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그러나 낯익은 감시의 기억
"어 행보관님. 충성 찾고잡자."
"어."
아침 9시. 중대장과의 야간 순찰이 끝났다. 후임들은 모두 상황실에서 근무중이라 내무실은 비어있었고 행정보급관만이 침상 하나에 걸터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우리 OP의 최고선임자였던 스물다섯의 나는 그를 의식하며 천천히 전투복 장비들을 해제하고, 다만 옷은 갈아입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서 공연히 빨랫거리를 챙기고, 관물대를 정리하는 척 일하는 시늉을 했다.
"밥 먹었냐?"
"그렇습니다."
"크흠."
행정보급관은 한마디 묻고는 말이 없었다. 야간 순찰을 종료하고 오전은 중대장과 그를 수행하는 나 모두 오침을 잘 시간이다. 금쪽 같은 시간에 내무반에 들어와서 쉬는 걸 방해하고 있으니 여엉 불편한 상황이지만 군 생활이 한달도 남지 않았다. 편한 자세로 떳떳하게 TV를 보기 시작했다.
"너 부사관 안할래?"
"네? 아. 아, 충성. 아닙니다."
한참만에 행보관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당황해서 "네?"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경례를 붙였다. 부사관이라니. 2년 동안 나를 죽일듯이 괴롭힌 행정보급관이어도 결국 군대는 군대인가 나는 속으로 웃었지만 그런 대거리를 추가로 하진 않았다.
"어 그래."
그 말만 남기고 다시 행정보급관은 TV에 집중하는듯한 태도를 보였다.
"야 근데 너 좌파냐?"
"엇...잘...아..."
이번엔 "네?" 라는 말을 나는 바로 하지 않았다. 행정보급관은 나와는 반대로, 시큰둥한 어투의 "부사관 안할래?"라는 질문과 다르게 몸을 휙 돌렸고 목소리도 다소 높아져있었다.
"어...좌파..."
행보관의 눈매를 맞으며 나는 잠시 생각을 고른 뒤에 느적하게, 그러나 차분히 말했다.
"사회 진보를 바란다는 측면에서 좌파...라고 하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허-."
행보관이 짐짓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꼬며 날 슬쩍 흘겨봤다. 2년동안 굴러먹던 사이이니 나에 대해서 퍽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러고
"나는 말이야, 네가 좌파라고 처음에 부대에 전입했을 때부터 봤는데 좀 특이하긴 한데 좌파 그런 걸 왜하냐?"
"어? 아니 알고...계셨습니까?"
"어 알지. 기무보좌관이 매달 너 보러도 왔잖아."
"아!"
나는 이번엔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다. 이것이 군대구나. 감시하고 있었구나, 나를. 좌파라고 딱지를 붙여서.
신병 때의 나는 우리 훈령병 중대의 최고 학력자 중 하나였다.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 빼고는 키도 크고 면접 태도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날 보러 온 선발 담당관들이 제법 되었다. 빡세다 수색대를 기피한 것 말고는 군악대 기수 등 좋다는 자리 여럿에 면접을 불려갔고 아예 우리 중대장은 날 밤에 따로 불러내서 조교를 할 생각이 없냐고 설득을 한 적도 있었다.
7,8군데에서 날 데려가겠다고 하였으니 어디든 꿀보직 하나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정작 훈련도롤 퇴소하기 몇일 전 나는 GOP, 양구 최전방의 소총수로 보직이 정해졌다. 그런데 그 과정이 기가 막혔다. 당시 훈련소에서는 전입부대 배치의 공정성을 기한다며, 전입생 명단을 프로그램으로 무작위 배정하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 거기에 훈련병 몇명이 나와 직접 무작위의 한자리 숫자를 입력하면 그것을 난수로 삼아 배치 프로그램을 돌리는 식이었다.
나도 난수 입력을 하는 중대원 대표 중 하나로 나가서 컴퓨터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수식 데이터로 작성된 부대원 명단들 중 오직 나만 별도의 부호로 체크가 되어 있었던 것을 보았다. 이게 뭔지 물어볼 수도 없었고, 영문도 모르는 그 짧은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고, 그리고 그 결과 내다 받아든 것은 1111이라는 주특기 번호, 그리고 GOP 근무를 해야 하는 양구의 백두산 부대, 전투경계부대라는 보직.
그러고 나서 부대 전입 한달 뒤에 처음으로 행정보급관이 날 불러서 누굴 좀 만나라고 했다. 잘 생긴 외모에 처음 보는 부대 약장에 별도의 견장까지 찬 그는 내 선배 한사람의 이름을 대며 그를 아냐고 물었고, 사실 그와 학생회 활동을 하며 꽤나 친하게 지냈던 나는 대번 그를 모른다고 답했다. 그 의문의 장교는 알듯 말듯 웃음을 짓고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 갔고, 드문 드문 우리 부대로 찾아와 나와 면담을 했다. 잘 지내고 있는지 뭐 하고 사는지.
그런데, 그 모든 게 감시, "좌파이기 때문에"라는 낙인이었다니.
"아...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냥 과 학생회장...과 대표였습니다. 그런데...아..."
"그래~ 그래 네가 뭐 큰일을 벌일 놈이겠냐 어리숙~해서는. 크하하."
행보관은 뭐가 또 기분 좋은지 날 보며 웃는다. 전역 후 10년이 넘는 시간까지도 꿈에서 날 구대하며 괴롭히곤 한 그 끔찍한 얼굴에는 호기심이 작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순간, 그가 말한 "좌파"라는 단어가 나의 언어체계와는 다른 층위의 것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과 학생회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단과대 학생회장 제의를 받았고, 군대로 도망쳤다. 내 짐은 후배에게 떠넘겨졌다. 그 빚은 군대를 제대한 뒤에 조금이나마 벗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내가 과 학생회장을 하고 있을 때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이 한총련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나는 그 과정에서 몇가지 역할을 했고, 그리고 학교의 대의원으로서 표를 행사하기도 했다.
다만 지위와는 무관하게 학교 내에서 하는 일이 조금 소문이 나서 요주의 인물로 정보부대에 진작 포착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 나에 대한 정보보고를, 당시 정보사에서 근무하던 내 친구놈이 직접 취합해 보고문을 올렸다는 말을 제대하고 나서 들었다. 고작 그것이 스물 셋 어린 청년의 전부였다. 그리고 군대는, 나를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주위 인물들을 선동하려 하는 인물로, 그리고 그것을 "좌파"라는 언어에 담아 나를 규정하고, 해발 1180m의 격오지로 보내버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내내 감시를 했다, 라.
"충성 찾고잡자. 행보관님 계셨습니까."
그때 인수인계를 마친 후임이 내무실 문을 열고 경례를 올렸다. "응응."하며 행보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 그에게 경례를 붙이고, 그가 내무실을 나가는 동안 조용히 떨려오는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좌파, 좌파라.
2학년 때 과 사회과학회 회장으로 선후배들과 MT를 가서 내가 준비한 세미나를 발제했다. 우파는 무엇이고 좌파는 무엇인가. 리버럴은 무엇이고 권위주의는 무엇인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이념지표에 따르면 2003년 당시 우리 나라는 일반적으로 상당히 극우적인 정치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에 비하면 상대도 되지 않게 보수적인 우파정당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은 이념지형의 맨 오른쪽, 그리고 권위주의의 구석에 서서 나머지 정치세력을 몰아붙였다. 여기에 남북의 오랜 비극의 역사가 만들어낸 반공의식은 고작 스무살의 청년들에게 "주사파"라는 낙인을 씌워 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거침없이 불이익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나는 좌파로서 떳떳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 세력을 일관되게 지지해오고 그를 위한 눈꼽만큼의 실천 외에는,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도, 세계의 빈곤에 맞선 어떤 의미있는 성찰을 해온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 하루 내 삶을 지키는 게 고작인 우리 모두 아닌가.
짧았던 20대 초반의 실천 활동, 그에 이어진 사소한 보복(그렇다고 최전방에서 GOP를 탄 게 나 하나뿐은 아니므로, "좌파"라고 낙인 찍은 내게 가한 보복은 실로 사소한 것이긴 하다. 모든 저항세력에게 비슷한 짓을 했다는 게 문제지.), 그리고 지나온 10년 여의 세월. 주체사상은 커녕,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은 커녕 나는 20대 후반부를 이명박과, 30대 전반부를 박근혜와 보냈다. 그리고 여전히 사회의 공공성과 분배의 정의를 도모하는 좌파적 삶이 제도화되는 일은 멀고도 멀었다.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나는 좌파가 아니다."라는 글을 보고는 짧은 실천과 그보단 조금 길었던 감시와 폭력의 시간이 떠올라 그것을 글로 남긴다. 나는 좌파인가. 좌파, 빈부격차를 줄여나감으로써 이루어지는 더 나은 삶은 가능한 것일까. 왜 우리는 2020년에도 여전히, 떳떳하게 나는 좌파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세상을 꿈꾸는 건 죄일까. 왜. 좌파면 어때. 니들이 생각하는 그 좌파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