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았다 내가 원하던 맛
이걸 삶아야 하나?
냄비에 퐁당퐁당 뇨끼를 빠트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것을 보며 뒤늦게 생각을 해봤다. 가만 있어보자 지금 뇨끼 반죽에 감자...전분가루...중력분 약간...소금과 파마산가루...데쳐낸 시금치...뿐. 어차피 팬에 올려서 버터랑 익힐 건데, 왜 뇨끼를 삶지?
오늘의 뇨끼로 말하자면 껍질을 까서 통으로 삶아서 건져낸 뒤에 꼬박 하루하고도 하룻밤을 내놓고 말린 것이다. 수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음식을 해 먹다보니 예정보다 하루 더 늦게 만들기 시작했다. 괜찮아. 아직 실온에 둔다고 상할 날씨는 아니고 그런 덕분에 좀 더 감자의 습기를 말려낸 거니까.
겨울에 강원도 감자 대란에 나는 끼지 못했고, 그런대로 5kg에 8천원 가량 하는 감자를 사서 거의 다 먹어간다. 마지막 감자 다섯알 정도를 남기고는 한꺼번에 거의 스무 알의 감자를 까서는- 감자전과 샐러드와 뇨끼로 차례차례 하루에 하나씩을 만드는 중이다. 감자 맛이 아쌀하다. 아, 세 알 정도는 학교에 가져가서 점심으로 먹었다.
그래서 오늘의 뇨끼는 잘~ 마른 감자에, 시금치를 살짝 데쳐서 물기를 쫙, 짜고 다져서 넣었다. 파마산가루 약간, 소금 약간. 숟가락 두개를 들고 동시에 볼을 타다다다닥 치며 감자를 으깨고, 다시 버무리고 섞은 뒤 다시 타다다다닥.
북유럽에서 사 온 치즈가 몇개 있다. 치즈 가루를 갈아내는 강판을 하나 사뒀더라면 오늘 뇨끼에 올릴텐데. 그리고 감자를 으깨는 도구도 있던데 그런 것들이 있다면 지금 수월할 텐데. 잘 삶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거의 이틀이나 말려서 조직이 조금 단단해진 감자를 숟가락으로 으깨는 게 쉽지는 않았다. 뇨끼는 감자조직이 살아있으면 안된다. 전체 반죽 속에 덩어리들을 남아있다간, 자기들끼리 뭉치며 작은 조각을 냈을 때 망가져버린다. 그렇다고 과하게 치대도 안된다. 감자 전분 때문에 떡처럼 끈적해진다. 최대한 가루를 내겠다는 생각으로, 부드러운 감자의 식감을 생각하며 숟가락으로 볼을, 그렇다고 볼이 상하거나 하지 않게 신경쓰면서. 타다다다닥. 아 달고나커피를 만드는 게 낫겠다 싶은데. 그리고 플라스틱 볼에다가 할걸.
시금치를 더 넣으면 좋겠는데 또 양 조절을 잘못하면 바깥양반이 눈썹을 찌푸릴 게 뻔하다. 편식이 워낙 심하다. 1500원 주고 사와서 뇨끼에 넣은 건 단 50원 치도 안될 것 같은데. 남은 건 멸치 넣고 보리새우 넣고 조개 넣고 시원하게 된장국이나 끓여야지. 그래도 딱 이쁜 색감이다. 알알이 뇨끼 사이로 숨어든 초록빛이 곱다. 가만 있자 버터에 볶을 때도 좀 넣어볼까. 비타민을 보충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다. 그냥 두자. 피클이 있으니 곁들여먹으면 충분해.
그런데 계란이 없다. 앗 이건 예상을 못했다. 엊그제 감자 샐러드를 만들 때 남은 계란을 모두 썼다. 황급히 레시피를 찾아보니 계란은 당연히 들어간다네?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전분가루를 두어스푼 넣었다. 계란이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반 알이나 썼을까. 어차피 하우스 레시피인 것이니 내 멋대로 하자. 계란은 포기다. 계란을 포기한 만큼 밀가루를 줄일 수 있다. 좋다. 뇨끼가 좀 더 순수해진다. 대신에 반죽이 퍼지지 않도록 전분을 추가한다. 그리고 전분조차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물을 추가하지 않았다. 감자 안에 남아있던 수분으로 조금 뻑뻑하다 싶게 반죽을 계속했다.
이제 끓여낼 차례다. 내 멋대로 레시피니까 조금 걱정은 된다. 소심하게 한조각만 떼어서 삶아봤다. 오. 성공. 모양이 나빠지지도 않았고, 뇨끼의 맛은 훌륭했다. 다만 두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연달아 열 조각 정도를 삶아내니 감자가루가 아주 조금씩 물에 배어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고, 국산 수미감자의 찰진 조직의 특성으로 강원도 감자떡의 찐득함이 살짝 느껴진다.
이 시점에서 나는 고민을 잠깐 했다. 이걸 왜 삶지? 바로 팬에서 다시 익힐 건데?
내가 최초로 뇨끼를 만들 때 참고한 레시피는 고든램지의 영상이었는데, 그 양반도 감자와 밀가루가 거의 1:1에, 계란도 하나를 통으로 쓴다. 그럼 좀 아쉽다. 감자가 아니라 정말로 밀가루 수제비랑 큰 차이가 없어진다. 내가 원하는 건 감자의 조직이 느꼊는 뇨끼란 말이지. 그래서 지금 내 뇨끼 반죽은 감자와 밀가루/전분가루의 비율이 9.5:0.5에 그나마 계란은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이미 내 멋대로 한참은 비껴난 참이니 조금 더 내 식대로 해보자고. 게다가 길게 뽑아서 하나씩 토막을 내고 무늬를 내는 공정도 생략한 참이다. 어차피 소스를 쓰지도 않을 거거든. 그리고 길게 뽑고 토막을 내는 과정에서 밀가루가 더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지 말자고.
팬에 버터를 넉넉히 올리고 가열을 하며 베이컨을 후다닥 썰어넣었다. 열 알 정도의 삶아낸 뇨끼와, 삶지 않은 생 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어서 모양을 잡고 올린다. 반죽이 간이 잘 되어 있어서 크림소스 같은
것은 쓰지 않아도 된다. 베이컨의 풍미만 있어도 호화롭다. 삶은 뇨끼를 팬에 올려 볶아내는 것은 겉면을 크리스피하게 익혀서 식감을 살리는 공정인데, 삶지 않은 내 방식이 오히려 식감에도 더 좋다. 물기를 머금지 않은 반죽이 바로 버터를 만나 보기 좋게 구워진다. 계란이 들어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약불과 중불을 오가며 바삭하게 구워지도록 살살 볶고 뒤집고 눌러준다. 욕심을 내서 파슬리 가루를 송송. 역시 치즈 강판은 필요할 것 같다. 이 뇨끼는 분명 맛있을 것이고 나는 또 뇨끼를 하고 싶을 거거든. 그땐 치즈 가루를 사리사리 저며서 올려보자.
접시에 뇨끼를 담아내고 피클도 내었다. 바깥양반을 불러서 마주 앉아 입에 넣었다. 맛있다. 공정도 두어가지 줄여서 기분도 한결 가뿐하다. 원래는 꽤나 복잡한 레시피를 자랑하는 요리인데, 다섯번째 시도만에 내 손에서는 삶고, 으깨 버무리고, 손으로 뚝뚝 떼어서 팬에 구우면서 눌러주면 땡인 요리가 되었다. 레시피를 대폭 간소화했지만, 그런 덕에 감자의 함량이 훨씬 올라갔다. 그래서 지금 내가 씹고 있는 이 뇨끼는, 정말로 삶은 감자를 먹는듯 그 감자의 향과 포슬포슬한 차짐이 그대로다. 감자가 90%이상인 반죽이니 당연하지만. 이정도면 굳이 미국산 감자를 찾느라 헤멜 필요도 없겠다. 수미감자로도 충분히 감자 그대로의 맛으로 뇨끼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반죽을 버터에 생으로 올려 구웠으니 맛이 없을리가.
후다닥 바깥양반과 뇨끼를 나눠먹고서 하늘을 본다. 캬 이런 날씨엔, 봄 감자가 역시 딱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