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위한 구호는 현실의 장벽으로 남는다
노무현 정권 당시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한국전쟁 때 미군에게 넘어간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기로 한 일이 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선 공화당인 부시 행정부와 합의하여 합리적으로 진행되었던, 그리고 미국의 입장에선 이라크 전쟁과 맞물린 광범위한 미군 재배치 전략에서 추진된 사안이었다. 중국의 성장과 러시아의 부상으로 극동지역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고, 전시작전권 환수와 함께 노무현정부에서는 수도권에 밀집된 미군부대 일부를 평택으로 이전하기 위해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는 등의 노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단지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일이라는 이유로 단숨에 이 사안은 격렬한 보수 세력의 저항을 마주했다.
당시, 그리고 여전히, 보수 집단이 전시 전작권 환수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은 합리성과 근거가 상당히 박약했고 박약하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 미국이 북한과의 전쟁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모색하여 남북한 모두가 큰 혼란에 빠지는 홍역을 겪었을 만큼, 그리고 단지 북한만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중국과 일본, 러시아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주체적인 국방력을 확립해야 하는 절박성 만큼이나 전시작전권 환수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집단은 한미동맹 해체, 북한의 남침 현실화 등의 허구적 주장을 앞세워 거리로 나서 국론분열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시기 실제로 전시작전권 환수를 연기하기로 결정하기까지 그들은 “한미동맹 수호”라는 구호를 지상과제인양 반복했다. 바야흐로 한국보수가 이념적으로 단단히 결합하는 시건이었다.
그로부터 전에 없던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국보수의 중요 가치로 “한미동맹 수호”가 새겨지고, 그것이 정치적 갈등상황에서 노무현 계 정치세력과 민주당에 대한 안티테제로 확고하게 자리하면서 그들은 미국에 대한 맹종을 보수권력 사수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실천했다. 보수세력의 집회에선 늘 성조기가 등장했고, 미국 대통령에게 민주당 척결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가장 유머러스한 장면을 둘 꼽아보자면 마크 리퍼트 전 미국대사가 피습을 당했을 때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춘 사건, 그리고 이번 광복절에 태극기-성조기-일장기가 함께 내걸린 사건이다.
광복절에 일장기라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보수세력의 반민주당 이념지형에서 지난 2년간의 사건을 되돌아보면 이것은 전시전작권 환수로 발생한 “한미동맹 수호” 이념화를 그대로 복제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무조건 노무현은 나쁜놈이니 전작권환수도 안되고 한미동맹 약화는 더욱 안된다. 무조건 문재인은 나쁜놈이니 일본의 일방적인 경제공세는 당연한 거고 과거사 척결도 안된다.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국익에 우선, 아니 바로 국익이라는 기상천외한 논리. 아베 총리에게 면목이 없다는 “어머니연합”의 회장의 단발마는 민주당 정권에 피해를 입힐 수만 있다면 친일이든, 친미든, 광복절의 일장기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보수의 기괴한 이념성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2020년 현재, 오로지 정치적 목적으로 또 하나의 구호가 생겨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한다. 병사의 휴가.
군인권의 차원에서 병사는 자신이 원하는 병원에서 자신이 원하는 충분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최상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최상의 전투력이고 그것이 최상의 국방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집단은 도대체 어떤 정신구조와 군인권의식을 갖고 있는지 모르게, 병치료를 위해 휴가를 나온 병사가 유선보고 후 휴가를 연장한 것을 탈영이라고 규정하고 정치공세를 이어간다. 거기에 검찰과 언론이 각자의 권력을 최대한으로 행사하여 가세하고, 해명되고 해결된 문제에 말꼬리를 돌리고 돌려 논란을 지속시킨다.
사유가 발생하였을 때 전화로 휴가연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군대를 다녀온 모든이가 경험하는 상식이다. 100일 휴가를 나간 신병이 여자친구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어서 부대에 전화를 하고 중절수술을 위해 휴가를 연장한 사례를 나는 우리 부대에서 실제로 목격한 바 있다. 이 병사는 어떤 증빙서류를 떼어가야 하나? 100일 휴가 나간 신병이 부대 복귀 후 휴가를 다시 얻어가도록 하는 것이 합당한 복무이고 지휘일까?
지금 추미애 장관의 아들을 탈영병으로 만들기 위해 구사되는 모든 비정상적인 논리들을 보면 전작권 환수를 막기 위해 한미동맹을 들먹이던 풍경이 떠오른다. 국방의 중차대한 사안들을 오로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내거는 구호들. “한미동맹 수호”라거나 “무조건 휴가 복귀가 원칙”이라는 소리를 그들이 반복하는 동안, 그러한 정치선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현실의 왜곡상을 사회 전체가 함께 부담하게 된다. 전시작전권 환수 연기로 미국은 극동전략을 변경하게 됨과 동시에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이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 한국을 배제하고 일본을 중시하는 전략으로 이어진다. 병사 휴가 복귀 원칙이 엉뚱하게 튀어나오면서, 정치적인 성향의 지휘관들은 휴가에 대한 복무 통제를 강화할 것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병사들에게 미친다.
한국 보수에게 금도란 것이 사라진지...아니, 존재한 적이 있었는지부터가 의문이지만, 고작 휴가에. 고작 표창장에. 정당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정치공세를 하는 것을 보면, 내가 괜히 마크 리퍼트가 되어서 부채춤 추는 것을 보는 기분이 된다. 이제 좀 초현실적 정치공세로 현실을 왜곡하는 꼴은 안봤으면 싶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