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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05. 2020

바깥양반과 나의 점과 선과 면

달라도 이리 달라 많이 달라 아주 달라

 걷기 좋아하고 길을 잘 찾는 나의 성격에 대해서 그 근원을 찾아보자면 다시 어린 시절로 되짚어질 수 있으나 특이한 것은 없는 이야기이니 오늘은 접어둬야겠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 곳이나 잘 걷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염이 오나 그냥 막 걷는다. 북적거리는 옛 피맛골의 분위기를 그리워할 때도 있고 술에 취해서 깊은 밤 텅빈 광장시장 거리를 걷는 것도 좋아한다. 주변의 모든 것을 재미있게 둘러보곤한다. 때문에 나에게 길은 선이 아니라 면이다. 공간을 탐색하고 도시의 정취를 그대로 느끼는 것을 즐긴다.

 바깥양반에게 길은 점이다. 점에서 점으로, "핫플"을 찾아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빨리 걸을 때가 드문데, 폰을 보거나 잡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며 글감을 하나 뽑아내면 2,30분 정도는 세상 즐겁게 혼자 놀 수가 있다. 그러나 바깥양반은 해가 지기 전에, 혹은 날씨가 흐려지기 전에, 혹은 내가 앉고 싶은 자리들이 다 차 버리기 전에 빠르게, "그 곳에 가고싶다."라는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그래서 혼자 오도도도도 빠르게 걸어나갈 때가 많다. 나의 선과 바깥양반의 선은 겹치지 않는다. 나의 면은 바깥양반에게 희미한 차원으로만 존재하고, 우리는 같은 점을 향해서 동행할 뿐이다.

 "어떡해 시드니 5일 내내 비야."

 멜버른에서의 6일간 바깥양반은 매일같이 날씨 투정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를 말리며 30분 내내 날씨를 본다. 비싼 돈을 들여 온 해외여행이 비로 망쳐지는 것을 믿기 어려워서 일기예보를 보고 또 본다. 나는 핀잔, 이라기보단, 아쉬움을 섞어서,

"나 비오는 거 완전 좋아한다고."

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외출준비를 마치고 같은 길을 걷는다. 다행히 이번 여행에서 비는 단 하루만 왔다. 아직까지는.

 비가 와서 좋은 것 한가지는 바깥양반이 절대로 혼자 걷지 않고 내 손을 잡는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선을 찾아나설 동기를 상실한 것이다. 이제야 같이 걸을 수 있다. 우리의 선은 겹쳐진다. 나는 원래부터 비를 좋아하는데 가장 깊은 숨은 기억의 상자를 더듬으면 외갓집에 가서 오두막의 함석지붕 아래 누워 비 오는 소리를 맞는 것이 유난히 즐거웠던 감정들이 존재한다. 외갓집 태안에서 어릴 때 여름마다 2주 가량 해수욕장에서 사촌들과 놀았다. 물을 좋아한다. 수영을 좋아하고, 그래서 바다를 좋아하는 것만큼 비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 바깥양반은, 맑은 하늘을 좋아해서 하늘색을 좋아한다. 바깥양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여행 와서 흐린 날씨를 보는 것. 확률적으로는 언제나 날씨는 흐릴 가능성이 있는데도.

 근본 기질이 이리 다르니 바깥양반과 여행을 같이 다니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상당히 유별한 경험이다. 여행 일정과 코스는 나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정말 이따금 의견을 제시하고, 받아들일지 말지는 바깥양반이 정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부부여행은 거의 모든 것이 나의 인지의 바깥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체험인 것. 나에게 길은 면이기 때문에, 바깥양반의 점에 따라 그려지는 선만으로도 얼마든지 즐겁다. 이를 테면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베르겐으로 향하는 기찻길은 내게 가장 인상깊은 여행 중 하나였다. 피요르드 투어가 예약이 풀이라서 안타깝게도 기차만 타는 심심한 경로였는데도 나는 그날 본 풍경을 잊지 못한다. 그 또한 바깥양반 덕이다.

 물론, 나라고 고집이 없지 않고 심지어 주관은 심각하게 확고한 편이라 바깥양반이 무리수를 쓸 때마다 버겁고 화가 난다. 왜 이런 동선을 짤까, 왜 이런 지출을 할까 화가 나면 그때 그때 바로 말해버린다. 그러나 다시, 그 다음 일정은 전적으로 바깥양반의 것으로 둔다. 해외여행이 나에게 특별한 가치를 갖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깥양반에게 맡기고, 일절 관심은 두지 않으며, 피드백을 할 뿐. 바깥양반도 내가 여행 와서 잔소리 할 때면 군소리 없이 듣는 편이다. 그만큼 내가 모든 걸 양보하고 있는 걸 잘 알아서다. 바깥양반이 싫어하는 건 내가 여행에 집중 안하는 것인데 교육 관련 글을 정말 화창한 날씨에 아름다운 멜버른 강가의 카페에서 쓰는 바람에 여러번 재촉을 당했다.

 커피를 전혀 못마시는 카페덕후인 바깥양반은 나를 자신의 점으로 이끌고, 커피를 좋아하지만 사람 많은 카페는 질색인 나는 그 점을 잇는 선을 따라 면을 감각한다. 서로 안맞는 것이 너무나 많지만 특히나 여행은 정말로 너무나 다르기에 가능한 공존이다. 심지어 바깥양반은 나의 페이버릿 푸드인 순대국은 냄새조차 못맡는다. 못난것 같으니. 그러면서 뭐? 부산 가면 돼지국밥은 꼭 먹어? 어엉!

 이러한 나와 바깥양반의 공존에는 무척 이로운 효과가 하나 더 숨어있는데, 나는 여행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양보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언제든 내가 바라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원래부터도 서로의 자율성을 무한정으로 보장해주려는 나와 바깥양반이지만 해외여행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내가 빠깥양반에게 전적으로 부여하는 자율성은 곧 나의 막강한 무기가 된다. 양보는 공짜가 아니라서 나는 얼마든지 바깥양반에게 져주고, 대신에 몇가지 원하는 것을 따낸다. 여행이 끝나면 게임부터 몇개 사야지. 그리고 바깥양반에게는 귤 좀 까보라고 해야겠다. 아직까지는 나는 바깥양반이 바라는 여행을 거절한 적이 없고...바깥양반은 내가 게임하는 중에 귤 까달라고 말한 것을 거부한 적이 없다.

 오늘은 시드니에서의 3일 중에 가장 좋은 날씨였다. 내일부터는 비가 온다고 한다. 하루종일.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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