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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l 23. 2020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녀의 이야기 <나를 찾아줘>

Gone Girl

 이를 테면, "너는 혈액형이 뭐야?" 라는 말은 요즘 들어서 친교를 위한 여흥을 넘어서지 않는 발언이라는 점을 모두가 동의한다. 혈액형의 탈을 쓴 네가지 인간 유형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상대방과 나의 특성을 알기 쉽게 정리하는 대화의 코드. 겨우 네가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어쩔 순 없다. 상대적으로 세분화된 특성을 분류 제공하는 MBTI는 16가지 유형인데, "나는 INTP형이야~. 아이디어 뱅크라구." 라고 말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너무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애초에, 진짜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묻고 답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방과 나에 대해서 규정하고, 탐구하길 멈추지 않는다. 나란히 앉아서 식사를 할 때면 밥을 오물거리는 정도, 젓가락이 어디엔가 부딪히는 정도, 삼키고 말을 하는지 물고 말을하는지 등등을 보며 상대방에 대해서 수십가지 선입견을 세워둔다. 그리고 그러한 선입견은 이내 나를 규정한다. 상대방이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공손해지고, 겸손을 모르는 상대방을 만났다면 나는 거만해지기 마련이다. 즉, 시시각각 우리는 타인과의 교류에 따라 소통하며 끊임없이 자기를 재규정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실현적 존재다.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규정하는 과정에는 결정적으로 "관계"가 작용한다. 다시 혈액형으로 돌아가, 혈액형 성별유형을 꽤나 믿는 사람, 즉 그 관념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그러한 자신의 혈액형에 대한 성격유형을 가지고 인용하며,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반영한다. "나는 B형이라서 꽤나 마이페이스니까."같은 중2병 같은 대사를 실제로 해본 경험들이 인생에 한번쯤은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그런 인식은 수정되고, 새로운 나의 관계망, 예컨데 회사, 학력, 애정관계 등에 따라서 새롭게, 새롭게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일신해 나간다.


 자, 그런 가운데 <나를 찾아줘>는 그 원제 <Gone Girl>이 보여주듯, 여인으로 성숙하지 못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잘못된 관계가 잘못된 정체성으로 이어졌고, 잘못된 정체성이 다시 잘못된 관계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벌어진 한바탕의 살인극 소동. 이 영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꽤나 밀도있고 세세한 리포트이기도 하다. 데이빗 핀쳐 감독은 늘 그렇듯 감각적인 연출과 편집으로 스릴러의 긴장감을 한껏 끌어내었고, 각본에 뒤지지 않는 여러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인물들과 사건에 충분한 리얼리티를 부여했다.  

빛을 보고 있는 에이미, 그녀의 등 뒤에 서서 그녀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닉.

 주인공 에이미는 잘못된 양육의 희생자다. 그녀는 아동소설 작가인 부모가 그녀를 모델링해서 만든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소설의 주인공과 평생을 비교당하며 그로 인해 극심한 억압과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아마도 그녀가 어린 시절의 실제 일화를 중심으로 엮어졌을 소설은, 차츰 그녀가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분신이자 정체성형성의 매개체가 아니라 우러러보고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대상으로 변모했다. <어메이징 에이미>에 관한 첫번째 회상은 그런 그녀의 증오를 절절히 토로하며 시작된다.


"어메이징 씨발(Fucking) 에이미가 결혼을 씨발(Fucking) 한다. 나는 10살에 첼로를 그만뒀는데 다음 책에서 어메이징 에이미는 신동이 됐어. 배구, 나는 잘렸는데 그녀는 지역 대표가 됐지. 그녀는 개를 키웠어. 그녀를 더 사랑스럽게 만들었지."


 이어서 등장하는 에이미의 부모는 철저히 그녀를 <어메이징 에이미>의 도구로 소비해온 그들의 태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에이미는 결혼을 앞둥 성인인데도, 자신들의 상업적 성취이자 평생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소설의 모델에 맞는 행실을 요구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잘못된 양육과 왜곡된 부모자식관계를 에이미가 수용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부모와의 애정관계 때문에 그 큰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종속된 경제관계 때문에 강제로 감내해 온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위조해 온 부모에게서 벗어나려 한들, 지나치게 큰 부모의 그림자는 그녀를 동시에 의존지향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의존지향적인 성향은 관계에 극히 민감한 취약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에이미는 자신을 평생 조작해 온 부모를 그대로 답습해 자기의 주변 인물들, 그 중에서도 자기와 가장 가깝고 자신이 가장 의존하는 대상인 그녀의 남편의 삶을 조작하고 규정하기에 이른다.


 "잘 만든 막장극"이라는 당시의 세평이 틀리지 않게 남편 닉의 행실이나 사건의 전개에서 자극적인 장면이 상당히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잔혹성과 비도덕성을 드러내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목격한다. 특히 양육의 관점에서,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명시적인 비행과 폭력보다는 에이미의 정체성 혼란의 배경인 잘못된 양육과 관계 묘사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육을 위해, 가족의 미래를 위해 매일 매일 자녀와 배우자에게 가해지는 유형무형의 폭력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또 있을까. 


 또한 의존에 의해 지탱되는 정체성을 위해 "의존이 가능한 상태"로 주변 현실을 조작하고, 끝내 <어메이징 에이미>가 지향했던 드높은 정체성에 마침내, 대단히 왜곡된 방식일지언정 끝내 도달하고야 마는 에이미의 행적은 "나"를 규정하는 방식에 대하여 저마다 성찰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투쟁하는 존재다. 살인, 협박, 조작으로 "나"를 채운 에이미가 스크린 너머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의 그릇에 무엇을 채우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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