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영어 수업 재구성 분투기 : 1년차 / 교육과정 구상
교사협의 바깥으로의 교사협의
"저 1학년 할게요."
2월 개학 첫날에 영어 교과 업무분장을 위해 선생님들과 모였다. 하룻밤 동안 생각을 정리해 세워낸 대책을 말했다. 영어과 선생님들 중 절반 조금 넘는 인원이 담임이었고 나는 비담임으로 수업 담당 학년을 택할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들이 담임으로 선호하는 고2의 경우에는 수업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고 1학년과 3학년 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 그리고 수업 재구성을 하기 위해서는 1학년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 그럼 기간제 선생님들 두 분 수요일에 오신다니까, 한 분은 1학년 담임이시고 한 분은 저랑 정하던가 하면 되겠죠? 남은 자리가 1학년과 2학년 수업 걸치는 자리, 3학년 문과반 수업이네요. 나 뭐하지?"
회의를 진행하는 영어교과 대표, 지훈 선생님도 역시 부장교사로 선임되어 비담임이었다. 업무분장에 대해선 시원시원하게 처리하는 편이었고 평소에도 영어문법이나 독해 공부를 스스로 열심히 하는 편이다. 다만 거꾸로수업 같은 '실험'을 같이 하자고 꼬시기에는, 지훈 선생님의 본인의 수업관이 명확한 편이라 역시 교사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제가 기간제 샘들 두분이랑 1학년 할게요. 샘이 3학년 하시면 될듯?"
"그래? 나야 상관없지. 괜찮겠어?"
"이번에 오신다는 샘들 직전까지 임고 공부하고 오신 분들이라 잘 하실 것 같아요. 그리고,"
그분들께도 무리수인 줄은 알지만, 나는 말을 이어갔다.
"저 거꾸로수업 할거임. 그러니까 기간제 샘들 두분이랑 1학년 시켜주셈."
"그래? 알아서 해 그러면. 자 그럼 다 됐습니다. 학년별로 대표교사랑 협의록 담당 선생님 정해주시구요. 일단 내려가시죠."
무리수긴 하다. 학교에 새로 적응하셔야 하는 선생님들께 먼저 자리잡은 사람이 거꾸로수업을 제안해야 한다.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는 먼저 자리잡은 교사가 왕이다. 교육과정의 연속성 때문이다. 새로 온 교사는 정교사든 기간제 교사이든, 출제, 평가, 수업 모든 교육과정에서 기존 업무의 틀에 따를 것을 강요받는다. 공립에선 경력이 두배나 많은 교사가 새로운 근무지에 가서 더 경력이 짧은 선생님에게 끌려가는 경우도 흔하다. 몇년 간은 먼저 자리 잡고 있는 선생님에게 양보를 하며, 업무분장을 통해 해방되는 것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 짓을 내가 하게 되었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다가 오신, 교직 경험이 거의 없는 선생님들이라 올해도 다시 임고 공부를 할 것이고 되도록이면 내가 배려를 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수업은 되도록 재량에 맡기고 출제 등의 업무만 깔끔하게.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굳이 기간제 두분을 모아서 한 학년을 맡는 것도 좀 좋아보이진 않는다. 정교사 두분에 기간제 한분으로 한 학년을 구성해, 두분을 분산시키는 쪽이 특히 시험 문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막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시험 문제는 안정성과 그를 위한 연속성이 필요하다. 두 선생님이 오류를 내면 부담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온다. 나에게도 선생님들에게도 무리수다.
그러나 이런 구성을 취하지 않고서는 수업재구성을 시작할 수조차 없는 것이 당시의 나의 현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교사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학교의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을 뽑으라고 하면 어느곳에서나 '교사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항목은 적어도 다섯손가락 안에 그것도 꽤 높은 순번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다른 선생님의 잘못도 아니다. 각자의 십수년의 교육경력과 교육관, 매일 매일 닥쳐오는 지도의 부담과 업무의 무게. 11월쯤 되면 생활기록부 작성으로 목 디스크가 도지고 몸과 마음이 번아웃된 채 12월을 겨우 끝마치는 교사들. 1월 한달간 연수도 다니면서 수업 재구성을 고민한 나조차 거꾸로수업을 시작하려다가 수업자료를 만드는 벽에 부딪혔는데 온전히 휴식을 갖고 재충전을 할 시간에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를 위한 준비까지 만전을 기해 교사협의에서 다른 선생님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수업재구성이라는 고행길에 끌어들인다? 현실의 벽이 너무나 높다.
어쨌든 두 선생님께 요청을 드려야 할 상황이고 교사협의를 피하는 교사협의로 나의 첫번째 바람은 이루어졌으니, 이제 그분들을 설득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자리에 돌아와, 선생님들께 먼저 설명을 드리고, 아이들에게도 나눠줄 오리엔테이션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당시까지만 해도 수업 영상을 교사가 공개적으로 올리는 문화가 확산되지 않았다. 자기수업을 공개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수업을 보는 것도 혁신학교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일반고에서는 '이상한 짓'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거꾸로수업 영상을 보게 만들려면, 학교 홈페이지에 게시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이 수업영상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접근성이 거꾸로수업에는 필수다. 미리 수업 내용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본차시의 활동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교사의 수업이 무작위의 대중에게 노출되는 희생이 따른다.
협동수업에 대한 내용도 오리엔테이션 자료에 담았다. 모둠을 통한 협동수업임을 아이들에게 확고하게 인지시켜야 수업이 운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게다가 영어 교과이지 않은가. 아이들이 협력을 통해서 암기과목에 편중된 영어지식을 듣기와 말하기, 쓰기에 고루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활동지에도 이런 공부 나눔이 담길 수 있을지는, 이 자료를 작성하는 순간에는 미지수이지만 이 교육목표로서 협동을 통한 배움의 성장은 확고하게 세워두고 싶었다.
거꾸로수업을 처음 시도하는 교사로서의 부탁 그리고 또 하나의 교육목표인 '탐구하는 사람'도 아이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지역에 모범적인 혁신중학교가 있어서 해당 학교 출신 신입생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수업재구성에 적응되어 있고 활동도 빼어난데, 정작 고등학교에서 고전적 수업의 답습을 경험하고 학력이 저하되는 경우가 발견된다는 소식을 듣던 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도하고자 하는 수업은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위한 길이었다. 가는 길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가 포기해선 안된다. 솔직해지자. 수업 재구성에 도전하는 우리 역시 어렵다고 그러나 최선을 다하겠다고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탐구를 위한 도전을 계속해 달라고.
첫 페이지를 쓰는데 제법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두번째 페이지는 몇일간 고민했던 바라, 쉽게 써내려갔다. 모둠역할분담은 연수에서 여러차례 추천받은 방식이다. 아이들 하나 하나가 모둠에서 자신의 역할을 부여받으면 좋다. 창의적 놀이학습 활동에는 아이들의 역할이 부여될 수 있다. 그러나 학습 및 숙의 과정에는 아이들의 역할을 부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교사의 세련된 고민이 필요한 지점일 것이다. 평가계획에 차시별 수업참여를 명토박았다. 10점의 수업참여를 5:5로 나눴다. 5점은 감점식이다. 모둠별로 활동지를 완성하지 못한 아이가 있다면 수업 참여 점수를 감점한다. 나머지 5점은 가점식이다. 개인별로 수업 중 활동 참여를 통해 고득점을 얻을 수 있다. 아이들이 모둠활동으로 배움을 나누고, 동시에 수업 참여로 개인의 영어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했다.
예년에는 영어서술형 평가를 위하여 에세이 활동으로 치르던 것을 1,2학기로 구분해 2학기에는 조별 발표수업을 하도록 했다. 이 아이디어를 착안한 것은 생활기록부 때문이었다. 집중이수로 1,2학기의 영어 교과목이 각기 "실용영어I"과 "영어I"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생활기록부에 작성할 수 있는 과목별 특기활동이 1,2학기 모두 에세이인 것은 올바르지가 않는 생각이 들었다. 1학기에는 에세이 활동을 시키고 2학기에는 발표수업을 시키면 1,2학기의 생기부 내용에서 큰 차별성이 생길 것이라고 보았다.
영어 듣기평가의 경우는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대개의 학교가 평가에 반영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그래도 어쨌든 아이들이 연습은 해야 하니까'라는 생각으로 남겨두었다. 대신에 아이들이 듣기평가를 연습할 수 있도록 따로 수업자료를 마련키로 했다. 영어 교육과정에는 듣기가 제외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수업 운영과 평가가 번거롭고 학교 일과운영과 타 교과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듣기 수업과 평가를 제외한다는 것이 온당하지는 못하다.
마지막으로 단어평가도 반영하기로 했다. 많은 영어교사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인데 교사는 영어 독해와 문법 수업에 주력할 뿐 영어 독해를 위해 필요한, 많은 아이들의 영어학력부진을 초래하는 영어 단어 수업을 고민하지는 않는다. 고등학교 영어 지문을 독해하기 위해서는 문법도 필요하지만 단어가 더 중요하다. 저학력자일 수록 그렇다. 영어수업을 재구성하기로 결심하고, 단어 평가를 반영하겠다고 하겠다고 생각한 이상 나는 교육과정에 단어학습을 포함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수업 도입부의 아이스브레이킹으로 매 차시마다 단어게임을 하기로 했다.
작성을 마치고 기지개를 켰다. 어제의 좌절감을 겨우 떨쳐낸듯했다. 겨우 아주 어려운 과제를 하나 해결했고, 큰 일을 하나 해냈다. 이틀 뒤에 선생님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상상을 하는 것이 설레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