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지세력을 끌어모아야 할 전문가들이 만들어내는 흙탕물의 결말은?
0.
'문빠'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2017년의 대선을 3,4개월 앞두고 여러 정치세력들의 경쟁이 활발해지던 시점이었다. 페이스북에서 자주 소식을 주고 받던 대학 동기가 내 포스팅을 두고는 '문빠들은 다 왜 이러냐'식으로 댓글을 단 것이다. 그는 노동조합에서 근무하는 전업활동가이고, 스무살 이후로 일관된 정치적 실천활동을 해왔기에 내가 감히 삶의 자세에 대하여 평가하기가 부끄러운, 존경할만한 친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게 던진 '문빠'라는 말은 그 이후로도 나를 꽤나 고민케 했다. 내가 '빠'질을 한 것은 무엇이 있으며, 나의 개별적인 사회관이 어째서 '문빠'라는 집단의식으로 호명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대선 기간 내내, 그리고 이후로도 나보다 훨씬 진보적인 정치철학을 갖고 있는 그와, 그보다는 덜하지만 남부끄럽지 않을만큼은 읽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글과 실천으로 옮겨온 나는 꽤 많은 정치적 논의를 이어갔다. 마침 여성주의와 통일정책, 언론 문제 등에서 우린 공통점과 차이점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정치논쟁에도 토론에도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침없이 '문빠'라는 호명으로써 나를 진영논리에 가두려 했고 나는 꽤나 인내심을 발휘해서 한번도 그에 대해서는 반박을 하지 않았다. 우리 둘의 대화와 논쟁 속에서 그것은 친구의 잘못된 담론행위일 따름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나 자신의 진영논리나 사상적 빈곤은 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1.
'대깨문'이라는 칭호를 대면한 것은 조국 전쟁의 와중이었다. 페이스북에다가 이런 저런 글을 쓰다가 상황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싶어 5년 넘게 동결시켜두었던 옛 블로그에 다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있는 인터넷 공론장의 틈을 타고 들어온 익명의 타인들이 '대깨문'을 운운하며 막말을 내뱉고 갔다.
'어대문'류의 줄임말이야 여러곳에서 보았지만 '대가리 깨진 문빠'라는 의미로 그 말을 쓰며, 상대방을 아무렇지 않게 멸시하는 부류를 다시 접하게 되니 꽤나 불쾌하고 갑갑했다. 제대로 된 토론과 반박을 할 능력은 없고 부지런히 욕만 갈기고 가는 그 태도가 도무지 한심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그래도 일베와 같은 집단의식이나 토론전략이 횡행하지 않아, 어느 정도 성의를 갖고 첨예하게 논쟁을 하는 일이 가능했다. 나는 대학생 때 너댓살 많은 양반과 현피(?)까지 뜨자는 제의를 받은 바 있는데, 학교 도서관 앞에서 만나 한참동안 비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존댓말로 차분하게 대화를 한 소소한 추억이 있다. 그러나 일베에 잠식된 보수의 담론체계는 논리보다는 혐오표현을 통한 적개심 표출, 논거보다는 좌표찍기를 통한 집단적 위력과시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는 탓인지, 조국 전쟁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약 2개월 간 제대로 된 논쟁은 거의 불가능하고 대깨문 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그 댓글들을 지우는 나날이 고작이었다.
어째서 '문빠'나 '대깨문' 같은 혐오표현을 사용하면서, 그런 방식으로 공론장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 나라에 토론문화가 부재한 탓도 크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를 거치며 그런 행위가 보수집단 안에 꽤나 널리 확산된 점이 상당히 나쁜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건강한 토론을 하고 싶지않고, 당연히 그럴 능력도 안되고, 그러나 자기는 이겨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빠'나 '대가리 깨진 집단'으로 규정하고 침을 뱉고 돌아섬으로써 충분히 즐겁게, 공론장에서 자기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3.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시민들의 저항, 양쪽의 상호작용으로 그들은 권력을 빼앗겼고 더 이상 '대깨문'이나 '문빠'라는 집단적 기호로 상대방을 가둠으로써 승리감과 성취감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현 문재인 정권이 굉장히 무능하거나, 노무현 정권 당시처럼 여전히 보수세력이 강고하게 사회 주류를 점하고 있어서 얼마든지 조리돌림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10년이 넘는 정치격변을 통해 다져진 콘크리트 지지층이 떠받치는 정권이 성실하게 국정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대깨문'은 완벽히 실패한 전략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이 '대깨문'을 입에 담는 것은, 아마도, 첫째로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이고, 두번째로는 그것 밖에 다른 수도 마땅치 않으며, 셋째로 정말로 대가리가 깨지기를 그들이 원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보수 정치철학 자체를 심각하게 병들게 했고, 그 사이에 건강한 정치세력으로 재탄생될 기회도, 건전한 보수담론을 새로 만들어낼 기회도 발로 차버렸다. 남은 것은 여전히 그들만의 지지율 30% 짜리 울타리에 앉아서 반대쪽을 향하여 혐오를 쏘아내는 것 뿐.
문제는, 그러면 안되는 양반들까지 그러고 있다는 게 그들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점이다.
4.
보수세력이 거듭 쪼그라들면서 '새 얼굴'들이 수혈되고 있다. 가장 부지런한 진중권씨와 서민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 와중에 진중권 씨는 일반인들에게도 거침없이 폭언을 쏟아내며 최근 체면을 말끔히 털어내버렸고, 서민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하여 '공부 못하는 전형'이라는 말을 했다가 사방에서 얻어맞고 있다.
진중권씨야 그렇다 쳐도, 서민 교수의 이번 발언은 그들의 한계를 상당히 명확히 보여준다. 박노자 교수가 페이스북에서 그의 발언을 공개비판했고 그것이 언론까지 탔는데, 멀쩡히 노르웨이에서 한국의 정치 전반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진보 좌파 석학에게까지 '대깨문'이라니. 이것은, 이명박 정권 시기부터 보수 내에 확산된 일베의 토론전술과 집단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다. 자기의 말에 책임을 질 생각은 없다. 물론 토론을 할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떳떳하고 상대방은 저열한 집단이어야 하니, '대깨문'으로 몰아부치면 나머지는 그 '대깨문'을 혐오하는 집단이 연대의식을 발휘하여 나를 보호해준다는 편의주의적 발상.
그런데, 서민이 누구이고 진중권이 누구인가. 십수년간 사회문제에 대하여 꾸준히 발언을 이어온 전문가 출신의 논객들이다. 대중에 대한 친밀도와 인지도가 높고, 정치혐오에선 빗겨나 있기 때문에 정치권에선 이들이 귀한 자원이다. 마침 보수세력이 궤멸적 타격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제발로 깃발을 들고 뛰쳐나와선 정권을 공격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일반적인 정치상황에서는 이런 시점에 전문가 집단의 정치참여는 상당히 큰 선물을 안긴다. 저연령층과 중도층의 지지율을 상승시킬 수 있고, 정당의 호감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 당장, 유시민 작가가 처음 정치 전면에 등장했을 때에도 그에게 쏠린 지지세가 얼마나 컸고, 그가 자신의 정치세력에 기여한 바가 얼마나 컸던가.(진중권과 서민의 깜냥을 보면 너무 비교대상이 가혹하긴 하다.)
즉, 본래 지금 진중권 등의 새 인물의 수혈은 보수세력에게 상당한 호재이고, 그들은 자신의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시점이며, 그럴 충분한 역량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진중권과 서민은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매일 같이 '대깨문' 등의 막말을 쏟아내며 비호감만 쌓아올리고, 자기 정치세력의 지지율이 곤두박칠치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자기 정치행위만 일삼는다. 도대체 왜?
5.
외부에서 유입된 새 얼굴들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혐오발언과 막말을 쏟아내는 지금의 상황은 보수세력 몰락의 조종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본래는, 더 잘할 수 있고 잘해야 하는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로 이런 정치적 무능력자들의 발언이라도 써먹지 않으면 안될만큼 보수집단이 사상적으로나 능력면에서나 완전히 타락해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진중권과 서민 등의 전문가 개인으로써는, 성실하게 토론을 하고 진영논리가 아닌 상대의 주장의 개별 논거를 살피는 태도를 갖추지 못하고 툭하면 막말이나 내뱉고 상대를 조롱하는 태도는, 지적으로는 게으르고 도덕적으론 그저 한심한 태도로써 그들 자신의 전문영역에서의 지식수준조차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태도다. 대학원 과정을 밟아봤다면, 연구방법론을 배우면, 해도 될 말과 해선 안될 말 정도는 충분히 구분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앞 단락에선 도대체 왜? 냐고 물음을 던졌지만, 그들의 행보를 보아선 도무지 근거가 없는 행동들뿐이라 도리어 전문성을 의심하게 만들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인식 수준으로 전문가 행세를 해왔다는 것일까?
보수집단은 민주화 이래로 잘못된 선택을 거듭했다. IMF 경제파탄을 덮으려고 박정희 경제부흥론을 띄웠다가 이인제의 대선불복으로 정권교체를 불러왔고, 동시에 박근혜라는 괴물을 정치무대에 등장시켰다. 타락해도 너무 타락한 이명박이란 자를 대통령 자리까지 올렸다가 친이-친박의 쟁투를 불렀고, 새로운 정치집단을 성장시키지 못했다. 그 덕분에 이윽고 정상적으로는 정치신인을 등용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져 결국 민주당의 180석 달성이라는 이변을 일으켰다. 다음 대선후보로 김종인 대표가 거론되는 현실에서, 오히려 막중한 책임을 지고 지지율 확장이라는 소임을 다 해야 하는 논객 출신의 새얼굴들이 오히려 지지율을 깎아먹는 1등 공신이 되고 있는 상황.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사실.
묻건데, 그들에게 '대깨문'이란 무엇인가? 언제까지 일베류의 혐오담론에 안주하며 깨진 조롱박으로 물을 건져올리려 할지, 사뭇 흥미진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