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존 Dec 16. 2020

재미

어떤 준 소시오패스의 생존법


명사

(1)    

(기본의미)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

(2)    

이익이나 성과.

(3)    

안부를 물을 때에, 지내는 형편이나 살아가는 맛 따위를 이르는 말.




"넌 소시오패스 새끼니까."


 이제 거의 20년 가까이 만나온 대학 친구놈이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게 대화의 건전한 마무리는 아닐 것 같은데, 라고 생각을 하면서 나는 생활기록부 업무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 시점에서 보통은 나는 우리의 화제가 건강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친구와의 이야기보다는 내 일에 집중한다. 학교엔, 교육엔, 저항하는 교사들이라는 장애가 존재한다.


 소시오패스라고 불릴만큼 나는 우리 직장에서 별종을 자처한다. 이를 테면 나는 전체쪽지를 가장 많이 보내는, 가장 어린 줄에 속하는 "직장후배"다. 내가 원해서 맡은 업무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게 넘기길 거부하고 오랫동안 한가지 업무를 죽 해 왔다. 혁신교육. 수업편성부터 생기부까지 학교의 제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업무다. 처음엔 창체에 손을 댔다. 몇년간 신나게 욕을 먹은 뒤에 교내상을 바꿨다. 교사 중심, 지식 중심보단 학생 중심, 역량 중심으로 교내상을 만들자 직장선배님들은 더욱 신나게 욕을 하셨다. 그 다음엔 수업편성인데, 이것은 내가 직장선배님들을 많이 배려했다. 그리고 올해는 생활기록부 업무를 하고 있는데, 역시나 만만치 않게 욕을 먹는 중이다.


 사람들이 앞담화를 까든 뒷담화를 까든 굽히는 꼴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전체쪽지를 보내면서 이걸 해야 한다 저걸 해야 한다 하니, 내 친구놈은 처음엔 나를 "계몽주의자"정도로 언급했다. 그것도 자기가 술자리 뒷담화로 내 얘길 듣다 듣다, 그리고 스무살 때부터 알아온 친구라고 하니 너라도 걔한테 좀 말 좀 잘해봐라 이런 소리를 좀 듣기도 한 모양인지 나에게 전하면서 온갖 욕을 뒤섞어서였다. 그렇게 2,3년 더 지나고 나니 이제 18년째 만난, 대학 7,9년을 함께 보내고 이제 직장에서 8년을 또 함께 보내고 있는 이 정다운 대학 동기님께서는 나를 소시오패스라고 거침없이 부르기에 이른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상당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MBTI 검사를 여러번 해봤을 때 나는 INTP 아이디어뱅크형과 ENTP 논쟁적 변론가형을 오가는데, 원래는 내향적인 성격이 사회화를 통해 외향적으로 바뀌어 지금쯤은 확고하게 ENTP로 굳어진 편이다. 그리고 ENTP 성향은 실제로 소시오패스로 보이기에 적합한 특성을 갖고 있다. 감정표현보다 이성이 앞서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타인을 설득하려 하고, 타인의 의견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으며, 과업 지향적인 특성으로 조직원들의 감정적 문제에 소홀하기 쉽다. MBTI 결과를 신뢰한다기보다는, 나의 직장생활 10년을 지켜보고 주변 여러 사람들이 내려준 결론이니 토를 달 이유도 딱히 없다. 소시오 패스라고 불릴 만큼 직장 동료들과의 사적 교류보단 나에겐 오직 업무, 학생들의 진학에 기여할 학교의 교육경쟁력이 우선 목표일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일명 "소시오패스" 답게, 이 모든 상황이 상당히 재미있다고 느낀다. 스트레스에 극도로 저항력이 높은 덕분이기도 하다. 업무로 느끼는 어려움도, 그로 인한 직장 동료님들의 뒷담화도 그저 나에겐 흥미와 재미의 영역이다. 내가 옳다는 근거는 없다. 단지 하루 하루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날 시험대에 올릴 뿐이다. 내가 틀렸다는 증거가 3년 단위로 나온다는 고등학교 교사 업무의 특성이 내게 도움이 된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에서 느끼는 몇가지 어려움도, 나에겐 상당히 재미의 영역이다. 항간에 떠도는 시월드의 공포 못지 않은 나의 처가월드도, 그리고 자잘한 결혼생활의 다툼도, 그리 어렵지 않다 나에게 해결해야 할 과업이 닥친 것만으로도 재밌다. 철밥통이라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고 결혼도 했으니 앞날에 별 걱정이 없는 것이, 사실은 이 모든 태평함의 뒷배경이다.


 브런치 매거진으로 협업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래서 무척이나 재미가 있다. 나의 필명을 제목으로 쓰려던 글을 다른 작가님께서 먼저 쓰는 사건이,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다른 작가님들의 여러 색 문장과 글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전에 느끼지 못한 재미와 색다름이다. 사적교류보단 과업중심 교류를 선호하는 나의 성향에도 이런 대화가 맞춤하다. 자아, 그래서 다음엔 어떤 글을 쓸까, 또 어떤 글을 읽게 될까. 쓰고 읽는 것은 이토록, 재미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운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