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영어 수업 재구성 분투기 : 1년차 / 교육과정 운영
학교의 주체는 흔히들 학생과 교사, 학부모라고 한다. 그러나 학생은 교사와 갈등하고, 교사는 학부모를 기피하고, 학부모는 학생을 짝사랑하고 교사는 어려워한다. 학교의 주체인 세 집단이 각자도생하고 있으니 학교는 교육청과 관리자의 입김에 동동 떠다니는 외로운 섬이 되기 일쑤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학부모도 두루 괴롭다.
활동수업 아이디어를 계속 이어나가면서, 교실 환경조성에 대한 나의 아이디어는 "교실 어지럽히기"였다. 아이들의 활동물을 교실 이곳 저곳에 붙여서 영어 단어와 문장을 자주 접하도록 하는 것이다. 앞 챕터에서 다루었듯 교수법적 근거가 충분하고, 특히나 영어의 경우 실제로 자주 활용되는 방식이다. 아이들이 외워야 할 단어는 1학기에 500단어 정도다. 그것을 스스로 외우도록 하고 나는 채점만 한다는 것은 교육과정 운영 원칙에 맞지 않다. 나의 수업의 내신 평가에 반영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에 따라 수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사 스스로 최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단어장 도배하기 활동"을 시작했다.
영단어 교재 한 단원의 분량 75단어를 모두 커버하기 위해 한 시간을 배분했다. 1학기 수업시수가 총 4시간 X 17주, 68시간에 6시간이니 시간이 크게 부족하지 않다. 격주로 1회 단어 수업을 갖기로 했다. mp3를 들으며 단어를 한번씩 체크한 다음, 아이들이 각자 2개의 단어를 단어장으로 만들도록 했다. 30명의 아이들에 의해 60개 정도 단어장이 나올 터이니, 75개 분량에 근접한다.
"자 애들이 이해했지? A4 용지를 반으로 접어. 그리고 위에 단어 하나, 아래에 단어 하나를 크게 쓰고 뜻도 적고 꾸미면 돼."
"샘 이거 안하면 점수 깎아요?"
"당연하지. 모둠 다 깎는다. 이왕이면 이쁘게 꾸미시구요. 벽에 붙일 겁니다. 성의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단어장에 번호 써놨어. 1번이 1번 단어 두개, 2번이 2번 단어 두개, 이렇게 해서 30번? 누구니? 30번 단어 두개 보여? 그거 하면 돼."
"네에에에에."
단어 mp3를 재생해 발음을 인지시키며, 중요도에 따라 추가 설명을 하거나 파생형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30분을 소비했다. 학기초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대체로 정숙하며 수업을 듣는다. 그러나 빈 노트를 꺼내 단어를 한번씩 써보는 정도의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에 멈추고 "얘들아, 노트 같은 거에 한번씩 쓰면서 들어요."라고 말했다. 언제나 교사의 지도 시간에 맞물려 아이들의 주도성을 끌어올리는 노력이 중요하고도 어렵다. 수업재구성은 교사 스스로의 면밀성에 전적으로 바탕한다.
"아오 힘들다. 자 여러분. 종이랑 색연필 가져가세요. 모둠대표 나와."
아이들이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꽝꽝 소리쳐대며 단어 수업을 하고 단어 꾸미기 과제 시간을 주었다. 열심히 하는 아이들도 있고, 정말로 의욕이 없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럴 땐 그 아이 곁에 가서 격려를 해줘야 했다. 학력이 낮은 인상의 아이들을 위해서 캔디를 챙겨주면 그제서야 색연필을 잡거나 한다. 그러나, 교실 학습환경 조성을 위해서 맨 뒷자리의 아이도 앞 벽에 붙어있는 단어장이 보이도록 크게, 공들여서 만드는 수준의 노력을 10분의 활동 시간 안에 모든 아이들에게 동기부여할 순 없었다. 절대적으로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단계적인 향상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대개의 아이들은 그래도 고맙게도 신나게 떠들기도 하면서 단어장을 만들었다. 또 다시 교실에 붙인다고 하는데 싫은 눈치가 아니다.
"자 끝! 빨리 가져오세요."
나는 모니터링 하랴, 혹시 안한 모둠이 없도록 수행평가 체크하랴 정신 없이 교실을 쏘다니다가 종치기 2분 전쯤에 외쳤다. 아이들이 우르르 내게 나와 단어장을 내밀었다. 나는 테이프를 뜯어 하나하나 교실에 붙였다. 아이들에게 단어장 붙이는 것을 시키는 것은 안될 일로 봤다. 대충 붙이다가 싸움이 날 수 있을 뿐더러 교사의 지도과정에 아이들의 노동을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내 관점이다. 이를테면, 바구니를 대신 들어준다거나 하는.
"아!"
사고가 났다. 우르르 몰려드는 아이들의 단어장을 바삐 벽에 붙이며 테이프를 급하게 떼다가 한 아이의 단어장을 받기 위해 테이프를 어딘가에 붙여서 손가락을 비워둬야 하는데, 마구 급하게 하다보니 테이프를 잠시 붙여둔 것이 내 입이었다. 단어장을 받고, 다시 단어장을 붙이기 위해 방금 잠시 붙여둔, 테이프를 확 떼었는데 화끈 하는 느낌이 들었다. 테이프에 입술의 살점이 붙어 떨어진 것이다. 깜짝 놀라 입술을 깨물며 테이프를 계속 붙였다.
(아이고 테이프 떼는 기계 사달라고 해야겠다.
"자 여러분, 첫번째 단어수행평가는 3월 말에 봅니다. 쉬는 시간마다 단어 좀 보면서 외우세요."
아이들에게 한번 더 강조하고, 첫 수업을 마쳤다. 이미 쉬는 시간은 5분 쯤 지나있다. 나는 다음 교실에서도, 그 다음 수업에서도 정신없이 단어수업을 하며 모든 교실에 30장의 A4용지를 붙였다. 특히나 아이들이 자주 오가는 문가, 거울 양 옆에 먼저. 몇시간 뒤에 복도에서 담임 선생님 한분이 말을 걸었다.
"선생님, 또 붙이셨더라구요."
"네 애들 좀 외우라고."
"아 좋으신 것 같아요 선생님. 제가 필요하면 자리 좀 옮겨도 될까요?"
"아 네네. 미리 말씀 안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창문에 붙이신 것도 잘 봤어요."
담임선생님들께 미리 말씀을 드리진 않았다. 애초에 어디까지나 임시절차인 게 뻔히 보이는 환경조성에 불과하고, 고작 이런 사항으로 담임선생님들이 바빠 미치게 돌아가는 3월 첫주의 개학시즌에 전체 메신저 쪽지를 한통 더할 순 없었다. 승희샘과 재원샘이 모두 같은 층이어서, 한번씩 말을 걸어서 단어수업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다행히 좋은 의견들이었다. 퇴근길에 복도를 돌며 선생님들의 교실도 모두 돌아보았다. 10개 교실에 모두 단어장이 붙어있었다. 며칠 쯤 뒤에, 개학 첫주의 수업이 끝나면 담임선생님들께 양해의 말씀을 구하고 자진철거할 계획을 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삼일 뒤, 우려하던 사태가 터졌다. 승희샘이 들어가는 학급의 담임인 선배교사 한분께서 청소시간에 모든 활동물을 싹 치워버린 것이다. 교실벽과 창문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나와 나이차이도 상당하고 사전에 양해를 얻지 않고 한 일이라 무어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난감해하시는 승희샘 대신 이 문제를 어쨌든 해결해야 하니, 그 선생님 자리로 조용히 찾아갔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설명을 드렸어요 하는데 학기 초라 바빠서..."
"응? 무슨 일이시우?"
"아 그, 교실에 단어장 미리 말씀 못드리고 어지럽혀서요."
"아 그거, 좀 관리자들 보기도 그렇고 해서 치웠어요 아이고 내가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죄송한데 그게, 저희 수행평가라서 한번씩 더 해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아 하세요. 어지럽게만 안하면 되지 뭘."
"아 예예 제가 다른 샘들이랑 말해서 애들 활동으로 수행평가 체크하고, 샘 반은 하루만 있다가 떼라고 할게요."
"예~."
그러니까. 학교의 주인은 누구란 말이냐.
단어장을 이용한 환경조성은 흔하디 흔한 영어교수법의 하나일 뿐이고, 나도 학창시절에 단어장을 내 방 벽에 어지럽게 붙여본 일이 있다. 그런데 왜 교실에선 허락되지 않는단 말인가. 왜 다른 교사의 눈치를 보고, 관리자의 눈치를 보며 교실을 '어지럽힌다'는 걸까? 물론 염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아이들 중에는 종이를 떼서 비행기를 접을 놈도, 코딱지만큼만 떼어내서 돌돌 말아 그것을 친구에게 던지는 아이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이들이 다른 종이가 없어서 그 단어장을 굳이 떼어서 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학기 초의 분주한 분위기를 걱정해 미리 담임교사들 전부에게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나도 잘못이지만 아이들의 활동물을 고작 일주일도 참아주지 못하고 싹 거두어 분리수거통에 집어넣도록 한 선생님에 대한 원망, 학생을 위한 교육보다는 보기에 깔끔한 교실이 되어야 한다는 유신 시절 교실정화 논리에 신경질이 났다. 무엇보다도 직접 그 일을 경험한 승희샘 걱정도 되었다. 그 학급의 아이들도.
수업 재구성 하겠다고 활동지 만들랴 수업 챙기랴 평가 준비하랴 첫주부터 나도 벌써 멘붕이 오는데, 이런 사고를 겪으며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걱정할 틈도 잠시, 퇴근을 미루고 밀린 업무를 처리한 뒤에야, 수업 준비와 거꾸로수업영상 확인 등을 할 수 있었다.
수업 재구성 첫해의 갈 길이, 너무나 멀었다.
그 해의 영단어 수행평가지. 1페이지는 단순 암기로 구성되어 있고, 2페이지의 상단은 교사들이 간단히 영작한 문장에 적절한 단어를 고르도록 했다. 아이들이 처음 보는 문장들로서 단어 암기만으로는 문제풀이가 불가능하다. 하단의 영작은 단어장에 제시된 예문을 간소화하여 영작할 수 있도록 했다. 단어 암기에 있어서 예문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코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