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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n 11. 2019

<기생충>의 서사적 예술성

700만 돌파했으니 스포 듬뿍

0. 전제되는 것.

​미디어 제작은 섬세한 작업이다. 우선은 큰 자본이 들어간다. 말의 값은 싸지만 말을 많은 사람에게, 왜곡과 오해 없이, 시간적 격차 없이 전하는 값은 매우 비싸다. 게다가 왜곡이 없다니. 한줄을 번역하는 것도 어려운데 하나의 미디어 작품을 만들어 제작자의 의사를 정확히 수용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또 얼마나 고단한가? 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다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이라는 대단히 까다로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발전해온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이, 상업자본과 결합하면서 영화라는 하나의 고유의 영역을 고축했다. 뉴스, 다큐멘터리보다도 영화는 비싸다. 우선 제작에 수십에서 수백의 인적자본이 투자된다. 그런데 이게 필수적인 미디어행위도 아니다. 취향과 여가. 취사선택의 대상이기 때문에 미디어로서 경쟁력을 갖기 위하여 물적, 인적자본을 투자하여 보다 많은 대중에게 선택될 수 있는 방향을 추구하며 발전해왔다.

​그 과정에서 영화의 양식과 장르적 문법이 정착됐다. 2시간 내외의 러닝타임. 나레이션(설명)을 최소화하고 시각적으로 표현해 관객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면과 캐릭터들, 기승전결의 서사에 맞물린 시각적 클라이막스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고 느끼는 하나하나는, 수십에서 수백명의 손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백여년간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쌓아올린 거대한 조약돌로 이루어진 바벨탑이다. 불교 용어인 '중생'이 '짐승'으로 변해 우리 국어의 표준어로 정착했던 것처럼, 영화의 문법은 우리가 합의하고 있는 전 지구문명적 공통소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또한 그렇다.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편의 영화를 보며 우리는, '이것이 영화 매체가 갖고 있는 보편성이구나'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형성한다.

1. 그런데 빠져있는 어떤 필수불가결한 서사적 요소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다루어여 할 것이 있다. 미디어 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이다. 사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보다 '무엇을 이야기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 재미있게도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내용은 부차적이다. '무엇을 말하는가'보다는 말하는 사람, 말하는 상황, 말하는 사람이 전하는 의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 등이 커뮤니케이션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반어법, 은유법 등은 말하는 바를 감춤으로써 드러내는 표현 양식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메세지라면 동시에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것 또한 메세지이다. 예를 들어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외계인이 침략해오고 히어로들이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뉴욕 도심은 수천명의 사람들이 희생될 수 밖에 없는 대참화를 겪는다. 그리고 영웅들이 승리한 뒤에 조용한 골목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 희생된 사람들은 어디 가 있는가? 2시간으로 제한된 영화의 미디어문법과 기승전결의 서사구조에서 이들 희생자들이 조명될 수는 없다. 평범한 희생자들이 겪은 참극은 그렇다면 어디로 가는가. 이를 역으로 활용한 것이 <캡틴아메리카:시빌워>와 <스파이더맨:홈커밍>의 서사다. <시빌워>는 울트론이 일으킨 소코비아 참극의 희생자가 가족의 복수를 위해 히어로들의 내전을 일으키는 서사이고, <홈커밍>은 뉴욕사태를 처리하는 대행업체의 대표로부터 서사가 시작된다. 이들 영화는 영웅서사가 결여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이 어떻게 메세지화되고, 그것을 보상할 방법을 찾아야 할지 꽤나 잘 이해하고 쉽게 활용한 예다. 비록 망한 영화지만 <슈퍼맨V배트맨>도 그러한 케이스였다. 연출적으로는 이쪽이 훨씬 '배제된 서사'를 잘 활용했다.

마찬가지로, <기생충>에는 어떤 장면들이 결여되어 있다. 이 영화에 대하여 호불호와 논란이 적지 않은데,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에는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서사와 그로 인해 촉발된 불편함이 꽤 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이 의도된 서사의 결여를 통해, 영화의 예술성을 탁월하게 신장시켰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무엇을 이야기하지 않은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보다 중요하다.

2. 배제된 장면들 :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평범성

<기생충> 중반부. 네 가족의 침투가 완수되고 마침내 완벽히 기생에 성공한 그날밤, 이들은 집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자기들의 잠옷까지 입고 샤워실이며 소녀의 침대며 잔뜩 더럽히고 어지럽히며 주인행세를 한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상당히 지루한 대사를 이어간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강하게 거북함을 느끼는 장면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난잡함과 지루함도 문제거니와, 그들이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반지하, 오줌냄새, 필라이트, 와이파이 구걸로 공감과 동정은 한껏 일으켜 놓고, 왜 감독은 이 네사람을 한순간, 비인간으로 표변시키는가? 게다가 바깥에 비가 온다. 당연히 관객들은 알고 있다. 집주인이 들이닥치고, 파국에 이를 것임을. 그런데 어째서 네 가족 누구도 염려, 걱정 따위 하지 않는가? 단지 술 때문에?

관객이 느끼는 불편함이 곧 우리가 받아들여온 영화적 문법이다. 저 네 가족은 '일반적 인간'으로 묘사되어 왔고, 우리는 합리적인 선에서 그들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집주인이 집을 비우고, 그들이 주인행세를 하는 것까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는가/혹은 판단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가? 빗속 음주 대화 장면은 안그래도 상황도 불편해서 빨리 해소되었으면 좋겠는데, 주인공들은 불편하고 기괴해보인다. 영화가 결여한 서사가 만들어낸 감정이다.

<기생충> 후반부. 집이 물에 잠기고 패배감과 모멸감만 가득 품은채로 가족은 체육관에서 몸을 뉘인다. 그리고 이들이 다음에 등장하는 장면은 각자 흩어져서 집주인 일가와 함께 있는 씬들이다. 얼핏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나, 영화의 서사문법으로서는 결여된 것이 있다. 파티 연락을 받고 난감해 하는 장면이다. 자연스러운 연출을 상정한다면, 해당 시퀀스는 다음과 같이 이어져야 한다.

- 집주인 일가의 파티 계획
- 전화를 받고 난감해하는 아버지와 두 자녀
- 갈등, 난감함, 절망스러운 상황. 옷은? 샤워는?
- 각자 흩어져 외출을 준비하고, 파티에 참여하게 되는 세사람.

이렇게 보여주는 쪽이 주인공 일가의 감정선을 읽기 쉬울 분더러 그로 인해 후반부의 긴장감을 높이고 파티의 참극에서 감정적 고조가 더 컸을 것이다. 파티를 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살해되는 것을(혹은 살해하는 것을) 피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주인공 가족과 함께 극에 몰입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비에 침수된 상황에서 담배를 천장에서 꺼내 변기에 쭈그려 피우는 씬은 공들여 찍어놓고는, 왜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할 갈등은 감추었는가?

3. 말하지 않음으로써.

<기생충>의 두가지 의도된 생략을 통해 감독은 관객을 주인공 가족 일가로부터 멀찍이 떨어트려놓았다. '더 가까이 오지마, 거기서 봐'라는 신호다. 유머와 매캐한 연기, 오줌을 뒤범벅해 도입부에서 꽤나 섬세하게 가난을 묘사하고 캐릭터들에게 정을 붙이도록 했지만, 계급적으로 명백한 약자인 이들에게 집중하게 됨으로써 영화 전체의 주제의식과 서사가 관객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을 막아두었다. 그는 <설국열차>를 제작하며 이번 영화의 각본을 떠올렸다고 하는데, <기생충>에서도 거대한 저택과 반지하, 상승과 하강의 반복된 강조를 통해 빈자와 부자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공을 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관객들이 주인공의 편을 들고, 그들의 시각으로 영화, 그리고 한국사회와 전지구적인 계급구조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고 가족들이 술에 취하며 '비인간적 발상과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우리는 마치 차가운 빗물이 등골에 쏟아지듯, 감정이 차갑게 식고 오싹해짐을 느낀다. 가까운 사람이 돌변하는 공포감, 혹은 어두운 밤길에 가로등 아래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우뚝 서 있는 누군가를 볼 때의 섬찟함. '저것은 내가 알던 사람인가' 혹은 '저것은 인간인가'. 이것이 <기생충>의 서사적 예술성이고, 그 탁월함이다. 영화 <기생충>이 완성되는 지점, 그리고 '기생충'으로서의 이 일가가 완성되는 지점은 이들이 가진 인간적 판단기준의 결여다. 이들은 생존과 번식 이외엔 어떤 판단의 규범이 없다. 판단을 미룬 것이 아니라, 내재하고 있는 생각의 잣대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 아들과 소녀의 키스 장면을 생각해보자. 자신을 믿고 부잣집 과외를 소개시켜준 친구가 소녀에게 갖는 호감을 아들은 단 1초라도 생각했을까? 그 뒤에 친구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가 있는가? 전혀 없다. 번식과 생존 이외에는 무엇도 이들 가족에게 행위의 동기가 되지 못한다.

후반부의 '전화를 받고 고민을 하는 장면'의 묘사 없음도 판단기준의 결여로 읽을 수 있다. 관객은 당연히 침수로 엉망이 된 주인공 일가가 집주인의 부름을 받고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해한다. 관객 역시도, 저택에서 탈출하고 기나긴 터널과 계단을 지나 침수된 집에 도달하면서, 역시 빗물에 잠기듯 절망감을 맛본다. 그런 감정에 다스릴 시간도 없이, 어느새 관객은 아버지, 아들, 딸, 어머니와 함께 저택에 다시 소환되어 있다. 그러나, 출근해 파티에 협조하라는 집주인의 부름을 받고서 이것을 받아들일지 말아야 할지는 그들에게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기생충은 숙주의 몸에서 떠나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갈등과 내적 고민은, 이 시점에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봉준호는 어쩌면 현실에 이미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명확히 알지 못했던 기생충 인간을 완벽히 창조해냈다. 침투해 번식하고 암약하여 공존하는. 그러나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판단규범과 윤리적 기준 자체가 결여된.

이러한 의도적 서사 배제, 그리고 다른 여러 연출 기법을 통해 영화 <기생충>은 계급갈등의 통속성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성찰을 도모한 예술의 단계로 나아갔다. 이야기를 서사의 틀에 가두지 않고 폭넓은 주제의식을 담아냈으며, 인간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부자와 가난한 자의 욕망과 생리를 생생히 드러냈다. 결말의 두 장면, 아버지의 살인행각은 기생충으로서 번식과 생존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감각했으면서도, 인간이기 이전에 하나의 존재로서 존중받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마저 무너졌을 때는 거리낌없이 숙주를 죽일 수 있는 괴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살인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나는 계급적 구도보다는 냄새로 인한 멸시적 감정과 자괴감에서 드러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가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한다.)

4. 여담

포스터에 대하여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눈가리개는 왜 붙인 건가요? 봉준호가 반복해서 만들어내고자 한 소격효과의 연장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듯싶다. 각본만 읽고서 작업을 했다는데, 각본만 보고도 감독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낸 김상만 감독도 대단한 감각을 가진 사람인듯하다. 눈가리에로 가려진 아이덴티티처럼, 주인공 가족과 집주인 모두 그 누구도 아니며 누구나가 될 수 있는 우리 인간 그 자체임을 말하는 괴물같은 영화를 보고 명쾌하면서도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말하고, 감추고자 하는 바를 모두 감추어 이토록 명확히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터는 얼마나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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