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감춤으로써 비춘 세상
부동산 여론에 대한 흔한 조소로, "전월세 사는 사람들이 종부세를 걱정한다."라는 말이 있다. 정부가 부동산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종부세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정부가 가로막는다."라는 보수 언론들의, 그들 자신이 자본 기득권에 속한, 억지 주장에 홀려 종부세에 대한 반대, 수도이전에 대한 반대로 편향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을 꼬집는 말이다.
<SKY캐슬>이 뜨거운 인기를 얻었던 것이 그와 다를까? 지난해 겨울, 한국 사회의 최상류층, 그중에서도 교육을 통해 계급을 세습하는 자들의 욕망과 쟁투를 다룬 드라마가 인구에 회자되며 "공감"이라는 단어를 끌어오는 것은 상당히 기이한 광경이었다. 종부세를 낼 일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 억제정책을 반대하는 것처럼, 교육을 통해 계급을 세습할 전망이 없는 국민 다수가 이 드라마를 보고 교육 문제를 토의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인식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한국 최고의 대학교의 교수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이들만이 입주할 수 있는 공간. 고작 다섯가구. 그들을 인구 대비 비율로 따지면 몇 퍼센트나 될까. 교육엘리트, 혹은 교육기득권 중에서도 최상류층의 문제에 국민 다수가 몰입하고, 공감의 정서를 일으킨 이유는 뭘까?
그게 말입니다.
1. 계급 갈등은 혈연과 치정극 뒤로 감추고
<SKY캐슬>의 계급갈등은 모두 혈연과 치정의 연장선으로만 묘사되었다. 상류층이 하류층과 충돌하게 되는 것은 "내 새끼를 홀려서"라거나 "내 새끼의 전교 1등을 가로막아서"다. 핵가족 구조로 변하면서도 가족주의은 여전한, 그리고 자녀교육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의 교육열 속에서 "내 새끼를 위한" 상류층의, 하류층에 대한 폭력은 모정으로 치장되어 전달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계급갈등은 이보다 훨씬 잔인하다. 자식을 위한 절박함이 없어도, 자신의 지위나 위신에 손상이 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통해 형성된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기꺼이 억압할 의사를 내비친다.
생명의 가치에는 차이가 있을까?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진부한 질문이다. 교육, 특히 "선발"을 통해 계층을 형성하고 그것을 세습하는 집단은 우리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고, 그러한 문화를 공유하는 교육엘리트 집단에게 있어서 생명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가치는 그들의 계급적 이해를 앞서는 문제가 될 수 없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의학계의 의대정원 확대 반대시위는 교육엘리트의 집단적 계급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SKY캐슬>의 여러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보여지듯 학습자의 진로적성과 인생 경로를 통해 정해진 것이 아닌, 단지 계급 세습을 위하여 택해진 의대 진학이라면 그들에게 우리가 공적 가치를 준수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어째서 교육을 하고 최상위의 학력을 취득하려 애쓰는가. <SKY캐슬>의 소년소녀들에게, 그리고 현실의 의대생과 의사들에게 의학이라는 직무는 무엇인가? 그들의 직무영역인 인간의 생명은 그들에게 어떤 것인가? 그것을, 드라마는 말하지 않았다.
2. 계급 세습은 생존의 문제라며 정당화하고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현실의 약점들을 지니고 있다. 한서진은 "가난했던" 과거를 속인 것을 시모에게 용인받기 위하여 반드시 그녀의 딸에게 계급을 세습토록 해야 한다. 그것도 오로지, 주남대 의대 합격, 그것을 위한 전교 1등이라는 성과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서진 다음으로 계급 세습에 열성적인 인물인 차민혁은 검찰총장을 꿈꾸다가 좌절한 인물이다.
<SKY캐슬>은 최상류층 부자들이 수억의 사교육비를 투여해서 자녀에게 계급을 세습하는 것에 이러한 타당성을 부여하며, 실제로 무릎을 꿇고 왕따까지 참아내는 굴욕을 비추어준다. 계급 간의 갈등은 감추고 계급 내에서 발생하는 수평폭력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기득권적 지위를 희석하고, 교육을 통한 계급세습을 정당화하는 상징조작이다. 과연 한서진, 차민혁의 "생존"은 자녀에게 교육계급을 세습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일까? 강압적이고 불공정한 교육 경쟁을 통해 전승되는 사회적 지위가 자녀의 정당한 교육권보다 중요한 가치일까?
마찬가지의 상징조작을 의사들의 시위에서 발견하는 것은 계급적 지위 유지를 생존의 문제로 전치하는, 기득권의 인식과 전략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의사들이 파업에까지 나설 절박함이 의대생 정원 확대 정책의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기 어렵다. 명분이 없는 그들의 극한 저항에 그들은 자존과 생존의 문제를 앞에 내세운다. 그러나, 위협받지 않는 의사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에 실제로 생존의 위험을 겪고 있는 환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을 지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다.
3. 저항하는 자녀들, 분열하는 계급들
실제로 그들에 속해보지 않았으니 교육엘리트 집단이 가족 내에서 어떤 의사결정구조를 갖는지, 그들이 연대하는지 분열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SKY캐슬>은 저항하는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의 교육 억압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집단적 도덕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교육 엘리트 집단의 세습은 전통적이지 않다. 자녀들은 보호자에게 저항하는 자율의지를 지닌 존재다. 가족도 자신의 평생의 학습 노력도 버릴 만큼의 도덕성. 그러나,
이번 의사 파업의 과정에서 드러난 일부 의대생들의 문란한 민주의식은 <SKY캐슬>의 자녀들이 보여준 자율의지를 무색하게 한다. 일부 대학의 투표는 실명으로 진행되었으며, 그들은 투표 불참 혹은 동맹휴학 반대 의사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줄 수 있음을 떳떳하게 선언한다.
<SKY캐슬>의 자녀들이 보여준 자율의지와 의대생들의 공산당식 투표 중, 어느쪽이 보다 더 현실을 더 잘 반영하고 있을까? 혹은, "일부"의 사례를 확대해석해서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드라마가 하고 있을까 아니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하고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드라마는 창작의 영역이고, 이런 부정 투표가 자행된 것은 명백한 현실의 영역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4. 공적 영역은 비방하고, 사적 영역은 치장하고
교육자로서 <SKY캐슬>의 가장 구역질나는 담론 감추기는 학교 교육을 비리의 온상으로 묘사한 것이다. 드라마 상에서 등장한 단 한명의 학교 교사와 강사 간의 시험 부정은 그 해 "수시의 불공정"과 "수능 공정성" 양쪽의 담론을 동시에 강화하는 지렛대로 활용되었다. 드라마가 교육과 계급 세습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은폐하는 동안, 공교육은 이와 같이 교육 문제의 진원지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수능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진행된 <SKY캐슬>의 주남대 의대 입시는 그 자체로 허황될 뿐더러, 현실의 교육 문제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강남 유명 사립학교의 전교 1위라고 해도 서울대 의대를 입학하는 일이 당연히 쉬울 리 없다. 수능 문제는 아예 은폐하면서 드라마 내내 전교 1위를 둘러싼 싸움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극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학교 내 입시 비리를 통해 모든 교육 갈등과 투쟁을 허위의 것으로 만들려는 극중의 장치에 불과하다.
<SKY캐슬>이 이처럼 공적 교육 영역을 부정적으로 일방 왜곡하는 동안 현실의 입시 비리는 고등학교 내신을 통해서만 발생하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최순실 모녀의 이대 입시 비리를 통해, 그리고 나경원 의원의 입시 비리 의혹을 통해서 목도한 바다. 2020년 현재, 연세대에서 대규모의 입시 부정이 발각되어 고등학교에서의 입시 비리보다 훨씬 심각한 범죄행각이 드러났음에도, 우리 국민의 인식은 숙명여고 교무부장의 범죄행위만큼은 경각심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일은 미디어가 의도적으로 공적 영역의 문제는 부풀려 전달하고 사적 영역(대학을 포함하여)의 문제를 축소 왜곡하여 전달함으로써 발생한다. 그리고 작금의 현실에 있어서도, 국가의 공적 책무로서 의료 복지 향상을 위한 정부 정책과 의사 집단의 사적 이익이 갈등을 빚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도 미디어는 제대로 그 상황을 조명하고 있지 않다. 다행히 국민 다수가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의사들의 집단적 이기심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감시하고 있지만, 미디어의 이러한 행태가 반복된다면 우리는 언제든 같은 여론 편향의 길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의 가족을 향해서 그랬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해 그랬듯이 말이다.
몇가지 쟁점은 남아있지만, <SKY캐슬>과 현재의 의사들의 파업에 대하여 충분히 다루었기에 이만 줄인다. 미디어의 담론형성 실천행위가 <SKY캐슬> 수준으로 편향되게 발생하면, 실제로 국민 여론도 국가 정책도 위기에 처할 수 있다.
한가지 짧은 예시를 들자면, 지난해 연말에 정부가 "대입 공정성 강화방안"을 발표하였는데 해당 정책에서 수시의 공정성이 크게 신장된 점은 사실이지만 수능 비율이 그리 크게 늘어난 것도 아니고, 수시 제도의 본질적인 문제점들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수능을 고작 100일 앞둔 현재, 3년 가량 꾸준히 우리 사회를 달궈 온 수시 무용론은 완전히 사그라들어 있다. 어째서일까? 수시가 완전히 보완되었는가? 정부의 정책이 성공적으로 시행될 것으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는가? 코로나로 인해 대면수업 비중이 크게 들어 수시를 위한 생기부 기록이 크게 불안정해진 지금, 수시와 수능을 둘러싼 논쟁이 완전히 사라진 점은, 그만큼 이 문제를 둘러싼 지난 몇해의 갈동이 순수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교육을 통해 형성한 최상류층의 계급의식이 지금처럼 사회적 거악으로 그 정체성을 드러낸 것은 그러나 고작 수시와 수능을 둘러싼 논쟁보다 훨씬 큰 우리 교육의 거대 과제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이 어떻게 계층 차별의 촉매로, 계급 세습의 경로로, 자본적 가치의 매개체로 잘못 활용되어 왔는지를 폭로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의사들의 집단적 계급의식, 그리고 그들의 계층 구성들에 대해서도 앞으로 길고 긴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 교육이 그와 같이 왜곡되어 온 시간만큼은.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뒤끝을 부려보자면, "덕분이라며"는 반말이다. 이 챌린지 캠페인은 그들이 얼마나 인권 감수성이 덜떨어졌는지를 말해주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둔감하기 그지없는 사회적 감수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못배워먹은 것들이 어디다가 전국민 상대로 반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