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를 대하는 한국인의 인식이 궁금해
나는 노태우 정권 시절에 학령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동원의 기억을 소지하고 있지 않다. 중고등학교가 각기 다른 종교재단이어서 부활절이라느니 무슨 행사로 해마다 몇번 교회를 채운 기억이 고작. 마침 군대도 강원도GOP에서 근무한 터라, 대민지원같은 대규모의 노동활동에 동원되지 않았다. 그저 해발 1180m 고지에서 광막한 북녘을 바라보며 혹시나 저기서 손예진이 뚝 떨어지지나 않을까...하는 소리는 농담이고.
동원을 대신해 기억의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참여와 축제였다. 2002년 월드컵과 촛불, 2004년의 탄핵 반대집회, 그리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 약화에 대한 반대집회. 2002년에 터져나온 광장과 참여의 기억은 중년층에게는 80년대의 투쟁의 기억을 소환하고, 이제 막 세상을 접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축제의 열띤 희열을 일깨우면서 촛불로, 다음 촛불로 전이되었다. 동원되지 않고 10만명, 100만명이 모일 수 있고, 또 모이도록 공간이 열리는 나라가 세계에 몇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삼성 허베이스피리트 유조선의 원유 유출 사고는 우리 시민이 공유하는 참여의 경험을 새로이 바꾼 혁신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이 민중봉기에서 외세의 침탈에 맞선 대규모 전쟁으로, 그리고 국지적 진지전으로 지속적으로 변했던 것처럼 우리는 월드컵의 축제의 에너지를 불평등한 한미협정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로, 부당한 탄핵과 비민주적인 행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변화시키며 그 사이 “봉사”라는 공공선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삼성 허베이스피리트 유조선 사고의 경우, 어떤 동원도 정부의 요청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의 의지와 아직 한자락 남아있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이 사람들을 태안의 바닷가로 끊임없이 밀려들게 했다. 냉정하게 보아 이때 나타난 시민의 광범위한 참여는 남들 하면 나도 해야 하는 한국인의 수동적인 경향성과 과거의 동원의 기억이 작용한 지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의 한국의 향상된 국제적 지위와 인지도 아래에서 이런 사태와 이정도 대규모의 봉사활동이 2020년 현대의 언론환경에서 세계에 전파되었다면, 그 파급력은 10년 전과 비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2020년이 된 오늘, 코로나19에 대응하는 한국인의 “선진적인” 태도를 보면서 우리가 공유하는 참여와 동원의 기억을 새삼 되짚게 된다. 북한이라는 적, 일본이라는 경쟁자, 미국이라는 불가항력에 둘러싸여 우리는 수십년간 강박적인 국가규모의 동원체제에서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서술에서는 나에게 동원의 기억이 없다고 말했으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야근이라는, 군대라는, 저임금이라는, 대학이라는 전시동원체제 속에서 살고 있고, 살아온 것이다. 온 국민이 단 하루도 열심히 살지 않은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그런나라다.
다수 남성은 군대라는 동원체제에 푹 담궈졌다가 나오고, 다수의 여성은 경영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부당노동행위를 매번 감당한다. 청소년은 학원과 야자에, 노인은 부족한 복지에 고통받으면서도 버티며 산다. 그 이유가 참 여러가지인데...한가지만 꼽자면 우리의 경제사정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나아졌고 교육수준은 이미 고려시대 때부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이었다. 민주화된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버틸만 했기에” 버틴 것이다.
만성적으로 누적된 동원체제, 그리고 웃기지도 않게스리 그 동원체제를 뛰어넘어 발현된 시민의 참여의 기억이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대응력을 세계최고로 만들었다면 과한 해석일까. 의료인들이 경제적 이익보다 의료행위의 가치를 우선한다는 것도 자율화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기이한 일이다. 오로지 높은 교육수준과 도덕수준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모든 공무원들이 총동원되어 야근과 숙직을 하는 것도, 청소년시절부터 야근과 밤샘공부를 수십번이나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결국, 분단국가의 비극을 함께 버티며 살아온 것이 이런 아이러니한 공공선을 만들어냈다.
모든 시민들의 헌신과 참여는 보상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 정부의 재정수준으로 이를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두가 이 고통스러운 코로나 대응 전면동원체제의 기억을 가슴에 묻고 또 다시 삶으로 돌아가,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분단과 동원의 비극은 당장이라도 끝나야 하지만 신중하게 여러번의 선거를 치러 구시대의 잔재를 걷어낸 뒤에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 사이에도 나도, 우리 부모님과 아내도, 모두들 나이를 먹어갈 테다. 동원에서 해방된 민주적 삶이 당장은 찾아오지 않겠지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자기기만이 크게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