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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Nov 04. 2020

그때는 세상이 조금 미친 것 같았어.

<높은 성의 사내>와 이명박의 최후

"아니 너는 아직 돈을 안벌어서 그렇지, 직장인들 입장에선 이명박을 찍고 싶은 그런 게 있어."


 그때는 세상이 조금 미친 것 같았다. 온전한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고 죄가 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동해안에 1박으로 놀러갔다가 올라오는 차 안에서 기어코 튀어나오고야 만 대통령 선거 이야기. 그리고 무기력한 여당 후보와 너무나 막강했던 이명박이라는 정치인의 존재. 그러나, 그가 가진 수십가지의 흠결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명박이라는 막연한 친구들의 기대.


 내가 이명박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친구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명박을 지지하는 이유에 대하여 내가 설득당하지 못하는 그 대화가 나에겐 고난이었다. 십년 가까이 알아왔던 그들은 그의 부도덕과 파렴치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딱히 노무현 정권에 대하여 큰 비판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에 대한 지지 의사를 내비쳤다. BBK가 이명박의 것이든 말든, 다스의 실소유주가 누가 되었든 상관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비난할 수도 없고, 그놈 말마따나 아직 월급통장 하나 개설 못한 내가 직장인의 심리를 헤아릴 수도 없으니 나는 끓어오르지 않는 혈기를 느끼며 짧은 논쟁에서 백기를 그만 들고 말았다. 대관령 양떼목장에서 내려오는 길목이었다.


 2007년 12월 19일, 그의 승리를 바라보는 모든 과정이 딱 그날 같았다. 검찰은 이명박의 여러 혐의를 모두 부정했다. 물론 모두가 검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유권자의 절반 이상은 검찰도 이명박도 비난하지 않았다. 범죄 따위, 거짓말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대학 교수 직함을 단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대운하라는 거짓말에 학술적 타당성을 부여하는 상황은 지식이 권력 앞에 얼마나 공허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었다. 이미 서울시장 시절부터 그의 치적을 홍보하고 비리는 감추기 위하여 분주했던 언론은 또 얼마나 신명나게 풍악을 울리고 있었는지. 깊은 겨울 밤, 세상이 빠르게 얼어붙어 무너져가는 감상에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딱 균형잡혀서 미쳐있었다.


 13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의 당선 뒤의 시간들도, 그리고 이어진 박근혜의 시간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지만 이미 무너진 질서 속에서 경험하는 혼돈은 이명박의 당선이라는 역치를 감히 넘어서진 못했다. 이미 미쳐버린 세상이다. 용산에서 불타죽은 사람들이든, 바다 속에 가라앉은 아이들이든 모두가 진실을 애써 외면하며 욕망의 절벽으로 향하던 2007년의 시간보다 더할까. 마치 달아오르는 냄비 속에서 차분히 익어가는 개구리처럼 나는, 그리고 우리는 찬찬히 느긋하게 이명박의 당선까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비되는 이성과는 반대로 미쳐가는 세상에 대한 실감은 시시각각 바늘처럼 첨예하게 등골을 찔러왔다. 그러나 말똥한 눈으로 그저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시간의 경험은 마치 <높은 성의 사내> 속 미국에서 살아가는 것 같았달까. 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독일과 일본이 승리하여 미국 서안과 동안을 각각 점령당하는 꽤 끔찍한 설정에서 시작되는 작품이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는데 소설이나 드라마나 상당히 리얼하고 리얼해서 잔혹하다. 미국인들은 일본의 신민이 되어있다. 일본은 미국인들을 고문하고 가스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미국을 넘어서 전세계에서 나치에 의해 자행되는 학살 학살 이어지는 학살. 죽음의 공포를 곁에 두고 정의와 질서가 뒤집힌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고통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탈출구를 찾는다. 소설 속에서 주요한 소재로 다루어지는 <주역>의 점성술이나 조금은 허황된 도피, 그리고 법으로 금지한 행위들까지.


 물론 실제 역사에서 미국은 일본에게 패하지 않았다. 소설의 상상은 그저 상상일 따름, 그러나 이명박의 탄생과 당선이라는 허황된 거짓말에 감히 소설이 비길까.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고통이 고작 소설 속의 학살극에 비할까. 더욱 잔혹한 사실은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떻든 간에 나의 삶에 존재했던 이명박의 시대와 광기는 부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당시보다 조금 정의롭다고 하여, 그 시대의 광기가,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모든 그 짐은 여기에 남아있다. 그것이 인간이 될 수도, 수 십 조의 금액이 될 수도, 마음 속의 오독과 증오가 될 수도 있다. 그가 9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옥을 나오든, 혹은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한들.


 이명박의 최종심 판결이 나오고 나니 당시 그의 죄를 덮어준 검찰들이 검찰개혁의 파고에 쓸려서 함께 입길에 오른다. 글쎄, 이명박에게 대권후보의 지위를 부여한 것도, 그를 실제로 대통령 자리에 앉힌 것도 다수 국민들인데 당시 검사들을 더 캐내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그들에 대한 법적 처벌은 가능하겠지만 그렇다면 명백한 범범자인 이명박을 알고도 선출한 국민들에 대한 법적 책임은 면탈되는 걸까. 전 국민이 함께 이명박이 초래한 사회적 비용을 떠안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굳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자면 1987년의 승리 이래로 민주 진보진영이 수구 권력집단에 맞서서 제대로 된 진지전을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의 힘이 약해도 너무 약했다. 거짓이 백주에 활보하며 헌법을 농단하며 국가를 문란하게 할 만큼. 검찰들의 타락은 국민들들의 오판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국민주권이 검찰권력을 능히 견제할 수준이 된 오늘에야 제대로 된 검찰개혁이 추진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안도할 따름.


 나는 모두에게 제대로 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명박을 뽑은 사람들, 이명박을 방관한 사람들 누구나. 이명박이 싫어서라거나 이명박을 뽑은 사람들이 미워서는 아니다. 그러나 내게 이명박 지지의 이유를 말하지 못했던 내 친구놈들처럼, 나는 선택보다는 선택의 근거가 부재했던 것과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것이 더욱 참기 어렵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광기가 아닐까. 원인과 결과, 행위와 책임이라는 논리의 연쇄, 사고의 아름다운 고리를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어였는 세상에서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그런 것 말이다. 그것을 참아내는 것도 그것을 참아내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도 누군가에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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