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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30. 2020

기레기가 만드는 가짜뉴스, 시민이 나르는 진짜뉴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기 발명은 책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소수의 귀족과 종교인 계층이 독점하던 지식을 많은 민중들이 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값비싼 책을 살 수도, 문자교육을 받지 못하니 그 책을 읽을 수도 없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길인 신의 말씀조차 자신들이 스스로 독해하지 못하고 신부와 사제, 주교들의 목소리를 빌어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책이 흔해지고, 누구나 집에 성경 한권쯤 둘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교회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의 해체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 아는대로 이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져 중세가 끝나고 인간 중심의 새로운 시대질서, 근대로 이어진다. 당연히 인쇄술 하나 뿐만이 근대를 열어젖힌 것은 아니지만, 인쇄술과 도서출판의 폭증은 세상을 충분히 바꿨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2020년의 미디어환경은 또다시 크게 변화하고 있다. 역시나, 코로나19 하나 때문에 뉴스지형이 급변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충분한 고유성 그리고 연구주제로서 타당한 수준의 유별함이 발견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전염병으로 발전되고 있는 코로나19이기 때문에, 사태가 진정되면 그간 축적된 데이터로 다양한 연구가 행해질 터이고 한국의 데이터는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거이지만, 특히나, 지난주 개최된 G20 회상회의까지의 경과를 통해서 한국 언론이 보인 특이한 보도양태와 그에 맞선 시민다중의 뉴스편집 형식은 무척이나 재미난 관심거리다.


언론이  짓거리

 이번 사태를 맞아 언론이 한 짓거리는 추태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전 국민이 2월 초부터 일찌감치 사회적 거리두기 및 마스크 상시착용, 위생관리를 하며 예방조치에 힘을 모으고 있는 사이에도 이 가장 사악하고 퇴폐한 집단은 코로나19를 이용해 온갖 황색보도를 쏟아냈다. 우한에서 긴급하게 국내로 후송되어 격리된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고, 정부의 투명한 정보공개와 신속한 조치는 외면하고 마스크 대란과 중국 입국 금지조치를 반복하는 공포마케팅에 앞장섰다. 마스크대란은 5부재와 중간유통단계의 비리를 잡는 등 정부의 여러 조치가 잇따르자 이내 진정되었다. 정부조치가 이행되고 충분한 물량이 공급되는데 필요한 물리적 시간이 소요되었을 뿐이며, 그 사이에 과잉된 마스크 수요는 언론의 정확한 정보전달로 충분히 진정될 수 있었는데도 언론사들은 그런 노력은 도외시했다. 오로지 정부를 흠집내고 트집을 잡을 뿐이었다.


 중국의 부품공장 노동자에게 신속하게 마스크가 공급되지 않으면 국내 업체의 제품 생산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정부가 신속하게 조치한 것인데 "국내 마스크 중국 유출"로 언론은 둔갑시켰다. 정부의 코로나 확진자 관련 각종 정보공개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온갖 엉터리 보도를 쏟아냈다. 국가적 사태였고 지금은 전지구적 사태로 비화된 코로나 판데믹에서 언론은 전혀 "진실보도"라는 간단한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매일 질본이 브리핑을 통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론은 소설을 썼다.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고려해 지면에 담았다.


 


시민의 뉴스편집 양태의 진화

 시민다중의 미디어 활용은 2000년대 이후 꾸준히 변화해왔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트위터로 시작된 SNS의 확산이었다. 이명박 정권 시기 국정원과 공모해 키운, 오늘날 "일베"로 대표되는 인터넷 여론조작세력은 2000년대 후반까지 비교적 잘 유지되어 오던 온라인 커뮤니티를 여럿 붕괴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켰고,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촛불집회를 시작하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통관 무력화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모았던 인터넷 공간에 대한 보수세력의 역습은 가공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일베 등 자신들의 공간 속에서 충분한 담론과 논리, 시각자료를 개발했고, 타 커뮤니티 사이트로 무더기로 몰려들어가 여론공간을 잠식했다. 여러 사이트들이 무력화되었다. 시민들은 SNS로 흩어졌다.


 초창기에 SNS는 커뮤니티 사이트의 대안으로서 여론순환의 매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보이진 않았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개인 차원의 네트워킹으로 개인 차원의 주제를 다루던 양상이 주되게 관측되었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교체기까지 시민들이 정치권력과 밀착되어 있지도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에 SNS에서 담론이형성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PC 기반 웹디자인에서 모바일 웹디자인으로 변화되면서 생기는 혼란에 겨우 대응하던 시기였다. 대표적으로 카드뉴스가 2010년대 중반에 잠깐 나타났다가 스트리밍 서비스에 밀려 다시 사라졌는데, 이런 시대적인 한계나 개인미디어의 특성으로 인하여 SNS는 여론형성의 매개가 되기엔 너무나 한계가 많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6년 총선, 강남역 살인사건, 그리고 탄핵을 거치면서 시민의 SNS 활용엔 여러 변화가 생겼다. 시민들의 일대 각성과 함께 대대적인 SNS 활용양태의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언론의 무능하고 무력한 모습을 드러냈고 300여명의 희생자와 수천명의 유족들의 감춰진 목소리는 온오프라인의 온갖 창구를 통해 쏟아져나왔다. SNS 속에 추도의 물결이, 비판의 담론이 형성되면서 사용자 주도의 뉴스편집의 가능성이 도출되었다.


 마침내 시민들은 나꼼수도 아니고, 조중동도 아닌, 스스로 조금 노력하면 충분히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뉴스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정치담론에 참여하는 저명한 인사들도 다수 SNS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변호사, 교수가 수천수만명의 팔로워를 이끌고 보다 정제된 뉴스를 제공하며 평론을 한다. 언론의 잘못된 보도를 비판하고, 정치집단의 그릇된 논리를 반박한다. 댓글을 통해서 교차검증이 이루어지고 필요한 경우에 구글링을 해서 외신을 가져오면 팔로워들 중 누가 즉각 번역을 해서 제공한다. 시민들이 스스로 뉴스를 "편집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뉴스를 편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미디어의 핵심역할이고 또한 권력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는 전적으로 언론이 정한다. 아니, 정해왔다. 지면의 배치, 사진 포함의 유무, 헤드라인의 활용, TV뉴스의 경우, 순서와 앵커의 평론 등으로 미디어는 어떤 뉴스가 중요하고 또 중요하지 않은지를 가치부여해왔고 그것은 뉴스의 수용자들에게 하나의 독립적인 메세지를 형성한다. 무엇을 말하고 말하지 않을지. 그리고 어떤 것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는 언론이 정하고, 수용자는 그에 개입할 수 없었다. 올드미디어의 시대에서는.


 반면 SNS에서 개인들이 자신이 신뢰할 뉴스원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들을 팔로우함으로써 자신의 타임라인과 뉴스피드를 편집할 수 있게 됨으로써 비록 편향될 순 있어도, 언론이 전유하던 뉴스의 편집권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어떤 뉴스가 중요한지, 어떤 뉴스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할지를 시민들이 정한다. 언론이 아니라 말이다. 그 대표적인 지표가 바로 Buzz(소음이라고 번역해봅시다.)량인데, 이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을 예언했던, 얼마나 많은 미디어 참여자들에 의해서 언급되었는가를 통해서 뉴스의 가치를 평가하는 지표다.


 이제, 시민 수용자들은 스스로 뉴스를 편집해 자신들이 보고싶은 뉴스에 집중하고, 굳이 포털사이트나 언론사를 직접 찾아가지 않더라도 자기들의 가치관에 맞는 뉴스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SNS 사용방식의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SNS 팔로우 시스템은 거대한 확증편향의 구렁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신뢰하는 뉴스원들과, 그 뉴스원을 둘러싼 "팬덤"이 왜곡된 메세지를 확산하기 시작할 땐 이미 확증편향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이 한 없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황우석 사태, 일베, 박사모, 친문 팬덤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이런 집단은 존재한다. 그러나 보수언론의 입장에선 안타깝게도, 이런 확증편향 집단은 빠르게 진단되고 배제된다. 이유는? 그 뉴스원들이 각자 개인 개인이다보니, 잘못된 뉴스 제공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가치가 하락할 리스크에 대단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를 퍼트린다고 판정된 사람은 그 즉시 평가의 대상, 뉴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시민의 뉴스편집주권, 그리고 코로나19

 시민들이 스스로 뉴스를 편집할 권력을 갖게 되었다는 미디어환경의 변화는 코로나19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어떤 뉴스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수용자들이 판단을 하게 되었으니, 언론의 가짜보도는 가차없이 "편집된다." 그리고 수용자들이 스스로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뉴스들을 발굴해 빠르게 확산시킨다. 국내 사안을 중심으로 뉴스가 소비될 때는 이런 특이성이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코로나19가 워낙에 글로벌 이슈가 되다보니 한국 정부의 코로나 대응 정책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외신을 타기 시작했고, 그것이 올드미디어 언론들의 왜곡보도와 비교되면서 아주 광범위하게 외신들이 SNS와 커뮤니티를 통해 국내 뉴스 수용자들에게 전파되는 것이다.

 언론들이 해 온 "제목 장사"가 이번에 톡톡히 효과를 발휘했다. 인터넷 중심으로 뉴스 소비가 변화하면서 언론들은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과도하리만치 기사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기 시작했는데, 코로나19에 대하여서도 시민들이 굳이 뉴스 전문을 다 읽을 필요가 없었다. 제목, 혹은 헤드라인만 봐도 충분하다. 어차피 기사의 디테일은 우리가 매일 체험하고 있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니까. 위와 같이 헤드라인만 캡쳐하더라도 충분하다. 그리고 제목만 읽더라도 충분하다. 수십건의 외신이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을 칭찬하고, 그들을 모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진실에 근접하는 첫번째 단계는 "많은 데이터"다. 많은 외신들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훨씬 사실에 근접한 가치평가다. 가짜 뉴스까지 만들어가며 정부를 흠집내는 국내의 올드미디어들 따위보다, 모든 언론들이 일치되게 평가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이 훨씬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런 환경을 지금 일구어놓았다.


 지식은 곧 권력이다.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미디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로 누구나 집에 책을 둘 수 있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리고 세종대왕께서 신료들과 논쟁을 하면서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해, 한국을 세계 최고 수준의 지식정보산업국가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처럼, 그리고 스마트폰이 탄생하고, 데이터비용이 점차적으로 하강해 마침내 시민들 대다수가 걱정 없이 유비쿼터스 환경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처럼, 더 많은 시민들에게 미디어가 공급되고 그를 통해 누구나가 지식의 체계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보다 평등한 세상, 보다 올바르고 정의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기회가 되었다. 중국 정부가 은폐한 우한의 진실도, 그리고 어느새 잊혀진 홍콩의 자유의 열망도 시민들이 뉴스를 편집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세상에서는 과거보다 훨씬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올드미디어가 갖고 있는 다중의 뉴스검증과 관리체계? SNS를 통해 형성되는 확증편향? 글쎄, 그 어떤 진실도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검찰권력과 정치권력, 언론권력이 하나가 되어 한 가족을 가히 국가적 수준의 폭력으로 짓밟은 조국 사태는 이제 마치 당연히 조국 일가가 악인인 것처럼 세간에선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 한 정당은 "조국을 지지해서 미안하다"고 발표했을 정도이니, 뉴스가 얼마나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뉴스가 진실이 아니라 단지 누군가의 편향되었을 수 있는 견해라는 것을 먼저 받아들여야, 우리가 비로소 뉴스를 제대로 소비하게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본문에 비해 제목이 거칠다. 낚시 아닌가 싶지만 낚시 맞다. 이게 기레기라는 장사치들이 하는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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