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영어 수업 재구성 분투기 : 1년차 / 교육과정 구상
"교과별 대회는 창체 시간에 하는 건 지양하셔야 하고요. 수행평가랑 겹치는 것도 안됩니다."
"아하 교과는 교과, 창체는 창체로 분리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수업과 연계해서 수행평가, 수행평가를 확대해서 창체 활동 혹은 교과별 대회를 하시는 게 좋아요. 창체 프로그램들은 좋아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운영 잘 하시네요. 창체 시간에 대회를 한다면 창체 프로그램을 연계해서 하는 게 좋습니다."
시간은 이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월 중순, 학교별 교육과정운영계획서를 컨설팅하는 지역교육청의 일정에 참석했다. 연간 봉사활동계획, 창의적 체험활동 계획, 교내 수상계획, 교과 운영계획 등 학생들의 생기부에 반영되는 모든 교육활동을 하나의 문서에 담아 대학에서 학생부종합전형을 위한 평가자료로 활용하고 있고, 학교 자체적으로 홈페이지 및 학교정보공시 사이트에 업로드하고 있다. 12월 말에 전년도 교육과정운영계획서를 받아보니, 2015년 개정교육과정이 반영되지 않거나 예전 자료가 많이 포함된 상태였다. 급한대로 2주 정도 시간을 들여 창체 계획을 중심으로 1차본을 작성해 갔다. 그러나 이곳에서 뜻밖의 깊은 가르침을 얻게 되었다.
학교별 컨설팅에는 1차 교감을 거친 지역의 고위 장학사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 자료를 검토하고 고칠점을 조언해주신 분은 교육청에 출장 와서 몇번 뵌 적은 있지만 이름이나 소속은 알지 못하는 경력이 상당히 많은 교감선생님이셨다. 교육과정 개정과 혁신교육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있는 분이었다. 다른 학교에 비해 우리학교는 창체 계획이 복잡하고 다양하게 짜여져 있었는데, 나는 학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연간 봉사활동을 '0'으로 만들고 학생활동을 최대한 집어넣었다. 창체 시간에 전교생들이 참여하는 봉사활동을 대학이 평가할리가 없기 때문이고, 그렇게 해서 확보한 시간들은 대회를 최대한 많이 만들었다. 교과에서도 대회를 많이 만들고, 교육과정을 계획하는 우리부서에서도 직접 매달 대회를 개최하는 바쁜 일정이었다.
○ 해당 학년도의 우리 학교 대회 일정이다. 학생부 종합전형에서 수상계획이 반영되기 때문에 "별의 별" 대회들을 많이 만들었다. 2019학년도부터는 학기당 1개의 수상기록만을 대학에 제출할 수 있게 바뀌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대회 운영은 이제 불가능하다.
컨설팅 교감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에게 두가지 숙제가 주어졌다. 창의적체험활동 시간에 편성되었던 대회들을 교과 시간 외에 실시하도록 점진적으로 교과와 부서에 안내해야 하고(단박에 바꾸기엔 교사도 너무 힘드니 다음해 교육과정을 짤 때 반영하는 쪽이 나았다.), 내가 지도하는 과목에서 수업을 연계한 수행평가, 수행평가와 연계는 하되, 분리된 별도의 대회를 만드는 그림을 짜야 했던 것이다.
그 당시는 내가 거꾸로수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시점이었고, 또 부장을 하면서 담임에서 빠져 영어교사대표를 하고 있던 시점이라 여러모로 이 가르침을 따르기 편했다. 그리고 실제로 탁월한 통찰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수행평가 반영비율이 늘면서 아이들은 내신공부를 위해 매일 시간을 투자하면서, 거의 매주 닥쳐오는 수행평가에 대비해야 한다. 이제 막 진로탐색을 하고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해야 할 고 1인데도 빠르면 3월말부터 매주 한두개씩의 수행평가를 위해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가 4월 말, 중간고사를 맞는다.
수행평가는 반드시 수업활동에 기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수행평가가 별도의 준비 혹은 공부가 필요해서는 아이들의 부담도 늘어만 갈 뿐이고, 교육과정으로서도 타당성이 떨어진다. 물론 나도 이 해에 교육과정 재구성을 하기 전까진, 적당히 진도를 나가다가 교과서에서 특정 활동을 하나 골라 아이들에게 알아서 준비하라는 식이었다.
대회 역시 수업 및 수행평가를 연계해서 해야 한다. 이것은 컨설팅 전에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점이다. 교내 대회는 스펙을 위한 아이들이 별도의 시간을 투자해서 '원하는만큼'의 노력으로 상을 타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업과 분리된 대회에는 아이들이 참여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 때문에 상의 의미가 퇴색되고, 생기부 조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 몰아주기'도 발생한다. 교감선생님의 말씀대로 수업 내용을 심화한 대회를 열어, 교실 내에서 수업시간에 대회가 이루어지고, 모든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그를 통해 상의 가치를 높이며 더욱 공정하고 엄정한 교내상 배부가 이루어진다면 정말 교사도 아이들도 만족도가 크게 상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되는 점이 있다. 교내 대회가 성적우수자들이 유리한 방식으로 운영되어선 안된다. 교과 대회니까 해당 교과에서 성적이 잘 나오는 아이들이 유리한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컨설팅에서 받은 조언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업과 수행평가, 교과별 대회는 연계되어야 하지만,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이 그대로 상을 받아가는 것은 충분히 분리가 되지 않은 대회이고 그만큼 왜곡된 스펙이 될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수업과 연계하지만 지필평가 형식이 아닌 수행평가가 되어야 하고, 수업 그리고 수행평가와 연계하지만 역시 지필평가는 아닌 대회를 구상해야 했다.
스크래블Scrabble은 이러한 수업-수행평가-대회의 분리연계모델을 잘 보여주는, 그해 내가 가장 잘 만들어낸 활동 중 하나였다.
1. 영어 독해를 위해 영어 단어 학습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킨다. 수업 때 단어 학습이 충분히 되어야 한다.
2. 수업 때 배운 영어 단어 시험을 수행평가에 포함한다.
3. 단어능력을 평가하되, 주어진 블럭을 가지고 단어를 생성해내는 스크래블 게임을 통해, 순수 영어 지식과 역량으로 경쟁하는 교과 대회이면서, 대회를 위한 별도의 준비가 없이 평소의 영어 학습으로 충분히 누구나가 참여할 수 있는 대회를 운영한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앞장 서서 영어과에서 이렇게 수업-수행평가-교내 대회의 연계 모델을 만들고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육과정운영계획서에 이미 대회 일정까지 잡혀 있었다. 10월이니 중간고사 이후 휴식기에 대회를 개최하면 된다. 전년도까지는 영단어 부교재의 일정 분량을 정하고 공지해 1000단어 내외에서 암기 시험을 치렀다. 전년도까지 나는 교내 대회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고, 영어교사 대표였지만 그런 대회를 그냥 같이 준비해 치렀다. 물론 극소수의 아이들만이 상을 노리고 참여했고, 별도의 암기공부를 했음은 물론이다. 잘 된 대회라고 보기 어려웠다. 나는 후다닥 스크래블 게임을 구매했다. 예산이 부족해 당장은 7세트가 구비되었다. 4명 모둠으로 30명 한 학급이 한 시간 해볼 수 있다.
혁신연수와 교육과정 컨설팅에서 배운 것들을 마음에 품고 봄방학 기간에 수업 재구성 준비를 하는 것은 마음이 한 없이 바쁘지만 또 신나고 재미있었다. 단어 공부에 대한 대책도 마련하고, 그것을 일개 교사로서 이전까지 접하기 어려웠던 고차원의 교육철학에 맞추어 연간 계획까지 짜 보았다. 어지럽게 방치해놓은 내 방을 리모델링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는 평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지필평가에 목숨을 건다. 중간 기말 시험에서 작은 오류만 나도 몇주동안 후유증을 겪는다. 때로는 뉴스에 나올만큼 학부모와 학생들의 항의가 거칠게 들어올 때도 있다. 자연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평가들, 수행평가나 교내 대회에는 관심을 덜 갖게 되고, 되도록 손이 덜 가고 수월한 활동으로 수행평가나 대회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그 댓가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수행평가는 원하는 방향으로 수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위한 교사의 가장 큰 무기라는 점. 그리고 교내 상은 각종 외부 스펙이 생기부에 입력할 수 없도록 지속적으로 정책이 나오는 상황에서 대학이 학생들을 바라보는 아주 중요한 평가요소라는 점이 내 생각 속에 자리잡았다. 즉, 지필평가만큼 수행평가와 교내대회도 세심하게 준비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준비가 거의 끝났다. 개학을 기다리며, 교재연구를 하고 1단원의 수업 구상을 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