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필요한 평가와 진단, 그리고 성찰
커피를 볶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의 여행, 호주의 멜버른에서 사온 커피가 너무 맛있어, 그 맛을 집에서도 만들어볼 수 없을까, 하며 홈 로스터가 된지 벌써 6년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 많은 실패도 했지만, 이제는 꽤 괜찮은 커피를 집에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11명의 선생님이 돈을 모아, 커피 생두를 사, 함께 마시고 있습니다.
열한명이 나누어먹으려면 원두가 일주일에 1.5kg 정도는 필요합니다. 저는 1kg의 커피 생두를 17000원 정도에 삽니다. 로스팅을 마치면 15% 내외의 수분이 날아가기 때문에, 850g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한번 볶을 때 2kg를 볶게 됩니다. 이렇게 로스팅을 마친 콩은 원두가 됩니다.
그럼, 커피를 내려야겠죠? 드립커피를 한다고 해보죠. 싱글오리진은 보통 드립커피로 마시니까요. 1kg의 커피 콩을 볶아 나온 850g의 원두. 드립커피가 42잔 정도가 나옵니다. 한잔에 7000원 정도가 자릿값을 치지 않은 싱글오리진 드립커피의 적정가라고 생각하니까, 전기세나 임대료 등을 제외한, 생두로부터 커피 한잔까지의 가치의 변화만 생각해보면, 1kg에 17000원의 커피 생두를 사서 볶아, 42잔의 드립커피 294,000원어치가 되었습니다. 생두로선 17배 가량의 가치 증진을 경험한 셈입니다. 저로선, 노동력과 전기세 등을 지출하여 커피 한잔 값으로 14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한 일입니다. 6년의 세월을 투자한, 로스팅과 커피 추출에서의 전문성이라는 부산물이 생겼죠.
그러나 17배의 자본가치 상승이라는 편익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커피를 로스팅하기 시작한 이유가 "어떻게 하면 싸게 먹을 수 있을까?"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어떻게 하면 이 맛있는 커피를 내가 만들어볼 수 있을까?"였기 때문에, 저의 고민은 이렇습니다.
"나는 이 커피가 가진 맛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고 있을까?"
이 생두로부터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최상의 맛이 분명 있고 내가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본 경험은, 커피를 볶고 추출하는 일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매번 채찍질합니다. 지난번의 로스팅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는데 이번엔 맛이 덜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제가 무언가 로스팅과 추출 사이에 잘못한 점이 있었겠지요. 고농축된 커피 원액에 물을 얼마나 타느냐, 이거 하나만으로도 맛이 확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커피의 맛에 집중하면 17배의 비용편익은 사소해집니다. 로스팅과 추출이라는 나의 노동력은 17배로 가치를 늘리는 일이지만, 생두가 가진 최상의 맛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커피가 가진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커피 로스팅과 추출은 늘, 양을 늘리는데에는 성공, 커피가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에는 성공과 실패를 오갑니다.
그로 인해 커피를 볶는 일은 점점 더 신중해지고, 커피 맛을 볼 때는 더욱 진지해집니다. 내가 받아든 생두에서 최고의 맛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한번 한번의 실천에, 더 깊은 사고와 반성이 배어듭니다.
그렇게 6년이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딸이 태어나고, 무려 서울대에서, 대학원생이 되었고, 심지어 박사과정이라는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길을 택했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성장의 과정이 이어지며, 로스팅을 하는 일은 저에게 이러한 질문으로 다시 다가오곤 합니다.
"나는 내 삶이 지닌 가치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내고 있을까?"
"나는 이 아이들이 지닌 가치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내고 있을까?"
"나는 내 딸아이가 지닌 가치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내고 있을까?"
이것은, 기호품에 불과한 커피 로스팅보다 훨씬 어렵고, 무거운 질문입니다. 지금 내가 작성하는 한장의 페이퍼는 내가 읽어온 책들과 논문들을 반영한, 최상의 결과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잘 써질 때가 있고, 잘 안써질 때가 있었습니다. 저의 대학원 공부는 거의 늘 실패한 로스팅이라는 반성이 함께합니다. 이따금의 잘 된 로스팅이 빵 터져, 그래도 석사논문을 쓰고, 두 편의 1저자 논문이 작성되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도, 일단 시작은 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스팅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하나 하나는 1년 잠시 만나 영어 교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제가 부여할 수 있는 교육적 효용이라는 것이 한계가 존재합니다. 학교 교사가 거꾸로 학원 선생님들보다 아이들의 학습에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건에서도 매년 수업의 방식을 바꾸고, 아이들이 더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래야합니다. 어쨌든, 지금도 저는 더 나은 수업을 모색하며 교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 우리 아이에게 어떻게 더 나은 교육을 해줄지에 대해, 매번 고민을 하지요. 아이의 주도성을 해치지 않는 인내심. 아이의 인식의 지평을 넓힐 대화. 아이의 태도를 교정할 훈육. 매일 매일이 한번의 로스팅입니다. 나 자신을 볶는 일, 교사로서 수업을 볶는 일, 그리고 우리 아이를 볶고, 부모로서의 나를 볶는 일. 이렇게 일련의 모든 실천이 성찰을 강화하고, 그러한 성찰이 다시 하루 하루의 실천을 개선하는 시간이 흘러갑니다.
커피콩을 볶아 최상의 가치를 이끌어내야한다는 저의 관심은 이렇게 학습과 교육, 육아에 결합됩니다. 실패에 대한 진단, 성공에 대한 평가는 매일, 혹은 매 순간 이루어집니다. 로스팅을 하며 얻어낸, "이 커피콩으로부터 나는 최상의 가치를 이끌어내고 있는가?"하는 질문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사고가 습관처럼 굳어지진 못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커피를 스스로 볶거나 추출하지 않고 그냥 사먹는 사람이 훨씬 많고, 그날 그날 수업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교사들, 매우 많고, 아이의 교육에 있어서도 성찰보단 속단을 하는 이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저 역시 실패하는 로스팅처럼, 충실하지 못하게 보내는 하루가 허다합니다.
"내가 나의 자녀교육의 가치와, 우리 아이가 가진 잠재력을 최고로 이끌어내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최상의 자녀교육으로 이어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커피의 맛을 모른채로 커피를 마시듯, 우리에겐 자녀교육에 대해 평가하고 성찰할 객관적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에겐 "시험 성적"이라는 지표가 있죠. 문제를 풀게 하면, 채점의 결과를 받아보면 우리 아이가 가진 가치와 잠재력은 매일 매일 확인되고, 성찰과 개선의 대상이 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조기교육을 하는 한가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자녀교육과 아이의 성장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모두가 갖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시험에 바짝, 다가서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는 시험을 통해 아이들과 나 자신을 볶는 일을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시험을 통해 볶으며 맛을 보고, 우리 자신의 삶의 가치 평가는, 인스타그램이라는 쉬운 평가 척도가 있죠. 이것은 커피 로스팅의 17배의 비용편익만큼 "숫자"가 보이는 직관적인 성과 측정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 아이와 보낸 하루에 찍힌 좋아요와 댓글의 숫자가 그 가치를 아주 쉽게 확인시켜주지요. 아이들 역시도, 적당히 나이를 먹어서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곤, 쇼츠와 사진에 찍힌 조회수와 좋아요, 댓글의 수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합니다.
우리 모두에겐 나 자신을 위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위한 진단과 평가, 성과 측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현 위치를 확인시켜주고 나아갈 길을 안내합니다.
다만, 내가 마실 한잔의 커피를 위해 스스로 콩을 볶고 추출함으로써 그 진단 평가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고, 갈고 닦아가느냐 아니면 타인이 마련한 기준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느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되고 대학원생이 되고 스스로 더 나은 교사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지난 6년의, 나 자신을 볶아낸 시간에서의 저의 작은 성찰입니다. 매주 커피를 볶으며,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를 마시며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일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한잔의 커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멜버른에서 아주 흔히 만날 수 있는 커피 프랜차이즈였는데, 그 커피를 사와서 학교에서 추출해서 먹었던 그 한잔이 너무 맛있었던 탓이죠. 그것이 로스팅과 매일의 성찰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남길 질문은 두가지입니다.
"나는 이 삶의 가치를 최상의 것으로 만들고 있을까?" "내 삶의 가치를 평가할 기준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을까?" 첫번째 질문은 우리 모두가 지금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7세고시이든 인스타그램이든, 우리는 나름의 방법을 택해, 나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질문을 탐색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고 말입니다. 이 답을 구하는 것이 교육과 학습이라는, 인류가 탐구해 온 가장 오래된 학문분과의 핵심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모두가 이 두번째 질문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보길 희망합니다.
<공부 도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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