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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05. 2020

삼색전에 고구마를 갈아서 부쳐보자

그리고 삼색나물과 바깥양반의 생일상

 바깥양반의 생일 전날 장을 보며 삼색전과 삼색나물 재료를 골랐다. 삼색나물은 시금치, 숙주, 고사리로 하기로 했다. 냉동실에 숨 쉰 채로 발견되었던 고사리가 있으니 나머지 둘을 사고, 삼색전은 김치로 하나가 있으니 나머지 재료로 우선은 호박이다. 애호박 하나 있으면 언제든 뭐든 할 수 있지. 애호박은 충분히 끓여 채수를 내 오X어X뽕 같은 해물 베이스 라면을 만들어도 정말 맛있다. 흰색 전은 당연히 감자를 사야지 하고 감자를 찾았는데 이런. 박스 포장은 싼데 낱개는 가격이 좀 쎄다. 고민이 아니될 수 없다. 일단 사서 이것저것 해먹을까. 안그래도 양력 그믐 날에 장모님께서 갈치를 사서 주셨는데...갈치조림에 감자면 바깥양반이 눈에 불을 켜고 먹을 것...인데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쇼핑가방을 안챙겨왔다. 차도 안타고 왔다. 에이 박스포장은 실패다 하고 감자를 낱개로 담기 위해 비닐봉지를 좍 뜯는 순간...


 역시 예전에 장모님이 주신 고구마가 생각났다. 아하 고구마. 고구마로 흰 전을 꾸미면 되겠구나. 그런데 또 문제가 있다. 내가 고구마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구마의 식감이 생일상에 올라온 전이든, 차례상에 올라온 전이든 전체 밥상에 어우러지지 않다고 나는 감각하고 있다. 게다가 으레 껍질 째로 잘라서 부치는 감자전은 완벽히 제거되지 않은 뿌리 눈이라도 있으면, 그 뿌리 눈을 씹는 것은 으엑. 지금까지 맛있게 먹은 다른 음식들의 인상마저 확 바꾼다. 역시 감자를 사야 하나 하다가 잠깐만, 어차피 감자는 갈잖아. 그럼 고구마도 갈면 되겠네? 라는 생각을 했다.


 유레카! 고구마를 갈아서 전을 부치면 요리를 하는 나도 재밌고, 내가 싫어하는 고구마전의 식감도 피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괴상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구글에 "고구마전"을 검색했는데 100이면 100 모두 잘라 부친 전이 올라와 있다. "고구마 갈아서 전"이라고 검색하자 성공이다. 다른 사람들도 고구마를 갈아서 전을 부치는 괴상한 짓을 해보고 후기를 올려뒀는데 그럭저럭 성공인 모양. 옳거니 하며 나머지 장거리를 보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바깥양반 생일상의 첫 요리로 당연히 고구마를 잡았다. 바깥에 둔 지 두어달 된 고구마는 군데 군데 썩어있어서 손질이 좀 고되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삼색전에 꾸밀 약간량이라서, 중간 사이즈 감자 정도 분량만이 필요했기에 고구마 하나를 손질해 썩은 부분을 잘라낸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강판에 고구마를 갈았다. 감자보다 입자도 크고 섬유질이 억세 훨씬 갈기 어려웠다. 손을 다칠까 조심조심 갈아내고 끝부분은 버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신선도가 낮아서 그런 것일까? 흰색의 고구마가 초고속도로 산화되면서 티티한 녹색 빛을 띄고 있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속살이 하얗던 고구마가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청개구리 등짝과 같은 색상을 띠고 있다. 어쩔 수 없지. 틀렸다 싶으면 다른 고구마로 다시 해보자 하고 물과 부침가루를 넣어 함께 버무렸다. 그런데 처음 해보는 것이라 또 난해하다 싶은 부분이 생겼다. 찰기가 전혀 없다. 부침가루를 더 넣어 버무려봐도 마찬가지다. 이 이상 부침가루와 물을 부었다간 고구마와 부침가루가 주객이 전도되겠다 싶어 일단 부쳐보기로 했다.  

 

 팬에 기름을 조금 과하다싶게 두르고 고구마 간 전을 부치기 시작했는데 역시 찰기와 수분이 충분하지 못해 톡톡 자리를 옮기는 뒤집개질에도 부스러진다. 다음엔 녹말가루를 넣어야 하겠군. 아기를 다루듯 조심조심 가장자리를 다듬어 올렸다. 간신히 익어간다. 우선 고구마전은 그대로 두고 다른 일을 시작한다. 반죽 그릇을 행궈내고 호박을 잘라 넣어 다시 반죽을 했다. 시금치와 숙주를 차례로 손질해 데칠 준비를 했다. 좁은 싱크대가 삼색나물과 삼색전 준비로 잔뜩 비좁아졌다. 냄비에 물이 끓기 시작해 소금 약간, 그리소 시금치를 먼저 넣었다. 시금치에서 잘 우려낸 녹차잎파리같은 콩 냄새가 피어올라 주방을 채웠다.


 잡채를 할까 말까. 지금 있는 재료에 잡채만 한 줌 삶아서 비비면 된다. 수고는 필요하지 않고 다만 시간이 상당히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상은 푸짐해지겠지만 남을 수 있다. 일단 잡채는 생각하지 않고 고구마전을 조심조심 뒤집었다. 귤과 비슷한 지름으로 다섯개가 팬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세장은 뒤집는데 성공했고, 두장은 뒤집다가 허리가 꺾였다. 고작 귤 사이즈의 부침개가 뒤집어지지 못하고 부러질정도로 간 고구마는 찰기가 없다. 녹말이다. 답은 녹말이야.

 

 딱 하나 고구마전 말고는, 나머지 음식들은 대체로 성공이다. 나물을 처음 무쳐보는 것이지만 세상 나물 무치는 것만큼 쉬운 것이 없으니. 마늘을 넉넉히 빻아서(통마늘을 얼려서 그때 그때 빻아서 쓴다.) 시금치와 숙주에, 소금 약간, 들기름 넉넉히 올린 뒤 함께 버무렸다. 아 조금 짜다. 아니 상당히 짜다. 밥 반찬으로 먹기엔 나쁘지 않다. 하루 이틀이라도 보관을 더 할 수 있겠다. 그래도 단숨에 먹어치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고구마전이 다 익은 것 같아서 접시에 세장을 담고 부서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맛있다! 생각보다도, 훨씬 맛있다. 나는 다른 한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들고 잠들어 있는 바깥양반에게 갔다.


"바깥양반, 아 해봐."

"웅...아."

"먹어봐."

"음, 음."

"맛있지?"

"응."


 나는 다시 나머지 한조각을 가지고 왔다. 이번엔 바깥양반이 일어나 허리를 세웠다. 조심히 후후 불어서 입에 넣어줬다. 한입에 넣기엔 조금 커서 대추만큼을 이로 잘라낸다. 내가 손으로 받쳤다가 바깥양반 입에 다시 넣어줬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부지런히 생일상 준비를 마친다. 작년엔 엄마가 불고기며 나물이며 며느리 첫 생일이라며 만들어서 주셨는데 이번엔 용돈으로 대신하셨다. 그 노고를 내가 하는데 대신에 작년엔 잡채를 내가 했고, 이번엔 잡채는 조금 고민이다. 그래도 주말 아침이라 여유가 있어 다행이다. 이번에 한 김장김치도 개시해서 썰어냈다. 이틀전부터 푹 끓여낸 미역국에 마늘 빻은 것을 넣어 마무리. 오래 끓여서 조금 짜지만 미역이 부드럽게 푹 우러나고 고기도 이에 걸리지 않게 잘 익었다.


 바깥양반이 침실에서 나오기에 잡채를 할까 물었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 마음이 가뿐해졌다. 구색으로 따지면 장수를 비는 면 요리도 갖추는 것이 좋지만 뭐 어떠랴. 삼색나물과 삼색전을 올리고 불고기로 생일상을 마무리했다. 생일 아침 상이다.


 내가 결혼하기 두 세 해 전부터 엄마가 생일 상을 차려주셨다. 그 전까지는 바쁘신 터라 아침상을 해주시진 않았고 나도 그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들이 결혼하고 집을 뜰 시기가 되어 오니 엄마가 진작 못해주지 못해 아쉬웠던 것을 그리 표현하셨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그리고 작년의 며느리 생일상도 준비해주셨고 난 차리기만 했으니. 그저 배운대로 행할 뿐. 작년에 이어 올해도 했으니 내년에도 하게 되었다.


 제대로 밥상에 앉아 가장 먼저 고구마전을 먹었다. 고구마에서 당분이 흘러나와 맛탕처럼 양면이 코팅된 식감이다. 설탕은 당연히 넣지 않았는데도 코팅된 설탕이 입에 들어가는 식감이 신비롭다. 단지 자르지 않고 갈아서 부쳐낸 것만으로도 이렇게 휘황찬란한 식감의 변화가 있을 줄이야. 바깥양반과 나누어먹으며, 생일상을 비웠다. 나물이 약간 남았고, 나머지 반찬은 모두 비웠다. 바깥양반은 잘 차려진 생일상에 나는 좋아하지 않던 요리를 최상의 요리로 바꾸었다는 기쁨으로 방학을 맞이한지 얼마되지 않은 아침이 넉넉하게 마무리됐다. 이 정도면 바깥양반에게도 나에게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한 아침이다.

밥은 시골에서 보낸 콩+귀리+현미+조+보리+백미+청국장서리태가루로 만들어서 색깔이 몹시 보기 좋지 않지만 맛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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