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말은 하고 싶었지만
스톡홀름의 호텔에 짐을 풀고 내려와 컨시어지에게 레스토랑을 하나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는 활달한 표정으로 구글맵에서 레스토랑을 검색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미트볼이 유명한 식당이라고. 미트볼? 제대로 먹어본 기억이 없다. 아는 것이라곤 레토르트 식품 속에 든, 구워졌다기보단 쪄진 식감의 탁구공보다도 작은 미트볼. 그리고 생각도 하기 싫지만 군대에서 미트볼이라고 분명히 식단표에는 적혀있는데,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식판에 올려졌던 기억.
그런데 그날 먹은 미트볼은 뭐랄까 새로운 체험이었다. 아 이게 미트볼이라는 요리의 원형이구나. 박피칸(Bakfickan)이라는 식당에서 1인분의 미트볼과 아보카도 샐러드를 주문해 바깥양반과 쉐어했는데, 콧수염을 예쁘게 기른 아저씨가 빵을 한 보따리 들고 와서 원하는 만큼 집으라고 했다. 하루 종일 또 걸으며 물배만 채운 터라 빵일 몇개 집지 못했는데 미트볼이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아. 빵 더 집을걸. 짭쪼름한 매쉬드포테이토, 아삭아삭 피클에, 결정적으로 쇠고기의 육즙이 그대로 우러난 미트볼 소스가 정말이지 고품격의 한창차림이었다.
빵을 찢어 소스에 찍어먹자마자 입 안 전체에 뿜어져 흐르는 그 풍미를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소스에 빵만 찍어먹어도 환상적인 맛인데 미트볼 맛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평생 먹어본 가장 고품격의 소고기 요리였다. 비싼 북유럽의 물가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여행 초반이라 예산을 꽤 깐깐하게 따져야 하는 시점이 아니었다면, 분명 1인분의 미트볼을 추가해 먹었을텐데. 간밤에 배를 타고 스톡홀름에 도착한 첫날의 피로와 몇시간의 도보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이 한접시, 대여섯개씩의 미트볼에 사르르 녹았다. 어쩌면, 그날의 피로감이 더욱 그날의 식사를 멋진 것으로 만들어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퇴근시간에 바깥양반이 미트볼파스타를 신청했다. 한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요리다. 퇴근을 위해 서두르게 일을 마무리하던 중에 저녁 메뉴를 신청하는 바람에 잠깐 고민을 했다. 미트볼 어려운 요리인데. 우선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필요하다. 둘이 한끼 식사를 차릴 정도라고 해도 한번 파는 최소분량을 어느정도로 가늠해야 할지, 간 고기를 살 일이 잘 없어서 고민. 그리고 손이 많이 가는 것도 고민. 까맣게 보일 정도로 시어링이 될 때까지 굽고 구우며 돌리고 돌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구우면서 속까지 잘 익혀야 한다. 모양이 흐트러져도 안되고.
결정적으로, 내가 한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잖아? 나는 속으론 "야 너는 하라면 다...하냐?"라는 말이 삐져나왔지만 못할 건 또 뭐야. 바깥양반에게 퇴근하고 집에 와서 한숨 자라고 말해두고, 업무에 집중했다. 다행히도 나에겐 스톡홀름에서 먹었던 미트볼의 환상적인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어, 내 손으로 그 맛을 재현해볼 의지가 곧 충전되었다. 퇴근길 버스에서 유튜브로 몇가지 레시피 영상을 확인하며, 결의를 다졌다.
고기는 사지 않기로 했다. 엄마가 국거리로 하라고 준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약간씩 있다. 다진다.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린 뒤에 도마에 고기를 탕탕 치다가 타다닥 치다가 도도도독 치면서 다지고 다지고 다지고 다지고 한번 삭삭 긁어, 뒤집는다. 다시 도도독 치면서 다지고 다지고 다지고 다시 삭삭 긁어서, 치댄다. 나에겐 나쁜 버릇이 하나 있는데, 집에 와서 재미있는 요리를 하는 날이면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윗도리만 대충 벗고, 심지어 셔츠를 벗지 않는 날도 있다. 양말에 청바지, 셔츠를 걸친 채로 시계와 반지만 대충 벗어놓고 요리를 하는 남자라면 누가 봐도 매력 있겠지만, 돌아오지 않는 젊은 날의 허리라인을 어쩔꼬. 바깥양반은 과자를 한 봉지 비우고 잠들어 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여유 있게 고기를 다지면서 충분히 입자를 살린 채로, 소금과 후추를 넣는다. 밀가루를 약간, 그리고 큼직 큼직하게 둥근 모양으로 빚어낸다.
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겉면을 먼저 강한 불에 구워 모양을 살린 뒤에 불을 낮추어 속까지 익힌다. 후라이팬에 미트볼이 가득 모여서 구르고 구르는 모양이 이채롭다. 스톡홀름에선 미트볼이 꽤 유명한 음식인 모양인데, 스톡홀름을 주제로 한 컬러링 일러스트 도록에 미트볼이 눈코입을 달고 옹기종기 모여있기도 하다. 하나 사서 집에서 반쯤 칠해두었다. 전체를 칠하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을듯해서.
천천히, 천천히, 겉면이 좀 타도 괜찮다. 시어링이 되어야 풍미가 돌고 속까지 익는다. 미트볼을 만들면서 다진고기를 조금 남겨두었다. 토마토소스에 넣어서 라구파스타를 만들기로 결심. 한참 팔이 빠져라 미트볼을 굴리고 굴리면서 다른 팬을 꺼내 다진고기를 볶고, 토마토소스를 넣어 졸인다. 새로운 요리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나, 오늘처럼 비~싼 재료를 공들여서 조리하는 날은, 심지어 그것이 맛있을 것이란 예감이 확신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관통하면서는.
미트볼을 익힐만큼 익혔으니 라구소스에 넣는다. 돌리고 돌리고 돌린다. 다시 시작. 미트볼에 소스가 충분히 배어들도록 하면서 다른 판에 파스타면을 익힌다. 신혼 때 코스트코에서 산 3종 파스타면 벌크세트다. 바깥양반의 쌀밥충 성향, 나의 프로주부 성향 탓에 파스타가 아무래도 소비가 되지 않는다. 오늘처럼 바깥양반이 파스타를 주문하는 것이 다행한 일일까. 스파게티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먼저 산 파스타들이 소진되기 전까진 아무래도 무리다. 드디어 마지막 단계. 파스타를 익히며 약한 불에서 다시 미트볼과 라구소스를 굴리고 굴리고 굴린다.
그렇게 완성된 미트볼 파스타. 바깥양반의 주문대로 토마토소스에 미트볼이 푸짐하게 올려진, 스톡홀름에서 먹었던 그 풍미를 조금은 흉내낸 음식이 차려졌다. 쇠고기 육즙을 활용한 크림소스는 아니지만, 신혼 초에 한번 도전했다가 실패한 라구파스타에 대한 앙갚음도 이번에 이루어졌다. 당시엔 고기를 잘못 골랐었다. 충분히 다지지도 못해 라구소스가 아니라...마치 라면에 들어간 콩고기 비슷한 고기 알갱이들이 토마토소스에 들어간듯했다. 이번엔, 다지고 다지고 다지고 다져서 치댄 고기가 소스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만족.
밥상을 차리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고 나와 바깥양반과 식탁에 마주앉았다. 엄마가 만드신 간장피클을 꺼낸다. 바깥양반은 편식이 워낙 심해 "반찬"으로서 야채는 잘 먹지 않는다. 김치볶음밥이나 부침개는 잘 먹는다. 억지로 양파와 고추 피클들을 입에 넣어준다. 인상을 찌푸리며 먹더니, 이내 좋아한다. 맛있으니까. 그리고 바깥양반과 나는, 함께 포크를 들고, 동시에, 미트볼을 푹 찔러 반으로 갈라본다. 육즙이 으스러지며 고기를 타고 흘러 라구소스 속으로 스며들고, 잘 익은 미트볼의 속살이 드러난다.
하란다고 해서, 했더니 잘 됐네. 잘 먹었다 오늘 한 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