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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03. 2020

토론 하는 법

교육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전문기술

“합숙이다. 방 잡아놨으니 다음주에 양재역으로 오렴.”


 스물다섯살에도 여전히 나는 우리 고등학교 토론동아리의 일원이었다. 스물여덟의 선배(!)는 우리 고등학교(!!) 동아리가 더욱(!!!) 발전해야 한다면서, 계속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나에게 아예 합숙 토론훈련을 제안했다. 거부할 수 없는.


 그 선배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배의 역할인 토론지도 간사의 첫해를 마칠 무렵에 대학 졸업반이 되어 여유가 생겼다며 동아리에 화려하게 컴백, 우리 동아리의 전통과 권위를 더욱 확고하게 지키도록 해주신 빡센 선배였는데...되게 무서운 여장부였다. 운동권도 아니고, 환경주의자나 리버럴에 가까운 자기 사상을 확고히 정립한 사람이었으며 특히나 정말로 토론을 엄격하게 했다. 내가 스물세살, 군대를 가기 얼마 전에 토론을 같이 들어갔다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 사상을 너무 아이들이 맥을 못 짚고 한시간 넘게 헤메길래 살살 두어가지 발제로 길목을 터주려다가 그 누나한테 30분을 털렸다. 고1,2 아이들 앞에서 대학 3학년인 내가. 죄목은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망가트림.”


 그래서, 추운 겨울날 알바를 마치고 밤 8시쯤, 나와 친구 둘이서 그 누나에게 끌려가서 두꺼운 토론매뉴얼을 하나씩 받아들고 새벽 2시정도까지 훈련을 받았다. 사실 이미 그 당시에 내 토론 능력은 동아리 내에서 월등했기 때문에 매뉴얼과 훈련은 임상지식에 이론을 더한 정도라, 지금 생각하면 그저 재미있는 추억 정도다. 그 매뉴얼은 아직도 책장 어딘가 보관되어 있을듯한데, 그날 나는 알바를 하고 가서 새벽엔 거의 수업 때 조는 아이처럼 빙빙 머리를 돌리고 자다가 그대로 뻗어버렸다.


 고등학생 시절 2년, 대학 4년 내내, 중간에 휴학까지 1년. 토론동아리 활동을 하며 심지어 하늘같은 선배에게 혹독하게 단련을 받았는데 실전은 그보다 혹독했다. 내 대학 시절은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을 걸치고 있었다. 사회모순과 갈등의 파열음이 대학과 온라인 내에 횡행했다. 혈기들 왕성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싸우자고 달려들었고 일베 수준의 비이성은 그  당시 표면화되지 않았다. 하룻밤에 100개가 넘는 댓글을 쓰며 다투기도 했고, 달갑지 않은 유명세를 치렀다.


 토론의 이론, 실습, 실전을 모두 혹독하게 거치고 나서 나중에는 그것을 학생에게 전수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교사로서의 별도의 학습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건데, 토론은 전문적 기술이다. 고도의 사고능력과 함께 균형잡힌 도덕성을 요한다. 특히 도덕성이란, 사회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시야와 테이블 위의 토론 상대 모두에게서 목소리를 이끌어내고 경청할 수 있는 세심함, 그리고 나 자신을 엄격히 통제할 수 있는 절제능력을 두루 이야기한다. 토론은 서로의 창의성과 사고능력을 증진하는 상생의 기술이며 갈등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화해의 기술이다. 영어로 debate, 싸움을 없애는 행위이기도 하고 discuss,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토론은 민주주의의 핵심 동력이다. 토론이 있음으로써 총과 칼로 이루어지던 투쟁이 논리와 가치의 투쟁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 라는 설명 없이 내가 어제 어떤 방문객에게, “저는 토론과 토론교육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을 했더니 그분이 내 말을 이해 못하고 상당히 비이성적인 토론매너를 관철하셨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토론의 방법에 대하여 설명을 더한다.


1. 상대방의 말에는 나름의 합리가 있다.


 대뜸 “저는 토론과 토론교육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화 내던 걸 멈추고 “아 그러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볼까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그래야 한다. 그 어떤 개소리 헛소리라도 상대방의 말은, 적어도 서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대화라면, 모두 저마다의 합리를 지니고 있다.


 상대방의 개소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유를 짐작해보아야 한다. 짐작해보아도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으면 그땐 물어야 한다. “여자도 군대 가라.”라는 주장은 뿌듯한 개소리다. 그러나 그 주장의 바탕에는, 남성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군대를 가서 18개월을 폭력과 비이성 속에서 방치되어 있어야 했던 남성의 피해의식과, 그런 피해의식을 제대로 관리하고 통제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무책임이 자리한다. 이런 경우엔 누구나 짐작 가능한 논리구조다. 먼저 상대방이 겪은 피해의식에 공감하고, 군대 문제는 명백한 우리 사회의 부조리이므로 거기서부터 토론을 시작하면 된다.

 

 “진중권에 대하여 논의조차 말자.”라는 주장은 합리가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대방에게 설명을 구해야 하는 경우다. 이때 명심할 것은, 말을 자르고 자기 논리구조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면 안된다. 상대방은 서론 마치고 본론 1 전개 중인데 탁 자르고 들어와서 반론을 한다. 그것은 나의 논리일 뿐이지 지금 내가 반박하고자 하는 상대방의 논리에서 얻어진 합리가 아니다. 충분히 듣고, 상대방의 전체 논리를 이해한 뒤에 논점을 세세히 구해야 한다.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더하는 것은 나태하고 오만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듣기 싫고 내 말 들어라.”라는.


2. 쟁점을 뽑아내야 한다.


 가장 어려운 기술인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쟁점을 가려내지 못한다. 상대방의 전체 논리구조와 나의 전체 논리구조를 모두 열람해보고 그 중에 충돌하는 사항 A, B, C...를 골라내는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1번 항목에서 상대방의 논리구조를 미루어짐작하거나, 설명을 얻어서 전체 논리를 파악할 수 있는 인내심과 지적 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한 나 자신의 논리가 엄격하게 세워져 있어야 각자의 주장을 비교분석할 수 있다. “여자도 군대 가라.” 라는 주장을 다시

예를 들어본다면, 이 황당한 주장의 논리구조를 뜯어보면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쟁점은 (1)징병제의 근본 문제 (2)보상의 불충분함 (3)취업준비 단절 등이다. 징병제는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서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보상에 대해선 의견이 많이 갈린다. 최근 여성계에선 남성의 군 경력을 직장에서 호봉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반발하는 기류가 있다고 하니 재미있는 논쟁이 될 것이다. 취업 단절은 굉장히 핵심적인 문제다. 여성이 받는 취업 불이익과 경력단절이라는 중대하고 어려운 문제로 논의가 확장될 수 있고, 비로소 우리 사회의 발전을 논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자가 소양이 있고 토론 당사자들이 양식이 있으면 “여자도 군대 가라.”라는 개소리가 우리 사회의 발전을 꾀하는 의미있는 대화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된다. 왜냐면, 쟁점을 가려내는 일은 어렵고 토론은 귀찮은데다가 일단 나는 성질이 뻗치고 일단 내 앞에 개새끼는 울리고 싶고 결정적으로 내 핵심주장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나태하고 오만한 태도로는 절대 상대방의 존중을 얻어낼 수 없다. 왜 상대가 설득당하나. 침 뱉고 돌아서는 게 현명한 일이다.


3. 모든 사람으로부터 의견을 구해야 한다.


 자기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토론 잘한다고 착각하는 중생들이 있다. 특히 대학 때 똘똘한 척 하던 후배가 있는데 토론동아리를 만들자더니, 한살 아래 후배들과 모인 자리에서 제 할말만 했다. 그런 경우에 나는 시간을 잰다. 말을 마치고 나면 “이번엔 14분.” 이라고 쪽을 팔아준다. 물론 그런다고 고쳐지진 않는다.


 반복해서 강조하건데 토론을 잘하고, 토론을 이기려거든 상대방의 전체 논리구조를 먼저 파악해서 쟁점을 가려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들어야 한다. 상대방이 말을 많이 할수록 나는 더 많은 쟁점을 손에 들게 되고, 상대방은 더 많은 약점을 노출한다. 토론 참여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들어야 한다. 어차피 상대방도 자신의 합리, 나도 나의 합리가 있기 때문에 각자의 주장의 우열이 손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쟁점이 해결이 안될 땐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서 다수결로 해결하고, 내가 불리하면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 쟁점이 잡히지 않아서 논의가 진전이 안될 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서 쟁점을 잡아나가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을 일관되게 행해야 한다. 내가 때려잡고 싶은 상대방의 의견도 충분히

듣고, 토론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듣고, 테이블 바깥의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 테이블 바깥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의견인 것일까? 다다익선이다. 가능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의견 속에서 나의 논리를 바로잡아야 한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나의 논리를 바로잡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의 단순한 요체다.


4. 토론의 목적은 인본주의와 나의 합일이다.


 이와 같이, 토론에서 이기기 위해 먼저 듣고,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의 논리를 바로잡는 과정을 걷다 보면 한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토론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개의 경우 토론은 이길 수도 없고 이겨서 내가 좋을 일도 없다. 다시 볼 일도 없고, 내가 정상적으로 토론에 임했는데 다수가 나를 비웃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공간이 비정상이다. 거기서 하루 빨리 빠져나오는 게 정답이다. 달라붙어 있어서 나에게 이로울 일은 저혈압 증상 완화 말곤 없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토론의 과정 속에서 더 많은 논리체계를 열람하는 지적 희열을 즐기고, 그보다 중요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저마다의 합리를, 그저 배워야 한다. 나의 논리가 완벽하다고 믿는가? 어지간한 관련 전공의 석사 정도만 와서 봐도 콧방귀 날아올 소리다. 우리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공백이 많다. 겸손해야 한다. 내가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하는가? 상대방이 어떤 논리로 재반론을 해 올지 모른다. 가능한 모든 논리를 점검해서 토론에 나서야 하고, 그러므로 정말로 모든 사람의 의견을 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낮추고 세상을 들어다보는 자세. 즉 인본주의로 나의 토론은 나아간다. 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논리에서 나의 논리와 상충하는 것을 찾아내어, 필요한 경우 나의 문제점을 발견해 고치는 것. 나와 인본주의의 합일이다.


5. 그러니까, 이기려고 하지말자.


 토론은 안 그래 보여도 엄격한 규칙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어지간한 석사급만 와서 앉아있어도 단번에 대화 상대로서 격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볼 수 있다. 말 끊기, 제 말만 하기, 예단하기, 논점이탈, 인신공격. 다 제 살 깎아먹는 일이다.


 토론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방을 이기려고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논리의 헛점과 공백을 찾기 위해 테이블에 나와 있다. 그것을 명확하게 지적하는 상대방이 있으면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깊은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기려고 토론을 하는 사람은 이 단계에서 상대방의 논리의 헛점을 파고 드는 것에 집착하고 승리감에 도취된다. 마라톤 하고 있는 사람 옆에 붙어서 단거리를 좀 앞질러서는 이겼다고 우쭐대는 꼴이다. 나는 상대방의 논리를 충분히 파악했는가? 나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시켰는가? 각자가 논하고 싶은 쟁점을 찾아내서 충분히 다루었는가?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지식의

여백은 보완되었는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내가 이 사람을 이겼다고 치자. 그 사람 계속 따라다니면서 우쭐대는 것 말고 대체 내가 얻는 게 무엇인가?


6. 논리 외에 다루지 마라.


 시간 낭비다. 나는 안그런지 모르겠는데 상대방은 금쪽같은 시간을 깨서 날 상대하고 있다. 쓸데없는 말로 바이트 낭비,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오로지 논리만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할 말이 많은가? 그렇게 인정받고 싶은가? 주머니에서 송곳이 삐져나오듯 논리를 갖추어 토론에 임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집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어느 곳 어느 시간이나 갈등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 굳이 내가 잘난척 말을 많이 해야 사람들이 날 주목하진 않는다. 맨 뒤에 서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뒤에 교통정리만 해도 내 능력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런 태도를 항상 유지하면 된다.


 물론 이기려고 들지 말라는 말은 나의 주장을 드러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나의 주장이 정리된 문서는, 그러니까 하나의 초대장이다. 곱게 잘 다져진 언어는 사람들을 모은다. 품격있게 매력을 담아 자신의 주장을 조리있게 풀어내는 것을 즐거운  토론의 길라잡이가 되어준다. 더 많은 초대장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다수결과 다다익선의 힘으로 나의 지식과 세계는 끊임없이 확장된다. 그때부터는 그저 즐기면 된다.


0. 토론 교육


 우리 교육제도는 토론을 배제하고 구성되어 있다. 비판적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교육제도는 다분히 정치적 목적을 함유하고 있다. 토론, 숙의, 숙려, 합의를 가르치고 민주주의를 학습시키는 교육은 권위주의적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있어서는 우물에 풀어지는 독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한 탓에 우리 시민사회의 토론문화는 아직 애잔한 수준이다. 모두가 말다툼을 할 줄은 알지만, 일반시민의 교양으로서 토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런 시민사회의 토양에서 이정도 성숙한 정치적 민주주의를 일궈온 것이 놀랍다. 한글의 힘일까? 어찌되었든.


 토론을 할 수 있는 적합한 공간 혹은 집단을 찾아나서고 그 속에서 성숙한 토론매너를 내재화하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서 대단히 즐겁고 바람직한 활동임에 틀림 없다. 나는 학교 교육에서 배우지 못한 걸, 독서토론동아리와 그 선배 누나에게 탈탈 털리고 또 밤새워 온라인에서 토론을 하며 배웠다. 숯을 삼키듯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를 통해 나는 더 성숙해졌다. 운이 좋았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토론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기를.  놀랍게도 우리 토론동아리는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40주년이 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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