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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Nov 18. 2020

엄마의 변심

야 그쯤이면 부족하지 않게 키웠지 뭐.

"영특하라고 내가 지어준 이름이야."


 외갓집 안마당에서 땔나무를 정리하시며 외할아버지께서는, 뒤에 앉아 그것을 구경하고 있던 열두살의 나에게 말씀하셨다. 여름방학을 맞아서 엄마는 할아버지께 가서 한문공부나 하고 오라셨고 사촌형누나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점차 외갓집에 머무르게 된 손자는 나 하나로 줄고야 말았다. 그래도 모처럼 나는 할아버지와 두런 두런 공부 이야기, 당신께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들 딸 할 것 없이 사촌형제자매들이 대부분 돌림자를 쓰고 있던 우리 집안에서 내 이름은 따로 외할아버지께 받은, 그러니까 외탁을 한 셈이다. 이따금 대전에 올라오실 때면 중절모에 정장을 빼어입으신 키 180cm의 노신사였던 할아버지는 나에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이름을 지어주신 분이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했다. "존경하는 분"으로 자기 외할아버지를 댈 수 있는 기쁜 삶이다.


 그러나 그런 외할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날 낳고 길러주신 엄마에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집 서점이 망한 뒤에 서울로 올라와 밤낮으로 가난과 노동에 시달리던 엄마는 외갓집에서 외할아버지의 위로에 완전히 무너져내려 흐느끼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있다. 그 해가 엄마가 40대 후반을 향할 나이셨으니, 인생의 황금기인 30대와 40대를 하루도 마음 편히 보내지 못한 뒤였다.


 내가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만큼 당신께서도 날 유달리 아끼셨다. 열명이 넘는 외손주 중에 드물게 얌전하니 책 보길 좋아하는 아이라서 더 그랬을성싶다. 결혼 뒤에 엄마가 힘들어할 때마다 할아버지께서는 "네 아들이 보통 아이가 아니니 걜 봐서 꾹 참고 살아라."라고 종종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엄마가 울던 그날도, 엄마의 하소연에 외할아버지는 그 말씀을 하신게다.


"아니야 아버지 나 너무 힘들어."


 겨울방학, 외할아버지 생신날 아침. 늘 그렇듯이 다 같이 아침을 먹은 뒤에 안방에 모여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엄마의 울음이 터져나왔고 벽에 기대어 흐느끼는 엄마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는 조용히 위로를 건냈다. 30대에 부도가 나고, 차압이 붙고, 경매에 넘어가고, 수억의 부채와 함께 이곳저곳에 저당이 잡혀버린 삶. 그 속에서 아직 철부지인 두 아이를 길러야 했던 부모님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어찌 필설로 형용할까. 단지 부모님은 버텨내셨고 그 아래서 누나와 나는 버티어내진 삶 만큼의 단단한 외피를 두르고 어른이 되었을 따름이다.


 외할아버지는 원래부터 과묵한 양반이라 노상 가타부타 말이 드무셨다. 그저 옳은 말만 하고 입을 다무셨다. 엄마의 흐느낌도 이내 잦아들었지만 그때까지도 그 후로도 엄마에게는 길고 긴 가난과 암흑과도 같은 노동의 터널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 절망과 쇠잔해진 마음을 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변했다. 최근의 일이다.


"야 그정도면 부족한 건 없이 키웠지."


 그날도 나는 엄마의 다육이 화분을 날라드리러 혼자서 모시고 이곳저곳을 다니던 중이었다. 바깥양반 이야기, 우리집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깥양반에 비해서- "나야 뭐 형편이 그러니까 알아서 한 거지." 정도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렵쇼?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부족한 것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사촌형이 넘겨준 게임기와 옷, 그리고 충분히 읽을 책 정도면 청소년기의 대부분의 요구가 충당되었다. 그 이상 무엇도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지각이 없었다. 오히려 대학에 간 뒤로 갑자기 씀씀이는 크게 늘게 되었는데 내 주변머리에 아르바이트를 쉽게 구하지도 못했다. 스무살 여름방학에 호프집에서 알바를 했지만 그것을 아빠는 보아넘기질 못했다. 그냥, 부모님은 여태까지 참아오셨듯 나의 늘어나는 용돈, 꽤나 무서운 학비를 참아내셨다. 이윽고 군에서 전역한 뒤에야 천만원 가까이 돈을 모아서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었다.


 그런 삶이었으므로 엄마는 당연하게도 나와 누나에게 큰 부채의식이 있으셨다. 최근의 변심 이전까지 우리의 성장과정에 대한 엄마의 고정멘트는 "너네가 알아서 컸지 나는 방목만 했다."라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젊어서 유능하셨기에 엄마는 친척들 중에 꽤 부유하게 자란 편이었고 그래서 당신께서 부모께 받은 만큼을 우리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더욱 아쉬워하셨다. 친가와 외가 모두 사이가 돈독하니 당연히 제법 재산을 모은 친지들이 있다. 서강대를 졸업한 외당숙부와 나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당숙께서는 "내 아들이었으면~"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며 엄마의 기를 죽이셨다. 그런 엄마였는데.


 중학교 3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치면서 학교는 무척 한산해졌다. 아직까지 학교급식이 전국에 보급되지 않던 시절이다. 도시락 대신 엄마에게 매일 천원씩 받아서 아침에 컵라면을 사서 친구들과 점심으로 먹었다. 잔돈을 한푼 두푼 모으면 일주일에 한번은 빅쓰리라는 비싼 컵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 지나면서 나는 엄마에게 "친구랑 컵라면 먹으면서 엄마가 우리 미워해~라고 장난치고 놀았다"라고 말을 전했다. 정말로 농담이었다. 정말로 친구끼리 한 농담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엄마의 인상이 확 굳으시면서 그 뒤로 난 단 하루도 아침을 거르는 날을 갖지 못했다. 엄마는 밤새 치킨을 튀기시고 새벽에 집에 와서 새우잠을 자고 또 내 아침을 차려준 뒤에 자리에 누우셨다. 그런 엄마였는데.


 이제 엄마가 완전히 자유로워지신 것 같다. 자녀에 대한 불필요한 부채의식과 가슴아픈 가난의 추억에서 말이다. "야 그정도면 부족한 건 없이 키웠지."라는 말이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기뻤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부족한 것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은 물질이 아닌 정신과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난한 사람이나 하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을 지킬 인격과 지식이 없는 재산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혹은,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데 스스로의 풍요로움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또 어떨까. 우리에게는 단지 가난이라는 조건이 어떤 의도 없이 존재했을 따름이고, 나는 성장의 과정 속에서 그러한 외부환경 속에서 내가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따져 택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나는 뭐, 최소한 "부족한 건 없는" 정신과 영혼, 인격과 지식을 갖추게 되었으니 부모님에게 남부끄럽지 않은 유산을 받은 셈으로 쳐야 옳겠다.


 다만 물질로써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별도로 있으니 그것을 충당하지 못해주셨던 것에 대한 아픔을 부모님, 특히 엄마는 오래 품고 사셨고 그마저도 누나와 내가 결혼하고 돈을 벌고, 조금씩 삶에 숨통이 트이는 것을 보시며 한 올 한 올 서서히 부채의식을 벗어던진 모양. 글쎄, 그때 좀 힘들긴 했지만 물질적인 행복의 부재한 것이 불행의 동의어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엄마의 부채의식에 대해서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으로만 생각해왔었다. 그리고, 엄마는 환갑도 훌쩍 넘기신 나이에 이제야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셨다. 이제 드디어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녀들에게서 더는 가난의 흔적을 보기 어렵다는 확신이 드시는 것일까? 캐물을 수가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지난 주말에는 엄마와 엄마 친구분을 모시고 풍기를 다녀왔다. 인삼을 한봉다리 사서 집에서 직접 찌고 말리고 홍삼을 만들어낸 뒤에 그것을 빻아서 우리집에도 나눠주고 당신들께서도 드신단다. 조금 나누어받았는데 막상 티스푼 하나씩 꿀과 함께 타서 차를 마시려고 보니, 향이 진한 것이 조금씩 타야겠다. 이거면 아마도 수백잔은 나올 양이다. 비록 30대와 40대를 통째로 암흑 속에 흘러보냈지만, 그래, 엄마가 그 고난의 기억에서 해방되는 것을 보는 날도 보게 되는구나.


 엄마의 변심은 그래서 또 다른 삶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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