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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07. 2020

비 오는 시드니에서 <동네 한 바퀴>

레인 드랍스 폴링 온 마이 헫

 호우 소리에 나는 설레었다. 우산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기대하며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가, 아차 이정도 비가 하루종일 오는데 달랑 반팔 반바지면 위태롭겠다 바깥양반에게 양해를 구해 방으로 올라가 후드집업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기대를 져버리지 않은 빗소리와 촉촉함, 그리고 고즈넉함이 우산을 타고 흐른다. 딱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다. 쉴 새 없이 우산을 두드리는 생동력, 그리고 딱 좋은 습도와 온도. 시드니의 네번째 날에 나는 가장 두근거렸다.

 우산을 들고 한적한 주택가를 걷다보니 노래가 절로 나왔다. 윤종신의 <동네 한바퀴>. 계절의 냄새가 열린 창을 따라서, 는 아니고 호텔의 창문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못질되어 있었다. 다시, 계절의 냄새가 열린 우산 아래로 내게 다가오고, 기다란 관목들이 가로수를 형성한 시드니의 거리에서 우리는 늦은 브런치를 먹기 위해 천천히 걷고 있다. 바깥양반은 오늘도 충실한 카페투어를 계획해두셨다. 비가 오니 오늘은 내가 길을 안내하기로 했다. 여행 내내 길치인 바깥양반이 나의 방치 속에서 열일을 하셨다.

 오늘 두번째 일정인 Single O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나는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차양 아래로 비를 피하며, 거리의 빗소리와 동동 튀어오르는 빗방울이 발가락을 스치는 여유를 정말 오랜만에 즐겼다. 어른이 되고서 이런 시간은 좀처럼 갖기 힘들다.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지만 그 일이 실제로 생길까봐 외출을 할 때 샌달을 신을 수도 없다. 사실 방금 양말을 벗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양말에 운동화를 끌고 나왔고 호우는, 신발과 양말을 단숨에 삼켜버린 참이다. 나는 우간다와 코스타리카, 그리고 콜드브루까지 세 가지 다른 커피를 단 돈 5600원에 제공하는 훌륭한 메뉴를 시켜 앉아서, 이번 여행의 최고의 시간을 보낸다. 비와 다양한 차, 그리고 사색의 시

"아 빡쳐 안에 자리 많은데에!"

...간. 야 하필 지금 빡을 채우니.

"아니 난 비 오는 거 완전 좋은데? 지금 완전 행복한데?"
"아오 어제도 밖에서 저녁 먹다가 내 머리에 물 튀었잖아."
"그거 얼마나 즐거운 경험이야 바깥양반."

 나는 웃으며 커피 향을 음미한다. 바깥양반은 계피향 과자를 부수어 만든 라떼 음료와 바나나 브레드란 것을 같이 시켰다. 커피를 시키면 종종 같이 제공되는 계피향과자 그대로의 맛에 웃음이 나왔다. 바나나 브레드는, 달짝 지근하니 바나나의 풍미가 꽤 유별하다.

"여기 원두도 좋다는데 이따가 좀 사갈래?"
"음...좋긴 한데 원두도 나름 신선식품이라. 캄포스에서 500그램이나 산 것도 다 먹으려면 좀 걸릴거야."
"그럼 이따가 라떼 한잔 더 마셔 여기가 진짜 오빠 입맛이야."

 호주의 특이한 점은 정말로 우유가 남아도는 낙농업국가다 보니 라떼가 일반 커피 라인과 가격이 같다. 이채롭게도 아이스커피들이 1600원 정도 비싸고,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호주에선 롱블랙), 라떼와 카푸치노, 플랫화이트(보통 우린 아이스로 먹는데 여기선 같은 용량의 핫커피가 주류다.)가 모두 가격이 같다. 그래서 실컷 라떼를 즐기는 중이다.

 이틀 전 본다이비치의 화창한 하늘을 보고서 수영 준비를 안해왔으니 날씨가 좋으면 다시 오자고 정해두었으나 이정도의 비라면 영 가망이 없다. 내일도 호우 예보다. 오늘 같은 비가 내일도 내린다면 얌전히 수영은 포기다. 사람 구경을 포함하여, 실컷 눈요기는 했으니 본다이비치에 미련은 없었다. 대신 평범한 바깥양반과의 해외여행으로 오늘은 5개 정도의 카페를 가기로 했다. 그런데 Single O에서만 드립커피 200그램, 콜드브루 100그램에 라떼 200그램을 마셨으니, 한 군데 카페에서 하루치의 카페인 적정량은 훌쩍 넘어있을 것이다. 덕분에,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난다. 호텔의 창은 저 멀리 시드니의 하버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 꼭대기를 비추고 있다.

 계속 <동네 한바퀴>를 흥얼거리며 다음 카페로 이동한다. 비오는 날엔 윤종신의 음악이 딱인데 여행중이라 함부로 이어폰을 귀에 꽂진 못한다. 카페에 앉아 글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깥양반은 마뜩찮아한다. 그래서 혼자 같은 구절을 외고 또 욀 수 밖에. 번화가를 지나니 한가로운 주택가가 나오고, 약간 슬럼처럼 보이는 곳이 나오더니 그길을 지나니 또 활짝 열린 공원과 아름다운 거리다. 조금 걱정스럽던 길이 다시 호기심으로 채워진다. 한적하기 그지없던 길 저 멀리 트램이 보인다. 잘 됐다 오늘 꽤나 비를 맞았으니 커피투어와 함께하는 산책이 끝나면 돌아갈 땐 트램을 타고 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볼 수 있을 테다. 트램을 타고 비를 볼 생각을 하니 또 마음이 풍요로

"아아아 내일 불꽃놀이 봐야하는데."

...워진다. 아 거 참.

"일단 가봐야지 뭐. 비 오면 안할라나?"
"모르지. 형한테 물어봐."
"참...비도 안좋아하면 이렇게 걷는 코스는 안 다닐 법도 한데."
"아 그래도 카페는 다 가야지."
"난 비오는 거 좋아."

 세번째 카페에 앉았다. 정말로 한적한 주택가의 한적한, 테이블이 고작 6명 자리 뿐인 로~~~컬한 빵집이네. 나는 지금까지의 비에 젖은 생각들을 타이핑하기 시작한다. 좋은 날씨다. 즐거운 시간이다. 저 멀리로 초등학교가 보인다, 색색의 우산을 쓴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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