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을 가질수록 헛점이 많은
나는 허지웅을 대단히 싫어한다. 2000년대와 2010년도 사이에 그가 뿌려놓은 가시돋힌 말들이 가슴에 아직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혈기였다기에는, 그가 가진 영향력과 그가 뿌린 진보정치에 대한 혐오는 이명박 시대라는 암흑을 견디던 나에겐 너무나 아프고 잊혀지기 어려운 고통이다.
허지웅이 최근, <대홍수>라는 작품에 대하여 대중의 비난이 과잉되었다고 발언하였고, 영화번역가 황석희씨 역시 그에 동의하는 글을 올렸다. 요점은, 대중의 비난이 영화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를 까고, 비난하는 혐오 선동에 휩쓸려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영화산업에 전혀 유용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옳지만, 과연 <대홍수>에 대한 대중의 비난이 과잉되거나, 선동의 결과물일까?
나는 연상호의 <정이>를 한 호흡에 끝까지 봤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심야에, 맥주를 마시면서 보았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만듦새로 따지면 <대홍수>보다야 낫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는 않은 영화다. 이 말을 미리 내세우는 이유는, 나는 그래도 충분히 인내력은 있는 관객이기 때문이다. <정이>와 <대홍수>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예고편이 굉장히 잘 뽑혔다. 그래서 내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정이>와 <대홍수> 모두 특정 장르에 대한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결과물이었던가, 해당 장르의 세계관에 적응하면서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이 수월한가 하면, 둘 다 그렇지는 못하다. 둘 다 국내 관객들에게 그래서, 꽤나 따가운 평가들을 받고 있다.
두 영화를 비교하자면, 해당 장르의 문법을 전달하는데에 어쨌든 <정이>는 성공하고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하다. 단지 연출이나 감정이 좀 늘어지는 편에, 조악한 액션 역출이 반복되는 인공지능의 학습 과정으로 인해 퍽 지루함을 전달하는 정도다. 반면, <대홍수>는 재난영화로서나 드라마로서나, 제3의 장르로서나 제법 문제가 많다. 전반부의 재난 영화 파트는 너무 과잉되어 있고, 후반부의 장르 변화에서는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빈틈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짜증이 나는 구성과 연출. 이것이 영화 <대홍수>의 본질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 인상이 찡그려질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연출과 구성상의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대홍수의 파도에 휩쓸리듯 비난의 발언들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이런 풍조에, 흔히 '전문가'들은 즐기듯 일침을 날린다.
그러나, 다시 <대홍수>의 예고편을 환기해보자면, 아파트를 덥쳐오는 그 과잉된 쓰나미가 사람들의 눈을 끌어당기고 영상을 선택하도록 하였을 것이고, 파도가 쓸고지난 다음 잔재들이 남듯, 사람들이 빠져나간 곳에, 부실한 골재가 흉히 드러났을 뿐이다. 대중의 '도파민'을 그 거대한 파도를 동원해 끌어들이고나서, 그들의 도파민이 할퀴고 간 자리를 탓하는 것은, 너무 간편한 우월감 아닐까.
지금 사람들이 <대홍수>에 보내는 비난과 영화를 선택하게 하는 그 에너지는 같은 공간에서 기원한다. 말초적 자극, 도파민, 흥분, 호기심. '영화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선입견'을 바이럴에서 구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지웅이나 황석희씨의 <대홍수>에 대한 대중적 평가에 대한 시선은, 해당 산업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대중의 감정이라는 파도를 골라서 받아내고싶다는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영화를 보고 느낀 스릴, 흥분, 감동, 기쁨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바이럴되도록 자기들이 공유하고, 확산하면서, 영화를 보고 느낀 분노, 짜증, 불신, 후회는 딱, 잘라낸다? 넌센스 아닐까. 이런 감정을 재단하고자 하는듯 보이는 허지웅도 '소싯적'엔 못만든 영화들에 대해서, 영화제작자들에게 심정지를 안겨줄 언사를 충분히 해 왔다.
<대홍수>는 못만든 영화다. 사람들은 못만든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화를 실제로 본 사람들의 감정과 기억에 근거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일으키고자, 그 열띤 쓰나미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아 참고로 나는 김수현의 <리얼>도 극장에서 봤다. 아이맥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