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과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점심을 만들기 시작했다. 낮잠을 자기 전,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통해 본 하늘처럼 화창한 오늘의 메뉴는 열무김치에 비빈 국수.
결혼 뒤 한동안은 주말 아침에도 어김 없이 일어나 끼니를 차렸다. 총각 때 같이 살 때는 아버지는 새벽에 식사를 하고 나가시고, 엄마는 엄마의 바이오리듬에 따르신다. 거의 항상 아침을 혼자 차려먹었고 그 습관은 결혼 뒤에도 잘 유지된다.
바뀐 것은 두가지다. 바깥양반의 기침시간이 유동적이고 내 기초대사량이 예전같지 않다. 예전엔, 꼬르륵 배가 고파 새벽같이 밥을 먹었다. 전날 저녁을 먹고 운동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결혼을 한 지금? 나도 게을러졌고 부부가 함께 저녁에 헬스장을 가 땀을 흘리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에 쉽사리 합의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강도의 업무스트레스를 달고 사는 바깥양반은 충분한 “밤 시간”을 보내야 다음날 출근할 용기를 얻는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한 주의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를 잠으로 푼다. 아침에 나는 보통 혼자 일어난다. 그리고, 밥을 차려먹을까 말까 가볍게 고민한다. 내가 지금 아침을 먹으면...바깥양반이 일어났을 때의 아점과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내키는대로 아침을 먹거나 말거나.
그래 오늘은 아침에 과자를 하나 뜯었다. 며칠 전에 바깥양반이 내가 저녁을 차리는 틈에 과자를 혼자 한봉지를 해치웠는데, 아니 그게 내가 딱 먹으려고 남겨둔 과자였다. 내가 일부러 남겨둔 과자를, 내가 저녁을 차리느라 사투를 벌이는 틈에, 혼자서 한봉지를 다 먹다니. 난 툴툴댔고 다시 그로부터 며칠 뒤에 바깥양반과 마트에 갔다가 과자를 여럿 샀다. 아...근데, 딱 먹을 때를 놓쳐 김이 빠진 터라 맛은 없더라. 어쨌든 그렇게 아침을 대강 해치우고 긴 호흡이 들어가는 글을 반쯤 쓰고, 유튜브를 좀 보다가 낮잠에 들었다. 나 역시 주말의 낮잠이 아니면, 다시 한주를 시작하는 기분이 영 생생하지 못하다.
나의 낮잠보다 바깥양반이 먼저 일어났다. 나는 혼곤한 나름함을 노닐다가, 허기를 느끼며 박차고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잘 익은 열무김치. 시큼하고 시원하게 푹 잠들어 있다.
또 다시 이번에 열무김치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결혼하고 좀 지났을 때인데 냉장고를 정리하다가...어라라? 김치가 담긴 플라스틱통이 뚜껑이 조금 열려있다. 아귀가 안맞아 제대로 닫히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 내가 이 김치를 넣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화들짝 놀라 통을 꺼냈다. 열무김치다. 아삭한 초록빛이 아니다. 팍 익어서 색깔은 티티하고 이파리도 줄기도 영 힘이 없다.
에이...뚜껑이 왜 안 닫혀있었지 하며 낭패감에 열무를 한줄기 잘라 입에 넣었는데,
어?
맛있다.
잘 익은 열무김치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시큼하고 시원한, 풋내가 조금도 나지 않은 숙성된 깊은 맛이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었나 싶은 감칠맛이다.
긴급하게 계획을 바꿨다. 바로 국수를 말았다. 이 열무김치를 두고서 밥상의 주인공을 캐스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위로 김치를 툭툭 쳐서 들기름과 설탕 약간, 그리고 비빔고추장을 대강 버무려두고 국수를 비볐다.
야. 참 이것 봐라?
호들갑을 떨며 엄마에게 열무김치가 이래저래 잘 익었길래 지금 국수를 말았더니 참맛이더라 전했더니 엄마는 한 술 더뜨신다.
“보리밥을 해서 비벼도 뚝딱이지.”
아하! 이튿날 퇴근길에 보리를 샀다. 현미가 섞인 쌀은 아주 약간, 그리고 고슬고슬하게 밥을 지어(물론 내가 짓는 게 아니라 전기밥솥이 짓는 거지만.) 고추장을 넣고 열무김치를 비볐다. 아작아작한 열무 사이로 탱글한 보리가 퉁겨나오는 그 식감. 아. 시원한 된장이 필요하다. 여기에 무생채만 있으면, 또 여기에 어리굴젓 한젓가락이면 얼마나 좋을까. 옛 친구를 만나 추억을 줄줄이 읊어대듯 내 입속에서 온갖 요리들이 춤추며 흘러들었다. 다음날은 애호박을 넣고 된장을 끓였다.
그래. 오늘같은 화창한 봄날엔 열무국수지. 마침 열무국수가 잘 익었다. 김치 윗자락에 낀 유산균마저 아름다울만큼. 다시 열무김치를 탁탁, 국수를 휘리릭, 들기름을 졸졸 초고추장을 톡톡. 후딱이다. 뜻밖에도 쉰 백김치를 어제 엄마에게 받아와서, 그대로 1/4 포기를 탁탁 썰어 김치국물을 붓고 멸치와 황태를 넣어 끓였다. 시원하고 아쌀한 국물도 후딱이다. 삼겹살도 조금 구웠다. 김치가 짜다. 삼겹살에 말아먹어야 간이 딱 맞다.
바깥양반과 봄바람을 쏘이며, 봄햇살을 맞으며 단번에 열무국수를 비웠다. 그리고 우린 햇살을 마저 몸에 받으려 집을 나서 뒷산에 올랐다. 지금 이 글도 사실 산을 오르며 쓴 건데, 이 화창한 날에 바깥양반은 산을 오르며 가다 서다 가다 서다 한다. 덕분에 쉬이 글이 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