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러닝을 마치고 밤을 주웠다.

담양에 잠시 머물다

by 공존

흠.

러닝을 거의 마쳐갈 무렵. 그러니까, 마지막 가속 구간에서, 발목을 접질렀다. 작년에 인대가 크게 손상되고 장족 뼈 아랫바닥이 깨졌던 왼발목이라, 확 겁을 먹었다. 멀쩡한 차도를 냅두고 보도블럭으로 달린 탓이다. 다행히도 통증은 심하지 않았고 이내 마음을 놓고 느리게 비스듬한 언덕길을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보았던, 길가의 알밤을 다시 마주했다. 달려내려오던 길에선 휙 지나쳐온 작은 밤들. 가로수는 아닐 테고 길에 접한 야산에 몇그루 밤나무가 있던 모양이다. 길에 무수히 밤송이가 떨어져있고, 대부분은 알밤들이 비워져있다. 그러나 몇개의 밤송이는 또, 알이 차 있다. 갈색으로 변하지 않은, 떨어지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밤송이도 두엇은 있다.


우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로수든 야산의 나무이든, 길에 널린 과실이라고 해도 함부로 가져가면 아니된다. 다행히도 등 뒤, 밤나무 부근에는 사찰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발 아래를 보니, 내가 쥔 몇개의 알밤 외에도 무수히 많은 밤톨들이 길에 뿌려져있다. 그것은 꽤나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자아낸다. 길가의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져 길에 떨어지면, 요즘 누가 밤을 주워가나, 하듯 도로를 지나며 차들이 밤송이를 짓밟고 지나간다. 그러면 밤송이는 휫 하고 날라가버리고 차량이 가하는 무게로 인해 쇼쇼숑 하며 밤송이들이 도로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그런 그림.


실제로 낙엽이 쌓인 노견에는 꽤나 싱싱하고 멀쩡한 알밤들이 흩어져있다. 게다가 몇개를 주우며 보고 또 바도, 대부분은 알밤들에 벌레 먹은 흔적이 없다. 아주 드물게, 내가 집은 밤톨 중에 벌레가 파먹은 게 있는 정도. 밤나무 군락을 이루지 못한 자리에 홀로 외톨이처럼 서 있는 나무엔 그 악명 높은 밤바구미들이 알을 까러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흠.


나는 다시 생각했다. 밤나무의 주인은 있을까. 내가 가져가면 절도인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나 많은 알밤들이 도로 바깥에 튀어나가있다. 이걸 내가 주워가지 않고 남긴다 한들, 상품성이라곤 쥐 눈물 만큼도 없을 500원 동전 사이즈가 될까말까한 작은 알밤들이다. 저렇게 낙엽 사이에 숨어 있는 알밤들을, 주워다가, 누가 굽든 삶든 해서 먹을 것이라 생각을 할까.

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밤알을 신나서 주웠다. 그리고 한 주먹 그득한 밤을 그대로 쥐고 숙소로 돌아왔다. 묵게 된 곳은 담양. 메타세콰이어길에서 걸어서 5분 남짓이면 닿는 작은 계곡을 낀 거처다. 아침에 운동을 하며 새 소리와 졸졸 시냇물 소리를 들을만하다.


그리로 돌아와 밤을 씻어서 우선 냉장고에 넣는다. 다시 봐도 벌레가 파먹은 놈은 없다. 몇 알 정도는 시일이 좀 됐는지 얼룩덜룩한데, 뭐, 그건 깎으면서 버리면 될 일.

사실 나는 근 한달 간 밤밥을 제법 많이 했다. 딸의 밤 체험을 위해 바깥양반이 벌써 두번이나 농원에서의 체험을 예약해 다녀왔다. 상품성이 높은 그런 밤은 아니고, 어린 아이들 체험학습 용이라 삶아먹기엔 또 맛이 없다. 밤조림을 하기엔 바쁘고, 밤마다 아침밥을 씻어안칠 때 밥을 까서 넣는다.


"너는 남편이 밤밥도 해주네."


딸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세살 무렵에 장모님이 우리집을 반년 정도 계시면서 아이를 돌봐주셨다. 그때 잡곡 용도로 파는 말린밤을 넣어서 종종 밥을 안쳤기에, 장모님이 계실 때에도 밤밥을 좀 같이 식사한 적이 있다. 은근히 부러워하시는 눈치에 바깥양반도 밤밥을 좋아하기에 그 즈음 몇번 밤밥을 먹었다.


요즘엔 집에서 밤마다 밤을 까는 재미가 조금은 있다. 손아귀는 아프지만 휘딱 쌀 안치고 쉬자며 자정이 넘은 시간에 쌀을 씻고 밤을 깎는 일은, 두번의 밤 체험으로 냉장고에 아직 그득한 밤을 가장 현명하게 소진하기 위해 택한 방편이다. 아직도 냉장도에 밤이 많다. 밤밥에 밤은 다다익선. 그렇게 먹다보니, 아침에 달달한 밤밥이, 그것만으로도 밥도둑이다.


사실 담양에 오는 길에 짐을 싸면서 아차 밤을 안챙겼네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밤을 주워다가 밤밥을 하다니. 그냥 시장에서 밤 좀 사다가 까 넣으려고 했었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아침에 밥이 다 되길 기다려 대망의 밥솥을 열었다. 다행히 밤밥이 고슬하니 잘 되었다. 사실 집에서는 밤이 많아서 소진해야하는 목적도 있고 해서 이것보다 두배는 더 많이 밤이 들어가지만, 뭐 괜찮다. 이쯤이야.


"아빠 내껀 밥 안들어갔지?"


밥 차리는 걸 함께 하겠다며 주걱을 손에 쥔 딸이 묻는다. 딸은 콩이든 밤이든 자기가 "잡곡"으로 인식한 건 퉤퉤 뱉어낸다. 하지만 너는 모르겠지 이녀석. 이미 네가 먹는 밥이 보리+현미+찹쌀+귀리+백미+렌틸콩+카무트라는 걸. 워낙 아기때부터 내 방식대로 슈퍼 잡곡밥만 먹였으니, 백미를 먹든 잡곡을 먹든 잘 구분은 못한다. 그러면서 정작 맛있는 콩과 밤을 뱉는다. 철 들면 알겠지 아빠가 평생 자기를 배신하고 속여왔단 걸. 그럼 뭐 어때 내 알바는 아니고 네 사정이지.

그리 상차림을 끝냈다. 명절 음식으로 남은 걸 데운 전들, 딸 생일 때 끓였던 미역국, 엄마가 만들어준 배처럼 단 무생채. 이것만으로도 아침은 호화롭고 알차다. 그 알찬 밥상에, 무심하게 지나쳤던 알밤들이 밤밥이 되어 담겼다.


내게 이 알밤을 주워가도록 허락한 사람은 없지만, 부디, 아무도 찾지 않은 버려진 밤들을 거두어갔을 뿐이오니 용서하시길 바라면서. 어쨌든 바깥양반과 딸아이는 밥을 싹싹 비웠다. 바깥양반은 밤밥을 좋아라 하고 아이는, 밤밥은 싫어하지만 이미 가을향을 듬뿍 머금었다. 담양의 가을을, 아마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뭐? 누나라고 불러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