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존 Jan 09. 2020

100개의 항아리

그리고 깨어버린 항아리들

“우리 오빠도 글 잘 써. 페북에 맨날 길게 써.”

“오빠도 그럼 브런치 하세요.”


 두 해 전,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 바깥양반을 데리러 갔다가 잠시 합석한 자리에서 바깥양반의 친구는 나에게 브런치를 알려줬다. 창작 중심의 글쓰기 플랫폼이라는 이야기에 그날 집에 와서 대충 페이스북에서 짧은 글을 하나 올려 작가신청을 했다. 결과는 꽝. 나는 이것 봐라? 하며 며칠 뒤 다시 작가신청을 했다. 역시 이전에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인데 내 브런치에 있는 “여자 가방 들어주는 남자”다. 성공이다. 일단 작가라는 수줍은 타이틀을 하나 받았다.


 뭔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자! 하는 결심은 바깥양반과 카페에 가서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던 중에 샘솟았다. 업무와 공부로 바쁘던 참이라 브런치 활동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스티븐 킹의 창작론은 나에게 당장 쓸 것을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노트북을 꺼내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 만들기”라는 글을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시리즈는 3회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스스로 느낀 교사로서의 절박함을 나누고자 시작했지만 이내 교육학적 진실과 공부법 사이에서 글이 흔들렸다. 여러 사람이 보게 만들려면 나 자신을 속이는 “이렇게 하면 됩니다.”란 말을 해야 했다. 교육학에 충실하게 발언하자면 “아이의 주도성에는 이런 특성들이 있고 몇가지 관점이 있는데 각 관점에서는 이러한 연구가 있다.”는 말을 해야 했다. 나는 결국 스스로의 양심의 굴레에서, 몇 차례나 글 항아리들을 깨버린 후에 브런치를 잠시 멀리 했다. 공부, 부족한 공부를 채워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또 다른 시작은 이번 가을이었다. 조국 장관 문제로 빡쳐서 페북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올리고 있는데 어김 없이 바깥양반이 “페이스북보단 생산적으로 해보자.”라고 조언을 해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남의 자식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 만들 수 있다는 말로 글을 팔기보다는 나의 수업 이야기를 먼저 풀어놓기 시작했다. 좋았다. 글도 술술 나오고, 큰 틀에서 원고의 기승전결까지 구성을 하는 방법을 익혀갔다.  


 그렇게 한번 자리를 고쳐앉으니 금새 속도가 붙었다. 15년 넘게 글쓰기를 해 왔기에 쌓이고 쌓인 글도 글감도 많다. 옛 창고에서 항아리를 꺼내오고 동시에 여러 흙을 모아다가 하나 하나 글을 빚었다. 그 중에 바깥양반과의 신혼 일기도 술 마시고 집에 오는 길에 시작한 글인데, 지금은 가장 조회수가 높은 글들이 되었다. 항아리를 빚는 것은 내 마음이지만 그걸 사가는 것은 방문객들의 마음이니, 매번 겸손을 되새길 따름이다.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글들을 보다 자주 쓰고 싶지만 품이 많이 들어 돌림판에 흙을 얹을 엄두를 쉽게 내지 못한다. 바깥양반과의 생활 이야기는 폰으로도 한번 휙 쓰면 끝인지라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침대에서 후딱 토도독 쓰고 올려버리는데, 그중 백미는 단연 고기국수에 대한 글이다. 12월 31일 자정을 넘기는 순간 가족들과 송구영신 예배를 가서 앉은채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교인이 아닌 내게 성령이 내리신 것일까, 후루룩 쓴 글인데 유달리 사랑을 받아 유쾌했다.


 100개의 항아리가 채워졌다. 팔리지 않을 물건들 뿐이지만 스스로의 성실함은 칭찬할만하다. 손은 둘이지만 머리와 몸은 각각 하나인 터라 읽어야 할 책, 밀린 집안일, 해야 할 업무 등으로 더 성실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청년 시절의 글과는 다른 장년 시기의 글들을 보면 고스란히 나의 세월의 주름들이다. 그래도 창피한 줄도 모르고 15년 전 내가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을 따 오자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 진짜 오글거리네 저 문장.

매거진의 이전글 intermissio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