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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Nov 25. 2020

치약 캐피탈리즘

그리고 무고한 이들이 사는 세상

 치약을 적게 바르기 시작한 날을 기억한다. 아직 딸기치약과 아동용 칫솔을 쓰며 머지 않아 빠지고 말 유치를 위해 양치하는 습관을 들이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칫솔모를 따라 길고 맵시있게 짜여나오는 치약의 광택은 TV속 세상 만물이 모두 신기하고 재미난 어린 아이에게는 꼭 그대로 따라해보고 싶은 무언가였다. 기회는 매일. 하루에 세번. 나는 꼭꼭 신중하게 칫솔을 바라보며 칫솔을 쭈욱 짜곤 했다. 길고 맵시있게. 그리고, 반드시 치약의 반절 가량은 양치를 하는 와중에 거품과 함께 그대로 흘리고 만다.


 살구 하나 입에 물고 있기 버거운 어린 아이의 작은 아구였으니 새끼손가락 반토막은 될 그 많은 치약을 치아에 싹싹 발라 양치를 하는 것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입 안에 치약은 둥둥 떠다니다가 금방 버려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수십번이나 그 버려진 치약을 바라보며 이게 왜 자꾸 덩어리째로 흘러나오지 하고 쳐다보다가 어느날 깨달았다.


 아, 그냥 적게 바르면 되는구나.


 치약을 적게 발라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자 거꾸로 얼마나 더 적게 바를 수 있느냐가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새끼손가락 두마디 만큼 가득 바리던 치약을 손톱만큼, 다음엔 손톱의 반절만큼 끄트머리에 아주 약간 발라 양치를 했다. 그렇게 해도 거품은 잘만 생겼다. 애초에 치약의 양보단 양치질의 횟수와 양치 방법 등이 훨씬 중요한 일이니까. 그리고, 항상 칫솔에 담뿍 발라지던 그 TV 속 치약 광고가 전적으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도 나이를 조금 더 먹어가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치약 캐피탈리즘이랄까.

 그 누구도 치약을 칫솔모 가득 바를 필요가 없다. 자기 손톱만큼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TV 속에선 칫솔이든 치약 광고든 모두 치약을 풍성하게 쭈욱 짜내는 비주얼로 대중에게 그 행동을 각인시킨다. 실제 필요한 것의 세 배 가량을 사용하도록 조장을 하고 있으니, 비율 측면에서 치약광고만큼 과소비를 부추기는 것이 드물다. 그런데 치약처럼 낭비를 조장하는 광고를 끊임없이 TV에서 반복재생하는 것은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낭비를 해야 빨리 소비하고 또 다시 기업에게 구매를 하여 이윤을 발생시킨다. 그러니까 내가 늘 뱉어냈던 치약덩어리들은 곧 대기업의 수익향성 정책의 편린인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의 거의 모든 상품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전제로 생산된다. 슈퍼마켓은 시간이 흐를수록 거대화 기업화하며 진열상품을 늘리더니, 나중에는 창고형 마트라고 하여 대량으로 적재한 물건을 대량으로 사가지 않으면 안되게 시스템을 조성했다. 미국의 월마트는 이를 통해 유통공룡으로 시장을 석권했고 그와 동시에 가장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착취하고, 해고하는 악명높은 블랙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월마트란 빈곤층이 택할 수 있는 매우 풍성하지만 열악한 직업으로 통한다. 월마트가 초래한 대량생산에서 대량적재를 통한 대량 소비 패러다임으로의 진화. 고속도로 휴게소부터 동네 편의점까지 "유통"이 작용하는 모든 현장에 상품의 과잉이 존재한다. 그리고, 세계의 절반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


 2020년에 우리가 목도한 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 빈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가 자리하 있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세계 최고의 1,2,3,4차 산업기반을 모두 갖추었던 미국이 지금 둘로 쪼개져 국가 정체성의 근원 마저 따져묻게 되는 현실은 빈곤노예를 끊임없이 양산하는 대량산업체제에도 책임이 있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를 통해 형성되고 정착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피착취자 없이는 유지되지 못하는.


 대량생산은 그것을 소비하는 시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선진국일수록 해당국의 산업체들이 생산하는 모든 상품들을 구매해줄 시장은 그 국가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국가 내에 자본을 축적하는 계층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노동자/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하여 생산자로 시장에 진입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초기 산업국가들에게 완벽한 시장을 제공함으로써 대량생산체계를 자본주의에 완전히 합치시켰다. 식민지를 통해 그들은 원자재를 저렴하게 독점 공급받으면서 상대의 시장을 독식했다. 하나의 완벽한 생산시장, 하나의 완벽한 소비시장. 협력처럼 보이는 착취와 피착취, 지배자와 노예의 종속관계. 대량생산 체계는 제국주의의 다른말이다. 그것은 여전히 세상 곳곳을 깊이 병들게 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지구적으로 양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를 이내 초과할 전망이다. 암울한 현실은, 그 모든 죽음이 자본시장에 있어서는 꽤나 반가운 호재라는 점이다. 공장이 멈추고 공항이 텅 비워짐으로써 발생하는 손실이야 방역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조치이지만, 노동생산은 불가능하면서 연금은 지출케하고, 주택 등의 자산은 보유하고 있는 노인계층이 먼저 소멸하고 있는 판데믹형 죽음은 세계 여러나라 정부의 방역정책의 진실성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젊은이들은 살아있으니 그들은 노인들이 남긴, 노인에게 투자되었어야 할 자본을 가지고 머지 않아 코로나19가 종식되면 또 다른 경기 호황을 누릴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자본가들은 좀처럼 주식투자를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가치도 죽음도 자본주의의 욕망 앞에는 한낱 분향소의 아지랑이보다 가벼울 따름.


 그리고 후발 산업국가들에도 산업기반이 생겨 전 지구적 시장에서 자본가들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시장 주도권을 위해 투쟁을 하는 세상에서 인간성의 부활을 기대하는 것은 더욱 잔혹한 상상일지 모른다. 고작 인간의 가치라면 모를까, 역행하지 않는 엔트로피를 과잉 사용하여 모든 시장의 모든 참여자들이 평생 사용해서 다 못쓸 상품들을 생산하더니 그것을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대량생산을 지속하기 위하여 누군가에게 무상으로 불하하는 일 없이 소각하고 매장하는데 어마어마한 엔트로피를 사용한다. 현재의 지구의 자원이 아니라 머나먼 미래에까지 지구 인류가 공존공영하며 누릴 수 있는 자원을 이 대량생산 체계와 자본가의 이윤추구에 몰두하며 소진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모든 현대인이 의식주와 문화생활, 그리고 노동과 여가까지 모든 것을 대량생산소비사회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서 노예가 되고, 죽어서 자본이 되는 세상에 산다.

  

 여섯살 아이에게 치약을 과잉소비하게 만들던 대량생산의 세계는 빈곤과 저학력으로 인한 대량 사망을 21세기에 소환하였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지구적 욕망의 전시가 이루어지는 오늘날, 코로나19의 종식 뒤에는 이 자본주의의 야만성에 대한 성찰보다는 억눌린 욕망의 해방이라는 카타르시스가 이어질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고된 학력 습득과 노동을 통해 생산한 이윤을 거대 자본가들에게 수여하고 짧은 시간 각종 다양의 쾌락을 누린다.


 무엇을 해야할까?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는 치약처럼, 상품들처럼, 사람이 죽어가는 2020년에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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