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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31. 2020

글과 인연

내가 글쓰기를 사랑하게 된 이유

 중학교 2학년 국어시간에 수필이라는 글의 종류를 처음 배웠다. 너무나 귀찮아서 단 일주일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일기라는 것도 이따금 군인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도 수필에 속한다는 것을 그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수필의 최고봉으로서 법정 스님과 피천득 선생님이 있다고 하시면서, 두 분의 글을 꼭 읽어볼 것을 권했다. 특히 피천득 선생님은 수필이라는 제목의 명수필을 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라는 말씀과 함께. 나는 학교를 마친 뒤 버스를 타고 교보문고에 가 문고본 두권을 샀다. 대단히 작고 가벼워서 읽기 편할 듯 싶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되돌아 오며 먼저 펼쳐 본 것은 피천득 선생님의 책인것 같다.


 그러나 청자와 연적 같다던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은 너무 곱고 섬세해서 중학교 2학년 생에게는 잘 읽히지 않았다. <인연> 속에 담긴 인연의 적적함, 몸이 작고 술이 약해 고생하셨던 이야기 등은 그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기는 애초에 쉽지 않았을 테다. 법정스님의 글은 그보다 읽기에 좋았다. 법정스님 초기의 글에서 보이는 활달함과, 피천득 선생님에 비해서 다소 덜 다듬어진 문장이 수필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피천득 선생님 책은 재껴두고 법정스님의 문고본 수필집을 아무 때나 아무 곳이나 펼쳐 읽었다. 몰래 산 <주홍글씨>를 절에서 밤새워 읽다가 들켜 책을 불태워버려야 했던 법정스님의 재미있는 이야기나 그 유명한 무소유의 깨우침이 마냥 즐거웠다. 


 그 책 속에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법정스님께서 먼저 입적하신 도반인 수연스님을 기리는 글이다. 청년 시절 두 승려가 함께 안거하며 지내는데 어느날 법정스님이 몸이 몹시 아팠고 수연스님이 밤에 먼 길을 다녀와 약을 구해왔다.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미담이지만, 이런 추억을 간직한 도반이 입적을 했으니 그 마음이야 어떠했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수연스님의 법명조차 곧 잊게 되었지만 법정스님의 절절한 글은 쉬 잊혀지지 않았다.


 다음해 여름, 소풍을 가서 교내 백일장을 치렀다. 학교에서 제시한 세가지 주제 중에 '아름다운 사람'이 눈에 띄었다. 어찌 생각하면 그것도 하나의 인연이었던지, 제목이 마침 꼭 같아서 <아름다운 사람>의 이야기로 서두를 떼며 글을 써 내었다. 소재를 잘 선정했기 때문이었던지, 시간이 부족해 서둘러 마무리를 해야 했던 졸문이었지만 그 글은 예상치도 못했던 장원을 내게 안겼다. 글에 대해선 조금의 관심도 없었기에 그저 뜻밖이었다. 오로지 법정 스님의 인연, 스님의 글과의 인연이 나와 글을 인연으로 묶어준 것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여전히 법정스님이었다. 새로이 산 책에서 스님은 만년에 접어든 깨우침을 담았다. 글은 점차 간소해지고 명료해졌다. 흥미진진하게 읽혔던 수필은 이제 편안함과 안도를 주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의 글이 와 닿았다. 어려서는 의미를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나이를 먹으면서, 대학에 가고 어른이 되면서 또 실연을 겪으면서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청소년기에는 중년기의 스님의 글을 마음에 들어하다가, 청년기에는 만년의 글에 마음을 빼앗겼으니, 스님의 나이를 따라먹는다는 생각도 때로 들었다. 그렇게 한 십몇년여를 보내고 보니 내가 가장 다양한 책을 읽은 작가가 법정스님이 되어 있었다.


 법정스님이 있어서 나는 적막함의 소중함을, 깊은 겨울 밤 산사 뒤로 흐르는 실개울의 맑은 소리를, 아름답게 나이 먹는 법을, 글에 대한 자세를 배웠다. 괴롭고 고단한 일이 있을 때 불 탄 흔적 같은 나의 마음을, 법정스님의 글월은 비처럼 달랬다. 스님은 이제 입적하시어 맑은 샘물과 같은 말씀을 더 들려주지 못하시지만, 글을 써가는 매 순간 내 글의 새암이 되어 나의 마음을 맑게 한다. 무엇을 위해 사유하고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는가.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삶에 살아가는 목적도 글을 쓰는 의미도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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