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자본주의와 싸우는 화폐히어로
미디어가 흘러넘치는 시대에, 소재만으로 신선함을 선사하는 것은 제법 보기 드문 일이다. 그 점에서 <캐셔로>는, 어설픈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 이것 때문에 8부작의 넷플릭스 드라마가 눈길을 끈다. 능력을 쓴 만큼 돈이 사라지는 히어로라니. 돈이 다 떨어지면 초능력도 사라진다니.
뻔한듯 싶은데 뻔하지 않은 이 소재를 살리는 것은 주인공 커플의 좋은 케미다. 여자친구, 그리고 곧 배우자가 되는 민숙은 자본주의에 영리하게 적응하고 사는 알뜰한 똑순이다. 남자친구, 곧 남편이 되는 상웅은 평생 돈에 쪼들리며 살아온 흙수저의 처지로, 그런 민숙의 경제적인 리더십을 충실히 따르는 소시민 남성상이다. 이들이 처음으로 얼굴을 내비치는 것은 아파트 분양 모델하우스. 이들이 관객에게 보이는 그 첫 딜레마는, 신축분양 아파트에 넣을 청약점수와 계약금의 문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아파트 분양과 '목돈' 문제로 쉽사리 눈길을 끈 다음에는 이 둘의 자본주의 생태계 적응방식을 보여주고, 그리고 나서 상웅이 초능력을 얻으며 화폐 히어로로 다시 태어나는 그 모습까지. 극이 시작하고 2,30분을 트렌디고 스피디한 연출로 '소시민의 드라마'를 히어로 장ㄹ로 세련되게 재편한 다음에는, 히어로의 힘과 책임이라는 딜레마로 극을 전환해,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8부작 규모로 안착시킨다.
사실은 이러한 극의 전개도 충분히 통속적인데 소재가. 소재가 괜찮다. 돈을 쓰면 내 재산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배우자가 속이 끓고 신축 아파트 분양의 꿈이 멀어져간다.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르는 게 아니라 큰 힘에 크게 비워지는 지갑이 따른다. 그렇지만은, 최근 드라마들의 빠른 전개를 반영해 대체적으로 여러 갈등을 길게 끌지 않고 길어야 20분 안에 해결해 버린다. 아파트 계약금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다 날려버린 히어로는 아내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 것 같은데, 그걸 또 해내는데, 돈을 날린 다음에는 우리에게는 사랑이 남으니까. 그게 사람들의 목숨보다도 수천만원의 돈보다 더 중요하니까. 그렇게 돈보다 생명, 돈보다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재치있게 전하는 이야기.
이러한 소재의 참신함 외에는 극 자체는 꽤나 헐겁다. 시즌1임을 고려해도 세계꽌의 밑바탕을 잘 깔지 못했고 규모도 너무 어정쩡하다. 국내에 발 뻗치지 않은 사업이 없는 블랙기업이 고작 딸 하나에 모든 뒷사업을 맡기고 있다. 그 딸이랑 갈등을 이루는 것은 미국 가 있던 아들네미인데 이제 아들과 딸의 경쟁이 극에서 부각되기 시작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딸의 연합이 깨지면서 셋이 다 각각의 세력으로 보이게 되고, 그러니까 이 빌런 집단이 한 없이 조촐해진다. 8부작의 기획안을 통과시켜서 예산을 따냈으면 그에 걸맞는 빌런집단의 묘사에도 공을 들였어야 하는데 <캐셔로>에서는 히어로 집단도 빌런 집단도 볼품없이 왜소하다. 그리고 볼품없는 선과 악의 세력의 갈등보다 돈 그 자체와 갈등하는 캐셔로 상웅을 둘러싼 묘사가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리하면 <캐셔로>는 히어로물의 옷을 걸친 자본주의 생존 드라마이고, 실제로 히어로물로서보다 자본주의 드라마로서 전하는 공감이 더 크다. 관객, 아니 시청자는 영웅의 탄생, 시련, 극복, 초월과 귀환이라는 전통적인 영웅서사에 감동받는 것이 아니라 힘들게 돈을 벌고, 오늘의 일상을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의 꿈을 지켜주고, 그를 위해 다시 직장으로 향하는 소시민의 이야기, 그들의 사랑에 감동받는다. 이 점이 오히려 내가 뻔한 히어로물인 <캐셔로>를 끝까지 정주행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스크린에서는 마블과 DC의 히어로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시대. 특히나 마블의 최근 작품들에선 영웅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공감대에서 극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 못하고, 그것을 반영하듯 DC의 최근작 <슈퍼맨>에서도 슈퍼맨을 소시민적으로 그려내기 위해서 초반부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캐셔로>가 보인 성취는 그래서 제법 흥미롭다. "히어로 세계관"의 판을 잘 깔진 못하고 "자본주의 세계관"에 있어선 꽤나 깊이있는 서사를 부여한 새로운 장르. 불행을 적당히 빼고 버무린 스파이디의 이야기 같기도 한데 과연 다음 시즌이 나온다면, 자연스럽게 더욱 확장될 히어로 세계관 속에서 이 자본주의의 딜레마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앞으로 민숙과 상웅은 융자금을 갚아야 하고, 하자보수도 해야하고, 생활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배우고, 아이의 영어유치원 학비부터 시작해, 점점 더 커지는 학원비라는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 <캐셔로>의 이야기는 집을 사고 나서부터,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곧 시작될 것이다. 오늘을 우리의 삶처럼. 그래서 다음 시즌을 기다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