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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25. 2020

더 많은 여성권력을 위한 여성정치가 필요하다

n번방에 관한 짧디 짧은 생각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광범위한 여성주의적 각성은 그러나 메갈리아로 모아지고 메갈리아의 틀에 갇히며 끝났다. 한국사회의 성차별적 구조 문제는 메갈리아에게 복제된 남성들의 폭력성에 대한 논쟁의 뒤안길로 스러졌고, 많은 당사자들은 "미러링"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제를 맴돌며 충돌하다가 흩어졌다. 말을 걸기 전에 서로가 귀를 막고 있을 것이라 확신을 했고, 말을 혹시라도 나눈 이들은 대다수가 침을 뱉으며 흩어졌다. 대화와 성찰이 부족하거나 심지어는 부재한 사회에서 차별을 바라보는 각자의 입장이 쉽사리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리가 없지만, 2016년과 그 후의 일련의 상황은 심각하리만치 허무했다. 박근혜의 탄핵과 그 이후 이어진 조기대선, 그리고 두번의 전국선거를 거치는 와중에 2016년의 여성들의 각성된 대화와 에너지는 온데 간데 없다. 그저 모두가 살얼음판 위에 올라 있을뿐.


 메갈리아는 지금에 이르러도 너무나 논쟁적인 주제인 탓에 거듭 언급하는 것이 스스로도 그리 탐탁치는 않다. 항상 성차별과 성폭력의 가능성을 인지해야 하는 남성으로서 그런 과정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으니까. 나 자신이 여러 "여성주의" 지지자들과 논쟁을 하다가 맨스플레인이라느니 "페다고기 발화"라는 듣도보도 못한 개념으로 프레이밍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의 기억을 지금 되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결국 한국사회는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모였던. 그리고 그렇게 모인 목소리가 여지없이 혐오와 편가르기를 향해 흩어졌던.


 n번방의 모든 가담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이 300만명을 넘어서고, 전격수사로 주동자의 신분도 신속하게 공개된 지금 내가 2016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 때문이다. n번방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은 한국의 성차별적 구조를 타파할 수 있을까? 6만명이 여러개의 채팅방에서 연인원 26만의 회원 규모를 이루어 범죄를 공모하고 가담했던 것이 한국의 성차별적 구조 없이 가능했을까?


 사건의 규모로 보았을 때 강남역 살인사건보다는 n번방 사건이 훨씬 거대하고 죄질도 훨씬 크다. 한국 사회의 성차별 문제, 그리고 성윤리 문제를 근본적으로 살피지 않을 수 없는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모순이란 모순은 죄다 누적되어 "헬조선"이라 불렸던 2016년과 민주화가 진전되고 촛불시위로 에너지도 한바탕 해소된 2020년의 보다 발전된 상황 탓인 걸까. 아니면 단지 코로나 때문인 걸까. 2016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논쟁은 소멸되었고, 여성인권의 진전을 위한 목소리도,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 논의도 사라져있다. 도대체 어째서일까. 고작 총선이 20여일 앞인 지금.


 반복되지 않을까?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n번방의 자료를 구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웹을 떠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몇몇 친지들과 텔레그램으로 아직 소통을 하기 때문에 어플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난 주말 한꺼번에 여럿이 텔레그램을 가입한 것을 보았다. 타자화의 장막에 숨어 호기심의 손을 뻗는 게다. 이러한 현상이 아니더라도, 다수의 남성에게 있어서 이번 사건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 집단인 "일베" 유저들이 다수 가담하고 주동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타자화하고 자신과 선을 그을 수 있다. 정상적인 사회인의 정상적인 심리적 방어기재일 뿐, 탓할 문제조차 아니다.


 그런 탓에 두려운 것은, n번방 사건으로 여성들의 에너지는 결집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자애로운" 남성 권력자들의 엄격한 단죄 절차를 거치며 분노는 해소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일베를 단죄하는데 모두 동의한 정의로운 평범한 남성들, 그리고 여전히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매일 품고 살아야 하는 여성들, 그리고 여전한 메갈리아에 대한 혐오 정도가 n번방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충격적인 범죄자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까지 우리 사회의 성차별은 감추어지고, 서로를 비판하고 비난하던 열기는 냉각을 유지한다. 살얼음판 위에서.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피해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n번방의 범죄가 아닌 우리 사회의 구조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다시 논쟁해야 한다. 2016년의 열기를 소환해서라도 말이다. 충분히 자애로운 남성권력이라 해도 그들이 프레이밍한 세상에서 소수자와 약자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다. 급진주의자들은 항상 이상과 불가능의 틈새에서 다수로부터 배척되곤 했지만, 그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는 항상 인식의 공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불관용과 비타협의 태도는 사회구조 수준의 논쟁에서 언제든 유용했다. 그리고 어쨌든, 메갈리아는 그런 역할을 했고 그 토대에 2020년의 성차별은 2016년 이전과는 다르니까.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나는 폭력에 대한 엄격한 단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혹 권력의 문제라면, 나는 그 권력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차별의 결과로 발생하는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보다는, 차별 자체를 없애는 방법이 논의되고 실천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급진적이든 이상적이든 말이다.


 그리고 차별을 없애는 방법을 권력의 문제로부터 찾아내는 것은, 기실 조금도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방안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2차 세계대전 이래로 가장 정권교체가 활발한 나라에 살고 있지 않은가. 가장 많은 시민혁명을 성공시키고,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확보해온 나라가 아닌가. 투표와 운동으로 국가권력을 몇번이나 뒤엎은 시민들이, 그 땅에 살고 있는 여성들이 여성의 권력향상과 여성의 정치집단화를 여전히, 2016년의 경험을 거치고도, 아직도 현실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너무나 명쾌한 해답으로 내게는 보이는데도 말이다.


 메갈리아에 대한 나의 나쁜 평가 역시 바로 이것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한다. 2016년의 여성들의 각성된 에너지를 메갈리아는 고작 미러링이라는 방식으로 소진했다. 차별의 결과를 복제한 것이다. 차별의 원인을 소거하는 데에는 진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온 여성들이 모아준 종자돈을 모아다가 탕진한 것이다. 메갈리아의 실패에서 배워야 할 점도 그러므로 그와 같다. 그렇게 모아졌던, 그리고 지금도 모아져야 할 에너지를 유지시키고, 확대시키고, 구체화시켜야 한다. 방법도 알고 있고 여러번 연습도 해봤다. 정치. 투표. 권력. 더 많은 여성들의 권력을 위한 더 많은 여성정치. 2016년에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오래된 미래.


 민주정은 투쟁의 장이다. 권력을 민주적으로 부여한다는 것은 총알 대신 웅변을, 창검 대신 선언문을 들고 싸운다는 차이 뿐이다. 사회의 다양한 집단이 각축을 벌여 자신의 이득을 최대한으로 확보하는 과정이라는 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적어도 남성들은, 그러한 투쟁에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물론 이미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는 남성권력이라는 열차에 올라타는 것일 뿐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열차의 선로를 깔아주고, 아니, 선로 밑에 얌전히 누군가가 깔려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폭설이 와도 폭우가 와도 열차는 전복한다. 그리고, 강남역 살인사건이 폭우였다면 n번방 사건은 지진이지 않을까. 열차의 선로가 뒤틀릴만한.


 그러면, 한번 뒤집어보는 것도 좋을 텐데 말이다. 종잣돈 모아줬더니 자기들끼리 다 써버리는 도둑들한테 한번 속았다고 해서 두번 세번 도전하지 말 이유도 없는 것이고 말이다. 민주정의 좋은 점은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린 더는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싸워도.


 대신, 싸움을 멈추면 여성들은 계속 죽어갈 것이다. 남성권력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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