6가지 종류가 있다. ㅁ개인 간 커뮤니케이션 ㅁ면대 면 커뮤니케이션 ㅁ소그룹 커뮤니케이션 ㅁ대그룹 커뮤니케이션 ㅁ매스커뮤니케이션 ㅁ국제커뮤니케이션. 일반적으로 대그룹 커뮤니케이션까지는 언론의 힘을 빌지 않고 공동체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대학을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임이의, 무작위의 대중" 간에 발생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과 국제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 당사자들보다는 집단의 성격과 의사에 크게 좌우된다. 그로 인해 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조직이 발생한 것이다. 과거에는 모두 국가의 사무로 처리되어 왔고, 유럽에서 시민혁명이 발생한 뒤 시민의 소유로 넘어왔다.
과거에 언론Mass Media은 전문지식과 전문적 기술, 전문화된 공정을 가지고 언론활동Mass communication을 대행했다(국가와 시민의 위임사무를 대행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대행"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독자들께서 유념하기 바란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시민들이 언론활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언론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언론활동이 오로지 언론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던 전통이 무너지고 언론으로부터 언론활동이 분리되어, 시민들의 위임사무를 대행하지 못함으로써 막대한 사회적 자본이 손실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언론활동은 사회공동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의식주만으로 문화가 탄생하지 못했듯이, 인간의 역사는 자신이 속한 집단 내부의 커뮤니케이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대인들이 쪽배로 태평양을 건너서 새로운 대륙을 찾아낸 것도, 사하라 사막의 살인적 환경을 기어코 극복하게 한 것도 "우리 집단 외부의 현상에 대한 도전의식"이었다. 인간 사회는 집단 외부로 끊임없이 판도를 넓혀가며 발전해 왔다.
고대에는 언론활동은 국가의 사무였다. 조정이 붙이면 방(放:풀어놓다)였고 개인이 붙이면 벽서(壁書)였다. 감히 개인이 벽에다가 글을 붙여? 그 자체로 범죄다. Mass Communication은 엄격한 국가의 통제 아래 있었다. 시민혁명과 그 이전의 활자의 발명이 언론활동을 시민의 것으로 만들었다. 혁명은 국가의 권력을 시민에게 부여했고, 활자와 그로 인한 도서의 보급은 더 많은 사람이 언론활동을 접할 수 있게 했다. 그중에 백미는 최초로 "언론활동의 자유"를 발한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라는 문서인데 여기서 밀턴은 표현의 자유가 어떤 자유나 인권보다 중요한 천부적 인권임을 강조하면서 이것을 억제하는 종교야말로 악이며 거짓(비 진리)이라고 강조했다.
언론활동이 오로지 기술과 전문성을 갖춘 언론조직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20세기에는 언론활동의 자유를 흔히 언론의 자유로 혼동하였고 지금까지도 이러한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시민의 언론의 자유보다 언론의 언론의 자유가 중시되는 시대. 언론에 대한 비판이 "문빠의 준동"으로 공격받는 세태는 고작 국가와 시민이 위임한 사무를 대행하는 사기업인 언론이 얼마나 잘못된 언론관을 갖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말해준다.
세번째로 미디어. 언론학의 고전 중 하나인 "미디어의 이해"에서 마셜 맥루언은 언어, 인쇄기, 라디오, TV 뿐만 아니라 문자, 성문, 의복, 주택, 돈 등 우리가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활용하는 모든 사물을 미디어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실제로, 우리는 모든 의사소통에 다양한 미디어를 사용한다. "엄마 밥"이라는 말을 성문으로 표현할 수 있고, 고갯짓으로 표현할 수 있고,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탕탕 두드리는 방법으로써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미디어가 지금 기술의 발전으로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공간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초월하고, 포괄하고 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스마트폰을 통해서 막대한 인류의 지식에 다가설 수 있다. 원하면 50년대든, 60년대든 과거의 영화와 영상들도 유튜브에서 평생 봐도 다 못볼 양을 건질 수 있다. 남극과 북극에서 스트리밍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마존에서 혼자 살아남는 과정을 중개하는 이도 있다. 쌀알보다 작은 초소형 반도체가 전 지구의 인류들을 매개하는 기술혁신의 성과로 우리는 말 그대로 초월적 미디어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상술했던 것처럼 언론으로부터 언론활동을 분리시켜 시민에게 나눠주었다. 이제는 누구나 언론인이 될 수 있고 언론활동을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누구나 언론인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이 현재 시제라는 점이다. 무엇이든 타인과 나누고 싶은 것을 개인 SNS 계정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그것이 사진이든 영상이든 문자이든 업로드만 하면 훌륭하게 언론활동이 완성된다. 필요한 조건은 단 하나, 무작위의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전체공개"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부여된 미디어 활동의 폭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이 혁명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미디어 경험을 통해 자라난 세대의 사회인식도 과거와는 크게 다르다. 중국 당국의 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홍콩 민중의 저항운동이 몇개월 동안 유지될 수 있는 것, 한국에서 세계 역사상 드문 시민혁명이 발생했던 것도 바로 이 미디어의 발전, 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했기에 가능했다.
2. 그리고 언론의 종언
언론은 무너지고 있다.
상당히 언론 스스로 문제를 초래한 면이 크다. 앙시앙레짐은 그 체제 내의 모순으로 붕괴하기 시작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고, 시대적으로 도태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언론은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민주화를 위해 기여한 적이 없다. 소수의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언론활동이 있었을 뿐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사기업인 언론이 시민의 편이었던 적도, 중립적으로 오직 진실만을 보도한 적도 없다. 노무현 시대의 MBC와 KBS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지만 그 당시 그들이 철저하게 진실만을 보도했다면 이명박이 당선되고 박근혜가 한나라당의 총수가 될 수 있었을까?
서론에서 양승목 교수가 설문을 인용해 지적한 것처럼, 민주화 직후 여론조사에서 시민과 기자 모두 언론의 민주화 기여를 대단히 낮게 평가했다. 가장 크고 뜨거웠던 민주화운동을 관통한 시점에서 국민의 언론에 대한 관점이 저정도로 박한 것이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민주화 30년을 맞이한 지금까지 언론은 어떤 사회적 기여를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평가는 더더욱 나쁘게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노무현의 비참한 죽음, 이명박과 박근혜의 연속 당선, 세월호 참사 보도와 그 뒤에 계속된 언론의 자성 없는 언론활동은 지속적으로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아왔다.
언론 내부에 이토록 모순이 적체되어 있는데 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하여 모든 시민들이 기자가 된 마당에 그들이 무너지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JTBC의 타블렛PC 보도는 현실 정치권력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이끌었을 뿐, 실제로 촛불혁명은 박근혜 정권의 폭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에게 예상 밖의 승리를 선사했을 때 시작된 것이었다. 타블렛PC 보도 이후의 JTBC는 어땠는가? 수시로 정치개입을 자행하며 민의를 왜곡하고 조국 전쟁에까지 뛰어들어 함께 칼을 휘둘렀다. 그나마 "업적"이 있다고 평가될 수 있는 JTBC가 이럴진데 다른 모든 언론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경향과 한겨레, 시사IN조차 내부의 모순이 폭발하면서 여러 사건 사고가 터지고 이는 고스란히 언론의 신뢰도에 치명타를 가했다. 그외의 언론은 언급할 것도 없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여 지금 언론의 위기는, 미디어 기술 혁신으로 모든 시민이 언론 없이 언론활동을 할 수 있게 된 외부 현실에, 그동안 국가와 시민의 위임사무를 대행했던 언론의 역할이 감소하고, 그간 축적된 내부 모순까지 폭발하면서 발생하고 있는 총체적인 격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10년도 넘게 시민 주도의 언론 기능을 해온 팟캐스트를 평가 절하하며 매스 미디어만이 언론이라고 강변하는 것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맞서서 언론보다 훨씬 진실에 근접한 언론활동을 해 온 "나꼼수"의 활동을 부정하는 것도 그저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기행에 불과할 뿐이다. 언론사 편집장이 비판적 시민을 향해 "문빠"라고 지칭하고 싸움을 건 것은 언론의 종언을 알리는 조종이었다.
놀라운 것은 언론의 자기성찰이 얼마나 부재한가 하는 점인데, 언론은 기술 발전으로 인해 직장을 잃고 만성적인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인내를 강요하면서도, 스스로가 미디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직장을 잃고 임금저하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선 전혀 적응을 하고 있지 못한듯하다. 특별히 언론의 직무영역이 기술발전으로 인해 노동시장의 변화를 겪지 않을 근거라도 있는가?
3. 미디어와 언론의 미래
언론은 지속적으로 축소될 것이다. 언론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지금 언론은 너무 비대해져 있다. 언론 활동 이외에 언론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존재하는 부서들이 너무 많고, 미디어산업에 자본을 투여하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홍보팀, 법무팀, 회계팀, 디자인 팀 등 주렁주렁 비효율을 달고 다니는 언론기업에 투자하기보다는 개인미디어의 언론활동에 투자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단지 문제는 그러한 개인미디어 언론인들이 자본의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하기보다는, 자신 개인의 신뢰도와 영향력을 가장 큰 우선순위에 둔다는 점이다.
그러나 미디어 시대에 언론의 종언을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다. 지금 시민들이 영위하는 언론활동의 자유, 미디어경험은 전적으로 거대기업의 고객 관리 시스템에 불과하다. 식민지에 진출한 유럽인들이 재화를 팔기 위해 먼저 선교를 하고 "평등함"을 전파했듯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미디어 시대는 그 또한 자본가들이 열심히 일궈놓은 밭에 우리가 적당한 돈을 내고 들어가 열매를 맛보는 것에 불과하다. 국가권력으로부터는 자유를 얻었지만 자본과 기술의 지배에 그대로 순응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숙제다.
앞으로도 미디어 기술은 더 많은 사람을 고객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미디어 상품을 팔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확장해 나갈 것이다. 전 지구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시민의 지속적인 관심과 주의 없이는 언제든 진실은 장막 뒤에 가려질 수 있다. 언론인의 전문성은 여전히 소중한 가치다. 과거 동아투위의 참언론인들이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해직을 견뎌냈던 것처럼 지금도 각 언론사에서 분투하고 있거나, 튕겨져 나온 소수의 양심적 언론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수익을 키워내는 시민의 노력이 필요하다.
마치며.
손석희의 시대가 끝났다. 김어준은 여전하고 유시민은 만발하고 있으며, 새로이 유튜브가 언론활동의 메인스테이지로 부상하는 이 시점에 말이다. 가장 빛나는 언론인이었던 그가 오명을 쓰고 퇴장하는 장면이나, 그의 퇴장 무대에 웬 파렴치한 지식외판원이 난장판을 만든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인데, 그렇다고 아쉽거나 안타깝지는 않다. 손석희 자신은 스스로 언론인, 언론활동, 시민 미디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사고하고 지금까지의 JTBC 보도부문 사장으로서 항상 시대적 사명에 충실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타가 아닌 언론인, 사람이 아닌 언론. 담론이 아닌 진실을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소망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자유롭길 희망한다. 지난 10년간의 사회 총체적 퇴행에는 모든 언론이 공범이다. 손석희라고 예외였을까. 주진우와 김어준이 살해위협을 당할 때 그는 어디 있었는가.
지나간 사람은 평가의 영역으로 남기고, 이제 다시, 미디어의 시대. 언론의 종언을 바라보며 우리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탱할 수 있는 언론-미디어-언론활동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