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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l 10. 2020

글과 사회, 그리고 자아

읽기와 쓰기 사이의 쉼표

 본질적으로 글을 읽히기 위한 것이다. 오로지 나 한사람을 위한 나만의 글이라 해도 그렇다. 매일 매일 쉴 사이가 없이 수만가지의 생각을 하는 한 인간이 특정한 생각과 심상을 언어로 꾸려내는 것은 그것을 언제든 다시 읽고, 읽힐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과 같지 않기에. 나만을 위한 글일지언정 글을 쓴 순간의 나는 이후에, 글을 읽는 나와 서로 다른 존재로서 대면한다. 글은 읽히기 위한 것이다. 


 글은 읽히기 위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글을 보여주기 위하여 글을 쓰며, 글밥을 얻어먹길 꿈꾸는 수만의 저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만을 위한 글의 정 반대편에서 타인과의 공감을 위한 글을 쓰는 글장이들은 글의 소통과 울림으로 글을 쓴다. 나를 위한 글이, 다른 시공간 속을 통과하는 같은 주체의 마주침이라면 그와 반대로 타인을 위한 글은 같은 시공간 속에 기거하는 서로 다른 주체들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과 만나는 것, 그리고, 균형을 잡는 것.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꽤나 고약한 고민을 수반하곤 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의 교감은 필연적으로 개개의 글의 고유함을 소진시킨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야기일수록 더 잘 가닿을 수 있고, 반대로 유별나고 특이한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글밥을 먹길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대개, 어떤 독특한 생각을 어떻게 보편적인 문제로 이끌어낼지가 평생의 고민거리로 따라다닌다. 


 그리고 때론 그런 고민에 그 글의 고유성이 훼손되기도 한다. 타인과의 공감을 위한 글 고민, 그리고 나 개인의 특이한 이야기를 보편적인 문제로 확장시켜나가기 위한 고민이 이어지다보면 어느덧, 머릿속에서 나의 고유성이 꽤나 말끔히 세탁되어 있음을 무심히 깨닫게 되곤 한다. 쉼표가 필요한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가지밥도 했는데, 어제 가지전을 썼으니 오늘 또 가지밥으로 글을 쓰는 건 무리겠지?" 그런 고민은 무엇하러 할까. 그냥 쓰면 될 것이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굳이 다른 이들이 보도록 전시함으로써 나의 글밭의 색채를 단조롭게 할 것은 또 무어란 말일까. 독자는 글만을 보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는, 노래를 듣고 차를 운전하며 드는 수만가지 생각들 중에서 또 교육 문제에 대한 고민들이 먼저 또아리를 틀고 자리를 잡아버린다. 하. 그람시, 라깡, 소쉬르, 알튀세르. 지난달부터 공부하고 있는 갈피들이 한켠에 엉덩이를 뻗치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학습 자발성의 갈래가 있으며 또 반대편에는 온라인수업에 대한 글들이. 아다다다. 이들 중 일부는 공부요, 일부는 소통이고, 일부는 글밥거리다. 그럼, 본래의 나는 어디로 가고, 이 맑은 하늘과 소소한 빗줄기 사이의 내 시간은 어디로 간단 말이야. 


 마지막으로, 나의 글쓰기의 고집은 쓰게 되는 글은 모두 그 자리에 공개하는 것이다. 때문에 보여질 수준이 되지 못하면 쓰질 못하고, 또 보여질 수준이 되면 품이 들게 되어 의자에 앉길 주저하고, 물론 그 사이에 바깥양반에게 밥을 차려줘야 하는 점도 있고, 그러한 나의 생각에 나 자신의 글, 그리고 나누기 위한 글의 고민이 섞이곤 하니, 문득 그런 고민이 드는 것이다. 아하, 내가 또 정신을 팔아버리고 있네. 


 하여, 잠깐 중심을 잡아본다. 써야할 글도 많고 팔고픈 글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언제 다시 보더라도 재미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꽃밭이든 글밭이든, 색채가 다양해야 보기도 좋을 터이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긴 산책로처럼, 홀로 수수히 거니는 날 위한 선물같은 글들도 마음껏 쓸 수 있어야 자유인이라고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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