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염 환자의 슬픔과 찬연한 가을의 하늘빛
"흐에에치! 헤에취!"
재채기가 끝나지 않는다.
"헤에에에취!"
이게 죄도 아닐 터인데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인다.
"샘 괜찮아요?"
"네...아이고..."
휴지를 든 손으로 코와 입을 부여잡고 겨우 상비약 상자로 가 엑티피드를 꺼낸다. 이젠 이름까지 외워버린 약. 손에 침이 튀었을 것이라 조심조심. 재채기 덕분에 두 눈이 시리고 눈물까지 나, 정수기까지 가는 걸음이 조금은 위태롭다. 뜨거운 물 약간과 찬물을 섞어 약을 삼키면 얼마 뒤에 코의 시큰함은 달래어지고 두어 시간 뒤에는 반대로 코 안쪽이 바삭하게 말라감을 느낀다. 아이고, 가을이로구나.
언제인지 기억하기도 어려울만큼 어릴 때부터 비염을 앓았다. 타고 난 특질이려니. 그런데다가 똥꼬발랄한 꼬맹이었던 나는 철봉에서 떨어져도 코를 박고, 공을 밟고 넘어져도 코를 박았다. 예닐곱살 어린아이의 코가 깨져봐야 콩알만했을 테지. 엄마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찬물에 코피를 몇번이나 풀고 닦아주곤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코뼈가 비뚤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안그래도 약한 코를 더 약하게는 만들었던 겐지, 초등학교 때는 축농증을 앓았다. 하도 코를 풀어대 양쪽 귀에도 약간의 후유증이 남아있다.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가방에 비염약을 두 통 넣고 다니면 깔끔하게 코는 잊을 수 있지만 갑자기 재채기가 심하게 터지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이 또한 아는 사람만 아는 고통이다. 그리고 코로나 덕분에 무척이나 난감해졌다. 나는 비염환자일 뿐인데, 그리고 재채기는 폐렴류의 증상과 무관한데도 멈추지 않는 "헤에취!" 소리에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 외출을 자제하고 있긴 하지만, 어디 이따금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종종걸음으로 화장실로 달아나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고등학교 때처럼 한달 내내 코감기를 달고 살지는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이를 먹고나서는 건강관리를 하는 덕분에 감기 따위 안녕이다. 10년 동안 제대로 감기를 앓아본 게 한손에 꼽을 정도. 그러니까, 그러므로 더더욱 계절이 바뀌는 10월의 비염은 나에게는 1년에 딱 한번 찾아오는 손님이기도 하다. 코가 시큰시큰 간질간질해지면 나는 멈추지 않는 재체기를 예감하고, 창밖을 보면 그 찬연한 망망한 하늘이라니. 그리고 단풍이 완전히 물들 무렵이면 몸과 코의 시계는 비로소 계절에 맞추어진다. 재채기도 콧물도 사라지고 나면 이제는 늦가을, 회색빛 산등성이를 뿌연 하늘빛이 스치는 시간.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을하면 생각나는 것이라곤 이 지긋지긋한 비염이라니. 퇴근길 하늘을 보며 혼자 웃는다. 짧아진 해거름에 빌딩이든 아파트 벽이든 노랗게 물든 아래로 은행은 잔뜩 노란 빛을 머금고 서 있다. 하늘빛을 그대로 똑닮은 단풍의 물결. 그리고 장을 조금 보기 위해 시 경계로 나아가면 가로수는 은행나무에서 벚나무로 바뀌어, 내가 옮아간 사이 어느덧 붉어진 노을빛 그대로 빠알강 이파리들이 차가운 밤공기 속에 젖어든다. 티 없이 맑은 이맘때의 하늘에 황금빛과 자홍빛을 넘나드는 노을, 그리고 단풍과 낙엽은 하루하루의 짧은 순간 안에 온갖 이야기를 던진다. 한해의 마무리, 내년의 이야기, 나이듦과 무르익음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가을이 되면 누구나 품게 되는 흔한 상녀...무에헤취!
킁. 재채기의 고약한 점은 어떻게 막아도 완벽히 막기 힘든 분비물이다. 코로나 덕분에 얼마나 그게 고약하게 멀리 퍼지는 것을 알게된 것은 좋은 일이다. 에프킬라에 붙어있던 반가운 단어 에어로-졸의 뜻도 정확히 알게 되었고 말이다. 재채기 한번에 주변 3미터에 에어로졸이 퍼질 수 있다니 참. 생활 건강과 코로나 예방에 그런 미세 먼지가 해로운 것처럼 노을에도 해롭다. 공기 중에 입자가 많으면 붉은 노을 빛이 사방에 흩뿌려져 우리에게 닿지 못한다. 대신에 비가 오거나 해서 미세먼지가 싹 씻겨나간 하늘이면 그 본래의 푸르고 붉은 빛이 제대로 와 닿는다. 이런 화창한 가늘날에는 코스모스 즐비한 길을 따라 걷다가 아무데나 돗자리를 깔고 누워도 좋으련만, 겨를도 여유도 마음에 닿지 않는다. 오랜 칩거에 지치지 않게 서로에게 말을 걸 뿐이다.
비염이 가시고 나면 겨울일 것이라, 그리하여 재채기와 비염약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여전히 소중하다. 저녁 산책이 어둠과 추위로 어려워지고 있으니 다른 소일거리를 더 만들어두었다. 마침 올해 첫 귤이 시장에 나오고 있어서 방콕라이프가 더 무르익어가는 시간. 노을을 등 뒤로 하고 뜨끈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몸을 지지고 있다 보면 또 뭐, 아침도 오고 봄도 오겠지.
아. 가을이 이제 막 시작인데 봄은 너무 이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