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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y 09. 2018

여자 가방 들어주는 남자

그리고 공존의 모색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바깥양반은 힘이 약하다 보니 옷가지가 가득한 캐리어를 끌며 많이 힘에 부쳐한다. 아무렇지 않게 내 캐리어를 싱싱 밀고가다가 오늘은 별 이유도 없이 바깥양반의 캐리어를 받아 혼자서 양손에 캐리어를 밀고 가기 시작했다. 아. 여자 가방 들어주는 남자! 결혼 당시 48kg 몸무게의 바깥양반이 낑낑대며 밀고 가던 캐리어는 결혼 당시 90kg 몸무게의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게 힘들었을까? 나는 줄다리기를 생각했다. 줄다리기는 힘겨루기가 아니라 사실 무게 겨루기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줄을 당기느냐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무게를 당기게 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 결혼 당시 48kg 몸무게의 바깥양반이 미는 캐리어와, 결혼 당시 90kg의 몸무게의 내가 미는 캐리어는 같은 무게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같지 않다. 나는 남자로 태어난 덕분에, 바깥양반보다 훨씬 뚱땡이가 되어두었던 덕분에 캐리어를 훨씬 쉽게 밀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성차별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이 획득한 유전적 형질에서의 신체적 우세가 사회적 기득권으로 이루어진 사회에 태어나서 투닥거리며 같이 산다. 강한 힘과 권력을 생래적으로 쥐고 사는 남자들과, 연약한 육체와 더 적은 권력을 타고난 여자. 남자와 여자가 같은 무게의 캐리어를 밀고 가는 것은 사실은 조금도 공평한 게임은 아니다. 


 물론 이 등식이 현실에서 그대로 통용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각자의 캐리어 속에 나는 훨씬 적은 짐을 넣고 있다. 바깥양반의 캐리어는 여행에 필요한 여러 옷가지들과 이것저것 수집하기 위해 모으는 물건들, 그리고 지인들에게 배분할 선물들까지 온갖 물건들이 들어가 있다. 열흘을 여행한다고 하면 나는 양말과 속옷까지 다섯 세트를 챙겨 중간 중간 손빨래를 한다. 바깥양반은 열 세트를 챙긴다. 이런 식으로, 나보다 훨씬 많은 짐을 챙겨야 하는 터라 바깥양반의 짐이 내 캐리어에도 일부 채워져 있다. 일부? 아니. 많이.


 정리하자면, 우리 부부의 경우 몸무게가 훨씬 많이 나가는 나는 바깥양반에 비해 같은 무게의 캐리어를 절반 정도의 무게로 느낄 수는 있지만 사실 나는 바깥양반에 비해 절반 정도의 짐만 챙겨갖고 온 상태다. “동등하게 혹은 공평하게.”라는 원칙을 적용해본다면 사실 바깥양반이 우리 두 사람 전체의 짐 중에 2/3을 끌고 가야하고, 나는 그 절반인 1/3을 들고 가는 게 맞을 수 있다. 일단 기준선을 여기 세워두고, 내가 어떻게 캐리어를 끌고 갈지를 협의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남자가 느끼는 역차별의 경우들이다. “남자의 평생 기대수입이 여자보다 많으니까 여자들에 비해 많은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남자가 평생 번 돈을 남자가 쓰냐?” 한마디로 간단히 반박된다. 모든 남성은 권력자가 아니다. 모든 여성이 피억압자도 아니다. 권력을 갖고 있거나, 권력이 없는 무수한 남자와 여자가 존재할 따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지난한 성선택의 관문을 넘기고는 길고 긴 세월을 이 캐리어들을 끌며 살아가는 처지인 것이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문제는 남성과 여성들 사이의 대화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캐리어 두개를 적절히 끌고 가기 위해 우리 부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엔 무수히 많은 정답이 존재한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올바름의 여러 기준을 판단해보고, 각자에게 부과되어야 할 무게의 적절성을 논의해보고, 그 후 서로에 대한 추가적인 배려를 생각해내야 한다. 예를 들어 밀 때는 각자 밀고, 들 때만 도와준다거나, 아니면 내 쪽의 캐리어에 60% 정도의 짐을 몰아놓는다거나, 아니면 서로의 캐리어를 바꾸어 민다거나. 이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두 사람 간의 거리 좁히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실제로 우린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2016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여성과 남성의 집단적 충돌은, 내게는 대략 이렇게 비친다. 힘들게 자기 캐리어를 끌고 가던 여자 쪽이 캐리어를 냅다 내던지면서 “XX꺄 네가 나보다 캐리어 쉽게 끌 수 있잖아!” 하면 남자가 “XX야 내 캐리어에 지금 네 짐들 들어가 있거든?” 하고 싸우는 모습. 


 차별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차별은 사람과 사람을 나누는 것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을 막는 것에 본질이 있기 때문에 역차별이 발생하는 경우에 우리는 차별과 역차별 모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적절히 다루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온갖 모순이 뒤섞여, 올바름과 다양한 가치기준을 성찰하기 까다로운 복잡계 그 자체. 그것은 대화의 포기를 의미하고, 부족한 인내심은 분열의 시발이 되었다.


 현실에는 정답은 없다. 나는 마음이 내키면 내가 두개를 끌고 갈 것이고, 바깥양반에게 책임감을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캐리어를 밀고 가라고도 할 것이고, 여행에서 돌아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끌어안고 잠을 청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진 뒤에는, 문제 그 자체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깟 캐리어가 뭐라고. 문제는, 각자의 몸무게, 각자의 짐의 무게와 그것의 배분. 캐리어 이외에 서로를 어떻게 존중하고 배려하는지, 어떤 대화와 소통의 경험을 공유하는지 따위의 문제들. 


 오늘에 이르러 관계도 결혼도 나의 주체성에 비하면 너무 싱거운 것이 되었다. 혼자서 먹는 밥과 혼자 사는 삶의 평온함을 존중하는 것만큼이나, 타인과 나의 차이를 다루는 고단함을 기꺼이 견디는 방식의 삶에도 존중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대화를 시작하고, 조목조목을 열거해보고, 같은 길을 가는 방식에 대해서, 정확하게 그 무게를 따져보고 어떻게 나누어서 끌고 가볼지를 고민해보는 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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