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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Oct 24. 2020

계절은 너에게 배웠어

오 놀라워라 그댈 향한 내마음

- 오 놀라워라 처음~ 보는 내 모습~ 오 새로워라~ 그댈~ 향한 내 마으음~


"야 뭐야 이게. 노래 이상해."

"야 겁나 느끼하지 않냐?"


 바닥에 엎드려서 공부를 하던 나는 고개를 삐죽 들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던 누나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1996년, 지금까지도 서울에 흔하게 남아있는 언덕배기 끝의 반지하집에서 그렇게 나는 윤종신의 노래를 처음 알았다. 어느새 5집 가수였던 그는 <환생>에서 이제까지 내가 알던 남성 가수들과는 완전 다른 음색을 보여주었고, 마성의 변태 유희열의 작곡과 편곡으로 그 노래는 아직 이문세 씨가 지키던 <별밤>을 통해서 꽤나 자주 재생되곤 했다.


 지금 다시 듣노라면 도입부와 종결부의 그 이상야릇한 코러스하며 느릿한 멜로디와 탁월하게 유치한 가사까지, 그 시절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IMF가 닥치기 전 90년대 그 자체의 감수성과 분위기를 만끽하게 만들어주는 노래인데, 어쨌든 나는 누나와 한 방을 쓰며 강제로 별밤을 통해 그 노래를 반복 청취하며 노래와 그 독특한 미성에, 그야말로 꽂히고야 말았다. 물론 누나도 그 노래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별밤과 함께 듣던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에서도 그놈의 <환생>은 꼭 일주일에 한번씩은 흘러나왔다.


 당시까지 직접적인 계기는 노래방이었다. 당대 최고의 미성인 윤종신의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를 완전히 지나지 않은 14살 소년에게 한번쯤 따라해보고 싶은 매력이 있었다. 노래가 아무리 탁월하게 유치하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멜로디라인과 전개를 취하더라도, <환생>은 듣는 누구라도 머릿속을 강타하는 개성을 갖추고 있었기에. 그리고,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따라하는 것은 반쯤은 놀림과 비웃음을 담고 있기까지 했다. 그것이 애타고 아름다운 사랑이란 감정을 모르는 꼬맹이의 수준이다. 그리고 나는 사춘기 내내 신해철과 넥스트의 음악 세계에 빠져 살았다.


 윤종신의 노래를 제대로 듣게 된 것은 소리바다 덕분이었다. 나는 헌혈을 꽤나 열심히 하던 학생이었기에 주말이면 광화문 앞 헌혈의 집에 가곤 했다. 혈소판 성분헌혈은 한시간이나 걸리니는데 아직 웹툰이고 유튜브고 없던 시절이라 침대에 배치된 PC로 음악을 들으며 만화를 봤다. 매번 신해철의 노래만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윤종신의 노래를 검색해서 주욱 들었는데, 세상에나. 너무 좋은 노래가 정말 많았다. 그때까지도 <환생> 밖에 모르던 나는 비로소 <오래전 그날>이라는 불후의 명곡을 듣게되었고, 숨겨진 명곡이라고 할만한 <검은 리본 속의 너>, <수목원에서> 등의 그의 노래를 하나 둘 새로 배웠다.

 

 그리고 본래부터 내성적이었던 나는 불안정한 10대와 20대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윤종신의 노랫말들에서 가장 큰 위로를 찾았다. 나의 20대, 200년대가 윤종신의 음악인생에서도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도 나에게 그의 존재는 뜻깊었던 셈이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이런 노래를 쓸 수 있었던, 내가 입대하기 직전 <Behind the Smile>같은 희대의 명반을 내고, 마침 내가 제대하자마자 <동네 한바퀴>라는 지금은 익히 대중에게 알려진 탁월한 앨범을 낸 위대한 뮤지션이 2000년대 내내 제대로 된 무대에 서지 못한 채로 째째한 목소리로 시트콤과 예능프로에서 얼굴을 내미는 처지라니.


 너무나 우리들 이야기잖아. 너무 슬프도록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잖아.


 이내 나도 30대가 되었고, 여전히 그는 그였다. 월간 윤종신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당장 모두 찾아들었다. 매달 발매되는 싱글들 중에는 <치과에서>와 같은 장난끼 가득한 노래도, <그대 없이는 못살아> 봄과 가을 버전과 같이 인생의 단면을 일부 담아내기까지 한 노래도 있었다. 그대로 모두 우리 이야기, 나의 하루하루의 이야기가 되어갔다. 원치않는 이별이 동반되기도 하는, 한번 한번의 지독한 사랑을 겪으며 그의 노래를 하루 하루 들었다.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서 <이별을 앞두고>만 100번은 넘게 반복해서 들었다. 정신이 나간듯 며칠을 보내는 동안 그 노래가 내 세상이었다. 이쯤에서 꽤나 지독한 이야기까지 꺼내자면, 우리 결혼식의 축가가 <오르막길<이었다는 사연이겠지.


 그가 자기의 노랫말들을 책으로 냈다고 하기에, 발매가 되자마자 사서는 하루 이틀 사이에 다 읽었다. 그중에는 <이별톡>처럼 여러번 노래와 뮤비를 듣고서도 책을 읽고 다시 쓸어보게 되는 가사도 있다. 내가 지금 그에 대학 기억을 되짚어가며 글을 쓰던 것처럼 그는 처음 음악동아리에 가입해서 서울에서 원주로 향하는 긴 시간을 듣던 음악 이야기로 자기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삶과 노래, 음악과 삶. 그리고 글과 이야기. 나에게 윤종신.


 여전히 노래방에서 나의 애창곡은 윤종신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성장하는 그의 보컬 덕에 내 성대와 체면이 열일을 한다. 이 양반이 왜 말년이 갈수록 고음을 곡에 섞으시나 싶지만, 그 덕에 <좋니>도 나온 것이고 하니. 이제는 50대가 되어 이방인 프로젝트 처럼 훌쩍 떠나버리기도 하고, <엄마가 많이 아파요>의 사연이 완전히 자기 것이 되어버린 탓으로 노래 세계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질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윤종신처럼 장점이 뚜렷하면서 자기복제로부터 거리가 먼 아티스트도 드물다. 01OB 시절부터 2020년이 저물어가는 지금까지, 매번 새로운 노래로, 매번 새로운 음악으로 변신을 해 온 그이기 때문에 어차피 그의 노래는 늘 새로운 것이었다. 자기 혼자서 1년의 싱글앨범을 영화 컨셉으로 뽑아내질 않나.


 앞으로도 윤종신은 윤종신이겠지. 그리고 나 역시 나인 채로, 내 자리에서. 나의 계절을 걸어갈 테지. 퇴약볕처럼 타오르는 애절함도 한 없이 스산한 겨울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가슴 아픈 이별도, 나의 계절은 그에게 배웠어.

이 덕심, 찐이라구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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