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은 아쉬운
"두번 다시 잃어버릴 순 없어"
오프닝 장면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만수'의 기이한 저택의 풍경이다. 지나치게 식물이 많다. 사람이 살고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마당 가득 온갖 화분과 분재, 나무가 가득하다. 이것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기보단, 사람이 나무에 갇혀있는 꼴이다. 그 집 마당에서 주인공 만수는 고기를 굽고 있다.
고작 네 가족이 살기엔 너무 크다 싶은, 작 중 설정에 따르면 아버지 대에 지었다는 으리으리한 저택은 1층과 2층 사이의 외벽이 마치 가시처럼 뾰족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2층에선 자폐를 앓고 있는, 그리고 극에서 범죄에 더럽혀지지않은 순수를 뜻하는 딸 리원이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가족을 품에 안고 만수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며 바라보는 이 풍경. 이 집. 이 가족이, 곧 만수가 저지르는 연쇄살인의 원인이 된다. 그는 실직을 했고, 거대 제지회사의 현장 관리직으로서 받고 있던 노동소득이 사라지게 되면서, 이 가족과 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영화의 도입부에 아내 미리가 현실적으로 진단하듯, 이 집을 팔면 된다. 빚도 갚고 대치동으로 가서 아이들 교육에 전념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도박을 하지 않아도. 박찬욱 감독은 지방도시에 있는 이런 집들은 집 자체의 가치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지만, 원래 사업이 망하면 어느 집이든 주택부터 정리해서 목돈을 마련하기 마련이다. 만수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이 집을 떠난 바 있다. 그러나, 집을 내놓았음에도 팔리지 않았고 영화가 끝날 떄까지 가족의 보금자리이자 범죄의 보금자리로서 집은 여러 역할을 하게 된다. 분홍빛 꽃이 아롱아롱 걸린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자리한 가족의 보금자리로서.
그래서, <어쩔수가없다>를 이해하기 위해선 만수가 사는 이 집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수에게 있어 이 집은 자신의 전부이되, 한번 잃은 후 다시 되찾은 보물이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쉽게 말해 자기 마누라를 내놓는 것이나 같다. 똑같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 만수의 자아는 왜곡되어 있다. 집은 너무나 거대하고 식물에 부자연스럽게 둘러싸여있다. 나무로 둘러싸인 집에서 만수는 온실에 갇혀 분재를 구부리다가 꺾는다. 그는 마당의 나무들이 바람에, 빗물에, 햇살이 이지러지며 자유로이 자라는 것을 바라보고 더듬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제지회사의 노동자라는 특성을 넘어, '숲이 아닌 나무만 바라보는' 좁은 시각을 갖는 인물임을 상징한다. 그는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바라보지 못한다.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온실 속, 그가 그린 삶만을 살아간다.
정글같은 마당 위 2층에선 가시돋힌 성채에 의해 딸 리원의 순수한 세계가 존재한다. 1층에선 부부의 성생활이, 범죄에 대한 공모가, 은폐와 거짓이 존재한다. 2층에선 소년 소녀의 순수가 존재한다. 2층 위 공간에서 아들 시원이 1층의 아버지의 범죄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명백히 상징적이다.
<어쩔수가없다>는 도입부에서 보이는 만수의 대저택의 부자연스러운 미장센이 가하는 거북한 인상이 살인의 동기에 관한 회의감과 함께 함께 극에 대한 몰입을 밀어낸 뒤, 다시 그 집에서 범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이는 요상한 영화다. 어떤 점에선 <기생충>의 기택이 저택의 지하실에 갇혀 여생을 보내듯, 범죄에 공모한 가족이 이 벌레가 그득해 썩어버린 나무 같은 저택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는 것을 상징하는듯한 이야기다. 이 집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그가 진심으로 지키고자 했던 것이 가족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저택과 온실이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리하여, 이야기를 이 '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논의하면, 평범한 자본주의 속 노동자 간의 경쟁과 상호간의 폭력이라는 반복되어 온 테마를 넘어 새로운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은 만수의 집이 이야기의 본질임을 이해해야 한다. 만수가 집을 파는 것을 반대한 것은, 그에게 파피루스의 면접을 소개시켜준 후배의 말과 같은 '똥꼬집'이 아니다. <어쩔수가없다> 자체가 집과 회사, 두개의 공간을 축으로 서로의 자리를 뺏고 빼앗기는 이야기이기 떄문이다.
침탈된 공간과 공간으로의 유폐
1순위 경쟁자인 범모는 그의 소중한 보금자리에서 아내와 남성의 불륜을 목격한다. 그의 공간이, 침탈당했다. 가족과 집은 모두 한 인간의 보금자리이며, 이는 직장을 잃은 것에 이어서 그가 영혼을 기댈 마지막 공간마저 잃었음을 의미한다.
이 범모를 추척하며 살인에 이르는 과정에서 만수는 거의 그를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게 된다. 치위생사 아내와 그냐가 근무하는 병원의 의사와의 불륜을 의심하며 한바탕 추한 부부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이미 집을 내놓은 판에 아내라는 보금자리마저 빼앗긴 존재를, 실제로 목격함에 따라 느끼는 이 내적 갈등이 범모와의 대면에서 너무나 쉽게 표출된다. 그리고 범모의 죽음 뒤, 공간은 완전히 아내와 내연남의 것이 된다. 하긴 뭐 애초에 이 집은 장인의 것이었지만.
자신의 것이었던 공간을 침탈당한 범모와 대조적으로 시조는 만수의 공간에 유폐된다. 온실 속에서 분재처럼 구부러진 채로 정글같은 마당에 갇혀.
<어쩔수가없다>의 평을 깎아먹게 된 주요한 요인으로 범모와 시조의 분량의 불균형이 꼽히는데, 범죄까지의 과정이 공들여 묘사된 범모와 달리 시조는 등장한 뒤 너무 간단하게 극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시조가 사망한 뒤 그의 시체가 처리되는 과정은 범모의 시체가 뒤처리되는 과정보다 훨씬 공들여, 길게 묘사된다. 즉, 범모와 시조의 분량은 불균형하지 않으며, 시조의 살해는 극에서 도구적으로 소모되기보다는 가족의 범죄의 공모 및 이 가족이 집에 유폐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범모와 시조의 분량이 균등하고, 각기 공간의 침탈과 공간으로의 유폐라는 대비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을 깎아먹게 된 것은 몇가지 연출 및 편집에서의 아쉬움이 보이는데, 우선은 범모를 감시하는 씬과 함꼐 시조를 만나 감시하고 살인 견적을 내는 과정 정도가 교차되어 배치되었어야 하고, 시조를 죽인 이후의 만수의 갈등이 가족과의 공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보단, 그의 내면 묘사가 좀 더 이루어졌어야한다. 그런데 이러한 내면묘사가 아들의 범죄로 인하여 희석되면서 그의 죄책감보다는 가족의 공모로 확장되면서 관객이 몰입할 포인트가 소실되었다. 이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만수가 그의 집에 갇혀있음을 예고하며 시작된 이야기에서 그 집을 타인에게 빼앗기는 장면, 그 집에 누군가를 가두는 장면을 잇따라 보여준 후, 이를 통해 완성된 범죄의 고리로 마침내 만수가 완전한 살인마가 되어, 선출을 죽임으로써 타인의 공간을 침탈하는 장면으로, 극은 완성된다. 다 이루었다. 만수는 이를 통해 빼앗긴 그의 자리를 되찾았고, 선출의 공간에 들어가, 그가 했어야 할 업무를 수행한다. 곧 AI에 의해 침탈될 공간의 관리자. 다시 반복될 비극을 암시하는 거대한 로봇의 팔 아래. 그리고 앙상히 마른 배롱나무 아래 서 있는 아내 미리의 시선을 받으며.
그래서 만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영화는 너무 명징하게 그의 비극을 상징하는 엔딩 스크립트 씬을 내보내지만, 다행히도, 만수의 집에는 가시성채 위의 순수의 공간에 남아있는 그의 딸이 있다. 그 자리에서 완성된 딸 리원의 예술이 있다. 리원의 완성된 연주를 듣는 미리가 있다.
그러니까, 이 자본주의의 아귀다툼은 어떤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이 있기에 용서받을 여지를 남긴다.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자본주의의 정글 속에서 각 개인은 이 온실을 두고 죽고 죽이는 살육극을 벌이지만, 그 위층에는 보호받을 아이들, 약자들,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이들이 있기에 그놈의 복지정책이라는 것이, 수정자본주의와 민주주의란 것이 작동한다. 약자들이 없다면, 보호받을 자들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악독한 그 본래의 형태를 드러낼 것이다.
만수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이 집에서 리원은 강아지가 있든 없든 자기가 연주하고자 하는 음악을 완성했다. 온실이 아닌 마당에서 비오는 날 달팽이를 감상하며. 그런 리원으로 인하여, 적어도 만수의 가족은 지속될 것이다. 아들 시원의 죄책감이 <박쥐>의 상현과 태주가 꾸는 악몽처럼 부풀어오를 날이, 그로 인해 부부의 갈등이 더 큰 파국으로 치달을 날이.
언제고 오기 마련이겠지만,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떈 이놈의 집구석을 팔아서라도 이 가족은 서로를 지키게 되지 않을까. 왜냐면, 이 가족은 아내 미리의 것이기도 하기 떄문이다. 공간은 본래 '안주인'의 것이다. 만수의 범죄만을 바라보며 파국을 예감하기엔,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크다. <어쩔수가없다>에서 미리가 가족을 위해 해온, 하게 될 역할은 크다. 세상은 남자들 사이의 권력다툼만으로는 굴러가지 않으며, 1960년대 히피들의 주장처럼 예술이 이러한 왜곡된 사회질서의 대안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관점을 살필 때, 아마도 만수와 미리의 가족은 견디어낼 것이다. 나무가 잎사귀를 떨군 것은 단지 겨울이 다가오고 있을 뿐이다. 봄은, 리원의 첼로 선율처럼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