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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Nov 14. 2020

커밍 아웃 민감성 라이프

살다가 살다가

  일본의 아동 문학, 사회주의 역사, 동아시아 에스페란토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긴 방랑 시인 예로센코(1889~1952)는, 중부 러시아 벨고로드의 오부코브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적인 종교인이었던 친척들은 홍역을 앓았던 4살의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서 정교회의 완쾌 기도 형식대로 그 눈에 ‘성수(聖水)’를 무리하게 뿌렸는데 파란 하늘과 지붕 위의 비둘기 보기를 좋아했던 아이는 더 이상 세상의 빛을 못 보게 되고 말았다.


 일손이 되지 못해 가정에서 소홀한 대접을 받았던 눈먼 아이는 군대식 규율로 유명했던 모스크바 맹인학교에서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는데 수업 때는 인종주의에 젖은 교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흑인종이 백인종보다 덜 문명적이라 하신다면 여름철 불볕에 피부가 많이 타서 까맣게 되면 문명인의 자격을 잃게 됩니까?” 재학 시절에는 벌받느라 고생하고 졸업 이후에는 레스토랑에서 바이올린 연주로 생계를 이었는데 그의 비장미 넘치는 음악으로 부르주아적 청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예로센코는, 한 톨스토이주의자로부터 에스페란토라는 새로운 ‘만국의 언어’를 익히고 1912년에 영국 유학 길에 나섰다. 음악 공부보다는 제정 러시아의 군사주의적 억압의 분위기를 벗어나려는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런던에서 거물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의 제자가 돼 “진화란 상호 경쟁이 아닌 상호 사랑으로 인해서만 진행된다”는 것을 배운 그는 영국 경찰에 의해서 ‘불온 인물’로 분류돼 1914년에 일본으로 가 도쿄 맹(盲)학교의 청강생이 됐다. 세계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살육으로 접어들었던 1914년에 전쟁을 무엇보다 혐오하는 예로센코의 생애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에스페란토를 공동 언어로, 그리고 무정부주의적 상부상조의 사상을 공동 이념으로 하는 초(超)국가·초(超)인종적 세계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던 예로센코는, 톨스토이·크로포트킨을 흠모했던 일본의 진보계 인사와 친하게 되었다. 나중에 진보적 연극의 선구자가 된 아키타 우쟈쿠(秋田 雨雀·1883~1962)는 그로부터 러시아어와 에스페란토를 배웠으며, 여성 수필 문학의 개척자 소마 곡고(相馬黑光·1876~1955)는 예로센코를 자신의 집에다 투숙하게 해주고 함께 예술과 정치를 토론했다.

 

 천재적 어학 능력을 보유한 예로센코는,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사귀면서 2년 만에 일본어로 소설과 시를 쓸 정도로 일본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지금도 아동 문학의 고전으로 여기는 <등잔의 이야기>(提?の話)나 <복숭아 색깔의 구름>(桃色の雲) 같은, 깊이와 아동에게 쉬운 아름다운 언어를 겸비한 일본 근대 동화 선집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작품들이었다.


  “세계는 가족일 뿐”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 일본에서 일본인 사회주의자로 살려고 했던 예로센코는, 그 당시에 판쳤던 인종주의는 물론 ‘동양적 가치론’까지 ‘민족’의 허구를 유지시키려는 착취자의 도구로 정확하게 파악했다. 아키타 우쟈쿠의 일기장을 보면, 나중에 일본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졌던 예로센코와 1916년에 일본을 방문했던 인도의 저명한 시인 라벤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와의 공석 논쟁 이야기가 나온다. 타고르가 “동양 정신의 진수인 일본 정신”을 들먹였던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사고 구조에 맞는 “물질·합리성 일변도의 서구 기독교적 문명과 정신적 아시아 문명의 차이”를 논하자 듣다 못한 예로센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물질에 동서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당신의 이야기는 중점을 다르게 둘 뿐 구조상으로는 서구 인종주의자들의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 궤변과 동질적이다. ‘서양’과 ‘동양’을 차별화시키는 것은 민족들을 이간질시키려는 지배층의 수법일 뿐, 실제로 노동하는 사람들의 이해 관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똑같다”라고 일갈했다.


 그 말에 놀란 타고르가 “당신 도대체 어디 사람이냐?” 따졌고 그는 “원래 러시아에서 왔지만 지금 일본 시인으로 산다”고 대답했다. 타이, 버마, 인도 등지를 돌며 전래 동화를 수집하고 인도에서 영국 경찰들에게 잡히고 일본 감옥의 맛도 본 일이 있었던 예로센코에게는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신음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그쪽 언어를 단 몇 개월에 익혀 그쪽 사람으로서 함께 글과 말을 통해서 계급 투쟁을 같이 했다. 돈키호테의 정신과 근대적 세계 무정부 혁명가의 의식이 그에게 결합된 것이었다.


 그의 소설을 중국어로 옮기기도 한 그의 막역한 친구 루쉰(魯迅·1881~1936)이 이야기했듯, 세계 혁명가인 그에게 일본은 ‘너무나 협소한 공간’이었다. ‘세계를 살인자들의 손에서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 동료들과 함께 사회주의 동맹을 조직한 예로센코는, 데모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한 뒤에 1921년 6월4일에 일본에서 강제 추방을 당한다. 일제에게 그는 일개의 ‘외국계 불온 분자’였지만, 본국 ‘붉은 러시아’도 괘씸한 아나키스트에게 처음에 입국을 불허했다. 낙심한 그는 상하이에 체류했다가 1922년 2월부터 루쉰의 소개로 베이징대학교에서 에스페란토 교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루쉰의 집에서 기거했던 그는 아나키즘을 공부했던 정화암(鄭華巖·1896~1981) 등의 조선 혁명가들과도 교류했으며, 그의 강의에는 수강자가 500명씩이나 몰려와 학생들에게도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야말로 ‘입신양명’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주’란 있을 수 없었다. 1년 뒤 그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어렵사리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린 그는 물론 공산당 치하의 소련이 폭력 없는 미래 사회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모스크바의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일어 통역원이 되었는데, 일본인 학생 사이의 대화 내용을 일러바치라는 소련 비밀 경찰의 요구를 거절하자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스탈린 독재를 싫어했던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가능했던 해외 에스페란토 대회에서의 참가차 외유를 이용하여 사실 서구로 얼마든지 망명할 수 있었는데, 그는 소련 체제하에서의 고생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소련 오지의 소수 민족 맹인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오지의 여러 맹인학교 교직에 서고 지금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사용되는 투르크멘어의 점자를 개발하기도 한 예로센코는 결국 빈곤하게 살다가 암에 걸려 고향인 오부코브카에서 생을 마쳤다.


 마을에서 ‘착한 사람’으로 통했던 그가 조금씩 죽어가면서도 풀 냄새를 맡는 것을 매일 행복해했다는 이야기를, 후에 연구자들은 지역의 촌로에게 들을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아키타 우자쿠를 비롯한 예로센코의 일본 진보계 친구들이 그가 일본에서는 근대 문학의 고전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소련 당국에 알리고 나서야 이름도 없었던 ‘착한 사람’의 묘에는 묘비가 세워졌다.


고향의 풀 냄새를 사랑했던 세계인 아나키스트 예로센코, 공산당 시절은 물론 군사적인 민족주의가 새로이 ‘지도 이념’으로 등장되는 오늘의 러시아에서도 ‘위험 사상의 보유자’로밖에 안보일 것이다.


 지금도 도쿄 미술관에서 그의 초상화 앞에서 러시아인을 위시한 외국인들은 “그가 누구인가”라고 궁금해하며 서로 수군거리기도 한다. 천재이자 기인이었던 동화 작가이자 아나키스트. ‘착한 사람’ 예로센코….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시력이 없는 사람도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문학적·혁명적 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으며 그 사실을 실천적으로 입증한 그의 장애인 차별의 부정·극복의 의식은 선구적이었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에게 배웠으면 하는 것이, 명예와 안정된 생활을 팽개치고 크로포트킨이 진화의 원천이라 여겼던 인류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 그리고 세계 민중을 인종이나 민족별로 나누려 하지 않았던 세계 혁명가의 정신이 아닌가.


- 박노자, <‘착한 사람’ 예로센코>  2004년 9월 16일 <한겨레21> 전문 발췌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12116.html (박노자 교수님의 명문이라 감히 덜고 말고를 따지기 어려워 부득이하게 전문 발췌합니다.)



 

 <착한사람, 예로센코>를 한장 한장 넘기며 느낀 감동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전쟁과 혁명, 비탄과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세상을 누비던 그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역사의 뒤안길로 힘없이 스러져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기거하던 시절 그를 자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대학생과 예로센코는 열강의 침탈에 사분오열 찢어지고 있는 나라의 고통을 끝낼 길이란 해방을 위하여 흘리는 민중들의 "붉은 꽃" 밖에는 없는 결론에 다다르기도 하고, 그의 다른 글에서는 같은 병실, 다른 침상에 누워있는 부유한 집과 가난한 집의 두 소년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조각조각 도려내는 물질주의에서 벗어날 소년들의 인류애와,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비극의 역설을 드러낸다.  


 아름답고 슬프면서 그래서 절망스러운 그의 작품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그것을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은 어찌나 기이한 감정인 것인지.


 책은 15년 전에 나왔으나 그리 팔리지 못하고 이내 절판되었다. 군대 가기 전에 아끼는 후배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나중에 다시 구매하려고 하니 워낙 알려지지 않은 책이라 알라딘에서도 도통 검색이 어렵다. 하기사 이 책을 사서 소장 중인 사람이라면 남에게 팔 리가 없겠지. 단지 나와 책의 인연이 그뿐이었다고 헤아릴 뿐이다. 후배녀석은 제주도 지사에 발령났다가 싸이월드를 다들 하지 않게 되고 하면서 그 뒤로는 연락이 끊겼다. 아끼던 사람도 다시 만나기 어려운 세상에 책이 대수일까.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내가 품었던, 그리고 예로센코를 통해 응시하게 된 세상을 바라보는 깊고 서늘한 시선은 떠나간 책과는 다르게 내내 나에게 남아 나의 인식이 되고 경험이 되어 그대로 삶의 흔적이 되었다. 아픔에 대한 공감,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그것을 이룰 수 없는 무력감. 그러나, 감출 수 없는 분노. 그것은 세상에 내어보이기 어려운 어떤 감수성이다. 충분히 크고 격정적이기까지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타인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쳐 스스로 입을 다문다. 학습된 무기력이 아닌 이해에서 비롯된 순응이랄까. 붉은 꽃을 감히 누구의 것으로서 거리에 뿌릴 것인가. 풍요로울 때 더욱 폭력적인 공동체의 장벽을 그 약한 손으로 어찌 기어오르라고 말할까.


 느끼고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굳어진 삶의 태도는 일상의 공간에서 쉽사리 편견과 오해의 피사체가 된다. 인식 가능한 타인과 나의 아픔을 구분하지 않는 것도 그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것도 충분히 따지고 고민하여 내린 결론일 따름인데. 예로센코처럼 이곳 저곳에 모습은 드러내면서 도통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지 않으니 그것이 바깥에는 오만하거나 비협조적 태도로 비치는 것일까.


 그것은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지, 우리 집이 한창 어렵던 시절에 누나는 내게 "너도 우리에게 투정이라도 좀 부리고 해."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라면 오라, 가라면 가라 군소리 없이 따르면서 자기 힘든 내색은 가족에게 하지 않았으니 누나에겐 딱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최근 누나와 함께 나의 글을 읽으며 그런 자식 속내를 뒤늦게 알아가시는 것인지 지난 주말엔 "너도 되게 생각이 많았더라."라신다. 모진 세상에 온몸으로 맞서며 자식을 지켜온 부모님께 자식이 투정 부릴 것은 무엇이며,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것이지 이러쿵 저러쿵 말을 더해 무엇을 할까. 그런 자식이, 며느리까지 끼고 태안이며 하동이며 오라면 오고 인사를 드리라면 드리라고 하니 덤덤히 별다른 고민 없이 살아온 줄 아신 모양인 것인지.


 최근에는 아내와 투닥거리다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랑 어디 가서 외식을 하더라도 어떻게 조리를 했는지, 양념은 어떻게 썼는지 하나 하나 생각하면서 먹어. 너는 그렇게 먹지 않잖아. 너보다 내가 훨씬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이야." 물론 저마다 예민하고 민감한 구석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정작 나는 그런 삶에서 스쳐지나간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무기력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감수성은 그것이 작용하는 공간보단 작용하는 방식과 결과가 보다 중요한 것일 테다. 잃어버린, 포기한 것들의 댓가로 나는 가까운 사람들의 사는 모습보단 조금 멀더라도 "우리"의 이야기. 매일 매일의 경험이 일상에 미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품고 살았다. 그 결과,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연스레 나를 드러내보임으로써 세상의 퍼즐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나의 사소한 일상의 기억은 아내와의, 그리고 우리 가족과의 퍼즐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른 몇가지 글은 또 저 나름대로 각각의 퍼즐 조각으로 쓰일 것이다. 십수년간 입을 다물고 조용히 나를 세상에 투영해 온 날들이 이제는 가족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아있다. 나조차 상상할 수 없게 들이닥친, 커밍아웃 같은 나의 민감한 감수성이라니.


 앞으로의 삶에서도 이런 예민함은 내 삶을 끊임없이 성가시게 할 테지. 오늘은 아내와 양양에 와서 섭국을 먹었다. 부추에 대파에 팽이버섯에 째복이라는 조개에 섭. 크기가 조금 큰 섭은 사 오 등분을 해서 국에 들어가 있다. 칼칼하니 시원한 맛이지만 섭국을 집에 가서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 집에서 해먹기에 생 해물은 양 조절이 어렵달까. 그러면서 마음은 어떻게 학교 단위 생활기록부를 바꾸어나갈 것인가, 60여명의 교사들이 어떻게 협력해서 아이들의 미래를 만들어갈지를 생각하며, 가방에 담아 온 두 권의 책을 생각한다. 무엇 하나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일, 해서 내 삶이 나아질 것도 없는 것들을 이미 충분히 벅찬 내 어깨에 올리며. 이런 나를 바라보는 아내나 내일은 전라도까지 고춧가루를 얻으러가시는 부모님이나 어떻게 바라볼까.


 그건 또 내 민감성의 영역은 아니구나. 안녕, 예로센코. 다시 그 책을 읽을 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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