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활동 만들기의 함정과 고민

고등학교 영어 수업 재구성 분투기 : 1년차 / 교육과정 운영

by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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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수업 2차시는 유튜브 영국남자 채널의 불닭볶음면 1편이었다. 한국어/영어 자막이 동시에 제공되고, 깔끔한 영국식 영어발음과 쉬운 표현이 두루 나와 아이들이 재밌게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채널이라서 초반에 수업 재구성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선정했다. 개학을 한지 하루 이틀밖에 지나지 않아 수업영상이 준비되지 않았고, 아이들도 보고 올 시간 여유가 없어 수업 중에 한번 더 틀어주기로 했는데, 시간도 5분이라 여러모로 좋은 자료다.

https://youtu.be/JWZmdWP67DA

수업 절차를 구상하여 레슨플랜과 활동지를 만들었다. 사전에 구상했던 읽기 수업의 틀대로, 모둠원들이 하나씩 나눠서 해석을 하고, 해석을 하지 않을 시 감점을 하도록 했다. 함께 지도하는 선생님들에게도 그리고 나도 이정도 절차면 앞으로 거꾸로수업에 대하여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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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활동지를 만들기 위해서 영상을 보면서 자막을 일일이 타이핑해야 했다. 단지 한차시 수업 활동지를 만드는데 1시간 가까이 문서를 편집했으니 고민이 깊어졌다. 앞으로 이렇게 활동을 매번 만들어내야하나? 역시 연수를 들었어야 했나보다. 그랬으면 다른 선배교사들이 만들어둔 수업자료를 가지고 날로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개학 둘째날이라, 하루 종일 각 부서에서 전화를 받으랴, 그 사이 전입생은 새로 와서 교과서도 새로 신청해야 하고 학기를 지속하자마자 지속성에 심각한 고민이 들었다. 게다가 선생님들의 수업에 맞추어 데드라인도 매일 아침으로 앞당겨야 하니, 앞으로 고생문이 훤하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수업재구성. 후다닥 바구니를 세개 들고 가서 색연필 일곱세트, B4용지, 테이프를 담아서 선생님들께 가지고 갔다. 묵직하다. 실수한 게 또 한가지 있는데, 색연필을 잘못샀다. 포장재가 두껍고 색연필의 수량에 비해 무게가 비싸다. 24색 색연필 7세트가 A4 용지 박스 정도 부피였다. 이걸 1년 내내 들고 다녀야 하나? 말짱한 색연필을 두고 새로 가벼운 색연필 세트를 사달라고 신청하는 것도 민망하다. 온갖 고민이 파도처럼 덮쳐오는데 수업종이 울렸다.


"자 영상 보고 왔나 여러분?"

- 조용. 몇명이 손을 든다.


여기까진 예상했던 바다. 그리고 앞으로의 수업에서도 아이들이 영상을 보고 오지 않을 것을 전제로 수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레슨플랜엔 없지만, 아이들이 영상을 보고 오지 않았을 경우에 대비해 수업 초반에 영상을 틀어달라고 협의를 해 뒀다. 아이들에게 활동지와 색연필을 나눠주며, 영상을 보았다.


"다 봤죠? 단어 채우시면 됩니다. 조에서 아무도 모르는 단어는 질문하세요."


단어는 전반적으로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이 수월하게 채워간다. 자는 아이도 없고, 머리를 맞대고 슥슥 해나가는 게 보기 좋았다. 다만 해석은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영어 역량은 여전히, 해석 수업을 듣지 않은 문장은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방송을 보고서도. 예상하지 못한 아이들의 반응에 이번엔 당황했다. "I might have a little bit of milk" 같은 문장에서 might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업을 재구성하기 전에는, 그냥 내가 본문의 모든 문법요소와 단어 중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중심으로 시험을 출제하면 되었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수업을 채워야 하는 거꾸로수업에서는 이런 문제를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대응할 방법도 그 순간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음. 문법교재들은 아직 안샀죠? 조동사 파트할 때 might는 다시 소개할게요. 이건 패스."


몇가지 숙어를 중심으로 활동지 뒷장의 문장 해석들을 다시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얼마나 수업을 해야하지?"라는 문제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되도록이면 아이들이 스스로 활동지를 채우도록 하는 게 좋지만, 그럼 15분의 활동 시간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실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이 질문하길 바랐지만, 생소한 수업방식에 아이들이 적응되지 않아 질문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네 학급을 돌며 같은 수업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수업참여가 없는 상태에서의 교사의 수업주도를 가늠할 경험이 나에게 없다. 이 문제는 1년 동안 내내 발목을 잡았고 이듬해에야 극복된다.


수업후반부 활동.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부터 못하는 아이들까지, 다 함께 할 수 있는 음식홍보 포스터 활동이다. 사전에 지도한대로 모둠별로 아이들의 역할을 나누고, 불닭볶음면 말고 다른 음식을 해외에 홍보할 수 있도록 하는 포스터를 그리도록 했다.


역시 잘 되지 않았다. 첫번째 문제는 역할이 분담된대로 4명이 딱딱 협업하지 못했다. 한 학급 30명 중에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가 딱 7명이 있어서 각 모둠별로 고르게 들어가 있을리도 없고,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가 모둠별로 들어가 있을리도 없다. 어느정도 아이들이 파악된 뒤에 모둠을 편성하면 해볼 수 있는 활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업 재구성 초기에, 원칙대로 모둠별 협업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번째는 포스터로서 구성요소에 턱없이 미달된 모둠이 많았다. 22분을 배정했지만, 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아무것도 시작 안한 모둠이 학급별로 다발했고, 이미 팀워크가 상실된 모둠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포스터는 글씨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아 영작능력을 평가할 근거 자체가 부재했다. 5분만에 끝내고 색칠도 대충 하고 수다를 떠는 아이도 발생했다. 그러니까, 원칙대로 모둠별 협력을 하기 위해선 보다 고도의 수업활동을 조직해야 했다. 4명이 모두 집중해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야 20분 내내 활동을 유지할 수 있고, 대충 대충 3~4분만에 끝낼 수 있는 활동이라면, 차라리 안하는 게 좋다.


그러나, 이런 활동으로 1년 수업의 절반을 채워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지?


활동을 진행하면서 숙제가 점점 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후퇴는 없다. 아이들의 활동지를 모아 복도 방향 창문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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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항상 자기의 활동물을 누군가가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미국의 교실환경 조성 케이스를 보고 배운 것이다. 깔끔한 것을 추구하는 한국 고등학교 교실과 다르게 미국에서는 교실에 아이들의 활동물이 그득하다. 그런 점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이명박 정권 때 교과교실제가 추진된 바 있지만, 당시엔 교실과 예산의 부족으로 정책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의 교실에도 벽은 남아돈다. 그리고 복도에도.


"쌤 뭐에요 밖에 붙여요?"

"어. 애들아 이리 가져와- 안가져온 모둠."

"헐 대박. 야 내가 잘하자고 했잖아."


아이들이 수업이 끝날 즈음 나에게 몰려와 다른 모둠 것을 구경한다. 그리고 자기 모둠 것이 붙여지길 기대한다. 복도에 붙이는 것을 보고 반응이 색다르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그날 퇴근할 즈음, 몇몇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영어시간에 한 거예요?"

"네. 내일쯤 아마 전 반에 다 붙을 거예요."

"와 신기하네 애들이 뭐라고 해요?"

"에이 뭐 잘 만든 것들도 아니라서, 창피해하는 애들도 있고."


'다른 사람이 본다'는 것을 항상 알고서 아이들이 행동해야 한다. 학습에도 그렇고 인성지도에서도 필요한 지침이다. 비록 포스터 제작 활동을 고도화시키진 못했지만, 나름의 대책은 세워두고 있었다. 모두가 볼 수 있게 공개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글씨는 커진다. 그림도 커질 것이다. 보다 세련되고, 나아진다. 그리고 우리 수업을 학교 전체에 알려나가면서 나 자신의 노력에 대한, 그리고 도와주시는 선생님들의 헌신에도 보상을 얻고 싶었다. 미리 아이들의 작품을 복도에 공개하면서 아이들이 영작 활동에도 더 잘 참여해주길 기대했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숙제. 이제 겨우 이틀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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